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미니멀 라이프
[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행복은 욕망의 충족에서 나오고, 불행은 욕망의 좌절에서 나온다. 사람은 본디 욕망의 동물이다. 그 욕망이 좌절보다 충족에 가깝도록 제안된 것이 미니멀 라이프다. 지금, 당신이 꿈꾸는 욕망은 어느 지점에서 머물고 있는가. “부자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많이 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재키 프렌치 콜러(Jackie French Koller)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것만큼 달콤한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달려왔다. 전자의 방법으로 뛰고 또 뛰었다. 달리는 동안엔 돈을 벌고, 모으는 데만 집중했다. 돈이 모이는 대로 최대한 비싼 집도 사고, 땅도 사고, 차도 샀다.
미디어의 영향도 적잖았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더 많은 걸 추구하라고 세뇌돼 왔다. TV나 라디오는 물론이고 신문, 잡지, 광고판, 웹사이트 공간의 광고들은 소유해야 할 물건이 많을수록 좋은 거라고 끊임없이 주술을 걸었다.
이런 흐름 속에 사람들은 치열하게 돈을 벌려 했고, 자신의 부를 치장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곧 성공한 인생의 훈장이나 척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4060중년들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마음속에 품어봤을 욕망일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그토록 원했던 사회적 부와 명예를 얻었을 터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인생의 행복으로 이어졌느냐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에 큰 물음표로 남아 있다. 오히려 요즘 그간의 성장·물질만능주의가 낳은 과잉사회, 인간소외로 정서적 결핍을 토로하는 중년들이 늘어나는 양산이다.
따라서 이제는 ‘인생 부자’ 타이틀을 전자가 아닌 후자의 방법으로 이루려는 사회적 움직임이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 ‘적은 것을 원하는 것’, 바로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다.
미니멀 라이프는 절제를 통해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적은 물건으로도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생활방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고 부른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사물의 본질만 남기는 것을 중심으로 단순함을 추구하는 예술 및 문화 사조인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영향을 받아 2010년대 즈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미권에서는 이 무렵 한 웹사이트가 등장하면서 미니멀 라이프 확산에 강력한 촉매제가 됐다. 잘나가던 회사에 돌연 사표를 던지고, 편안한 소파와 책 몇 권만을 가진 20대 후반의 청년들, 조슈아 필즈 밀번과 라이언 니커디머스가 웹사이트 ‘미니멀리스트(TheMinimalists.com)’를 열면서다.
그들은 “좋은 차, 큰 집, 넘쳐나는 물건을 가졌지만 주 70~80시간을 일하고 더 많은 물건을 사들이는 일로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며 물건을 줄이고 더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 여정을 소개한 사이트는 1년 만에 방문자 수가 월 10만 명에 달했고,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단샤리(斷捨離)’가 최고 유행어로 부상했다. 요가의 행법(行法)인 단행
(斷行), 사행(捨行), 이행(離行)에서 착안한 용어로, 일상에서 불필요한 것을 끊고 버리고 떠난 심플한 삶, 처세 등을 일컫는다. 단샤리 열풍으로 스타덤에 오른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정리법 등은 영미권에서도 화제가 됐으며, 그는 ‘2015년 타임 100인’에 뽑힐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경제·사회·문화 흔든 ‘미니멀 라이프’
우리나라에서도 관련 서적들이 번역 출판되고, 온·오프라인을 통해 미니멀 라이프가 조명되면서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이끌고 있다.
특히, 최근에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대중문화 부분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윤식당>, <삼시세끼> 등 미니멀 라이프를 표방한 TV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인기몰이 중이다. 해당 프로그램의 출연진은 물론, 주된 시청자 역시 중년이다. 그중 속세를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인물을 찾아가이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는 중년들의 <무한도전>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매주 <나는 자연인이다>를 6년째 시청하고 있는 사업가 A(55)씨는 “3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 정말 치열하게 살았는데 이제는 점점 일과 사람들에게 지쳐 간다”며 “모든 걸 다 던져 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처럼 혈혈단신 다 내려놓기가 녹록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A씨는 그러면서 “<나는 자연인이다>가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볼 수 있다”며 “지금 당장 그들의 삶을 그대로 좇을 순 없지만 실생활에서도 간단하게 따라 할 수 있는 미니멀 라이프는 추진하고 있다. 가령, 식생활도 영양소를 고루 갖추되 최소한의 차림으로 소식하거나, 필요 없는 옷이나 물건은 가급적 구매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A씨처럼 미니멀 라이프는 단순하게 쓸모없는 짐만 정리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활방식을 간소화하고, 식습관도 소식(小食)으로 바꾸며, 대인관계도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그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려들지 않는 삶의 태도가 그렇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끝도 없이 새로운 것들이 쏟아진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그것들을 다 따라가고 향유하려고 노력했지만 한계점에 부딪친 것이다. 되레 불필요한 것들을 좇을수록 골치만 아프고, 삶의 질도 떨어지니 차라리 이젠 좀 단순하게 살아보자는 사회적 풍토가 미니멀 라이프 관련 대중문화로 이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나라로 손꼽힐 만큼 과로사회다”라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니멀 라이프 현상이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이런 현상이 그동안 누리지 못한 여유를 향유하는 수준을 넘어 자칫 목표의식이나 삶의 에너지 자체가 약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작지만 특별한 소유의 의미
미니멀 라이프가 비움의 미덕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쓸데없는 것을 덜어낸 여백의 공간이 커질수록 그곳에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군더더기 없이 실용성을 강조한 이케아의 가구, 유니클로 패션과 무인양품의 소품 등 디자인과 가격에서 거품을 거둬낸 생활용품들이 인기를 얻는 것도 그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대개 우리가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버리고 나면,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권태롭고 자기 안의 에너지가 점점 고갈되는 느낌이라면,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다는 시그널일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무기력한 삶에 다시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장소를 바꾸어보거나 새로운 색깔의 옷을 입어보는 등 기존의 일상과 다른 행동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는 “행복한 미니멀 라이프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의외성에 귀를 기울이고, 일상의 가벼운 파열을 즐겨야 한다”며 “가령, 평소에는 해보지 않던 종교의 예배나 예불을 참여해본다든지, 절대 먹지 않던 음식에 도전해보거나 서먹했던 사람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선호하지 않았던 장르의 음악회에도 가보는 등 새로운 삶의 공간을 발견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는 최근 불고 있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케렌시아(querencia: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 또는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 트렌드와도 결이 유사하다.
실제로 요즘 점심시간이나 퇴근 이후 전문 오디오 매장이나 청음 숍, 만화방, 수면 카페 등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늘어나는 추세다. 심지어 출근길에 늘 버스 뒷자리에 앉아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라면 버스 뒷자리가 자신만의 케렌시아가 될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청음 공간인 ‘소리샵’ 관계자는 “점심시간을 활용해 혼자서 음악을 들으러 오는 분들이 많다”며 “본래 ‘좋은 소리’를 듣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오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동시에 이 시간만큼은 자신만의 완벽한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방문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니멀 라이프의 핵심은 비우고, 단출해진 일상에 또다시 거대한 목표를 두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즐겨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이야말로 미니멀 라이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참된 행복이기 때문이다. 결코 누구에게나 정형화된 미니멀 라이프는 없다. 어떠한 삶의 모습이든 진짜 본연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미니멀 라이프의 본질이다. 100세 시대가 펼쳐질 지금, 중년들이야말로 자신만의 미니멀 라이프를 모색해야 할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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