[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사람과 사람 간 물리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세상이다. 이 간극을 매우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것이 아닐까. 사랑과 연대를 노래하는 뮤지컬 <렌트>와 11년 만에 재회한 뮤지컬 배우 최재림의 마음이 더욱 특별하고 애틋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신시컴퍼니 제공

[인터뷰①]최재림 “11년 만에 재회한 <렌트>, 이젠 즐겨요”

지난 6월 16일 개막한 뮤지컬 <렌트> 무대에서 ‘콜린’ 최재림은 행복해 보였다. 상대역인 ‘엔젤’ 김호영과 ‘I’ll cover you’를 부를 때도, 관객들을 바라보며 ‘Seasons of love’를 합창할 때도 눈빛과 목소리에 꿀이 뚝뚝 떨어졌다. 뭔가에 진심으로 몰입한 자만이 발산할 수 있는 빛과 에너지, 즐거움이 묻어났다고나 할까.


최재림과 뮤지컬 <렌트>의 인연은 남다르다. 뮤지컬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La Bohême)>을 현대화한 작품으로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꿈과 열정,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을 그린다.


최재림은 2009년 <렌트>에서 전직 매사추세츠공대(MIT) 철학 교수인 콜린 역으로 데뷔했다. 그는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배역에 꼭 맞는 캐릭터와 연기, 그리고 풍부한 가창력으로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과감한 연기 변신을 거듭하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구축해 나갔다.


뮤지컬 <남한산성>, <넥스트 투 노멀>, <에어포트 베이비>, <킹키부츠>, <노트르담 드 파리>, <시티 오브 엔젤>, <마틸타>, <아이다> 등을 통해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입증한 것.


2011년에는 KBS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합창단 특집에 보컬 코치로 등장해 무대 안팎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돌연 2013년 모든 활동을 접고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에 진학해 2015년 말 뮤지컬 <리타>로 돌아오기까지 학업에 몰두했다. 성악 전공자로서 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체계적인 연기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런 노력들이 더해져 그는 무섭게 성장했다. 데뷔 10주년이었던 지난해에는 뮤지컬 <마틸다>에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트런치볼 교장 역할로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최근에는 MBC 음악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는 ‘방패’라는 캐릭터로 128대 가왕에 오르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 밖에도 현재 힌예종 연극원 연기과 석사과정을 재학하는 동시에 명지대 미래교육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뮤지컬 <렌트>에 매진하는 것이 1순위라고 말하는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 최재림의 시원시원하고, 진솔한 이야기들을 담아 봤다.


우선, 데뷔작을 11년 만에 다시 만난 소회가 궁금해요.

“무척 설레고, 매번 공연(연습)할 때마다 정말 재미있다고 느껴요. 과거에 비해 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여유도 생겼고요. 예전에는 ‘정말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강했는데, 요즘은 그런 마음들을 내려놓고 최대한 즐기면서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주변에서도 지금의 제 모습이 더 좋다고 하세요. 듣기에도 편하고, 역할과 잘 맞는다고 얘기해 주셔서 뿌듯하고, 즐겁게 공연하고 있어요.”

<렌트>의 2009년 시즌과 비교했을 때 이번 시즌과 차이점이 있나요.

“과거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수년간 ‘엔젤’을 연기했던 앤디 세뇨르 주니어 협력연출이 이번 시즌에 연출로 참여하면서 극이 좀 더 브로드웨이 버전과 가까워졌어요. 약간 거칠어 보이는데 되레 그 점이 굉장한 생명력으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랄까요. 가령, 이번 공연 내내 무대 위에 배우들이 쉴새 없이 왔다 갔다 해요. 어떻게 보면 중구난방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게 다 계산된 하모니 안에서 만들어진 동선이자 연출이에요. 그 덕에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과 넘버, 그리고 스토리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가죠.”

이번에도 콜린 역할을 맡으셨는데 특별히 연기에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나요.

“콜린은 인물이 가진 온도도 따뜻하고, 엔젤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제외하면 극 중 큰 갈등을 직면하진 않는 편이죠. 콜린의 넘버 자체가 제 음역대와 잘 맞는 편이고요. 그래서인지 딱히 어떤 장면에 힘을 실거나 연기에 변화를 준 건 없어요. 다만, 노래를 부를 때 좀 달라진 점은 있죠.”

[인터뷰①]최재림 “11년 만에 재회한 <렌트>, 이젠 즐겨요”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I’ll cover you’ 도입 부분이요. 예전에는 이 노래를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의 ‘꽁냥송’으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앤디 연출님이 캐릭터에 대해 논의할 때 각 인물들이 직면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들을 생각해 보자며 여러 아이디어들을 제시해 주셨어요. 예를 들면, 겉보기에 콜린은 한없이 여유 있고, 넉살 좋은 사람이죠. 동시에 그는 흑인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양성 환자이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지만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합리와 무지로 인해 청년들이 빈곤과 죽음에 몰리는 것에 대한 반항심을 가지고 있는 (입체적인) 인물이잖아요.

그렇다면 콜린은 과연 언제 어떻게 에이즈를 얻었고 진정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 인물인지, 혹은 그런 관계를 밀어내는 사람인지 등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해 보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I’ll cover you’도 다르게 다가왔어요. 콜린은 ‘I’ll cover you’를 통해 ‘나 너 좋아해, 너 나 좋아해’라는 식의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처음으로 누군가로부터 ‘아, 이 사람은 나를 나 자체로 좋아해 주는구나’라고 느낀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아요. 비록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처음으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삶을 내딛는 순간인 거죠. 데뷔 때는 이 노래를 시작부터 200%로 ‘나의 사랑을 너에게 줄게’라고 노래했다면 지금은 ‘네가 나를 천 번의 키스로 지켜 준다면 그동안 누구에게도 열지 않던 나의 마음을 열고, 너에게 솔직하게 다가갈게’라고 생각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콜린과 본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극 중 콜린이 인물들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잖아요. 물론 엔젤이란 더 큰 존재도 있지만 그런 모습들이 지금의 제 모습과 좀 맞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콜린처럼) 좀 성숙해진 면도 있고요. 다른 점이 있다면 콜린은 철학 강사지만 무정부주의자잖아요. 굉장히 자유롭고 혁명과 혁신에 앞장서는 인물이죠. 물론, 저도 구속되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대체로 제 주변에 만들어진 사회 환경에 맞춰서 살아가는 편이에요. 그 부분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콜린처럼 화도 잘 안 내실 것 같은데 이럴 땐 좀 화가 난다 싶을 때가 있다면요.

“저도 제가 언제 화가 났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어요. 그만큼 평소에 화를 잘 안내요. 뭐든 무덤덤하게 넘기는 스타일이죠. 다만, 그런 건 있더라고요. 제가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방어적으로 되는 순간, 화가 날 때가 있어요. 이런 거예요. 제 입장이나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 저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하거나 상대방으로부터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존중을 느끼지 못할 때 좀 화가 나죠. 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반대 의견을 계속 내는 사람과 대화할 때 좀 방어적이 되는 것 같아요.”

렌트는 사람 간 연대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죠. 배우님이 생각하는 사랑과 연대는 무엇인가요.

“음, 저는 동등함이랑 이해 같아요. 각자의 삶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동등하게 만나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충분히 아껴 주는 것. 그런 동등함이 연대와 사랑이 아닐까요?”


그간 다양한 작품에서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앞으로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사람은 누구나 다 나이를 먹으면서 본인이 가진 것들이 많이 바뀌잖아요. 반드시 지키려고 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기고요. 저는 매순간 삶의 속도에 맞춰서 그 시점에 맞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지금까지의 속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이젠 슬슬 <넥스트 투 노멀> 속 게이브 같은 역할은 놓아 주려고요. (힘들어서)

3층까지 뛰어갈 수가 없어요.(웃음) 다만, 언젠가 <에어포트 베이비>가 또 공연되면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더 조쉬를 만나고 보내 줬음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인터뷰①]최재림 “11년 만에 재회한 <렌트>, 이젠 즐겨요”

지난해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셨는데 예상하셨나요.

“예상을 안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됐다는 소식만으로도 ‘아, 됐구나. 기분 좋다’고만 생각했어요. 그저 당시 제가 맡았던 캐릭터가 굉장히 과감한 역할(뮤지컬 <마틸다>의 트런치불)이었고, 그 작품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큰 상까지 주시니 감사했죠.”

수상 이후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한데, 특별한 징크스나 기복 없이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듯해요. 달라진 점은 없나요.

“물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남우주연상이란 타이틀이 계속 저를 따라다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실제로 저희 직업이 그래요. 단숨에 벼락스타가 된 경우보다는 꾸준히 좋은 작품들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고, 서로 간 존중이 쌓이면서 상으로 이어지거든요. 그렇다 보니 상을 탔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거나 크게 변하지 않더라고요.”

*[인터뷰②]최재림 “복면가왕 연승했다면 '향수'불렀을 것” 로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2호(2020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