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 틔운 야구 새싹 홈런보다 더 짜릿하죠”
SK와이번스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만수(58) 전 감독이 재능기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지 벌써 1년 3개월째다. 46년간 야구만 알고 살아온 그는 동남아의 작은 국가 라오스로 건너가 초심으로 야구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는 중이다.이윤경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
“감독생활도 끝났는데, 앞으로 무얼 하실 계획입니까?”
2014년 10월, 이만수 SK와이번스 전 감독이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던 날 최창원 SK구단주가 물었다. 이 전 감독은 답했다.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온 제가 야구로 할 수 있는 일이 딱 스물두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일곱 가지를 바로 실행할 것입니다.”
은퇴 후 달콤한 휴식도 마다한 채 11월 12일 라오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불모지와 같은 그곳에 야구라는 스포츠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야구계 레전드, 재능기부도 ‘독종’으로
이 전 감독의 ‘즐거운’ 인생 2막 스토리를 듣기 위해 인천 송도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찾았다. ‘헐크’, ‘독종’으로 불렸던 날선 승부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옆집 아저씨처럼 인자한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어젯밤엔 아내와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자정이 되도록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결론은 ‘2015년은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한 해였다’였지요. 2016년에는 더욱 감사한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행복의 조건’은 나눔이다.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코치로 있을 당시, 야구인들이 다양한 곳에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하는 생각을 했다.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2013년 시즌을 마친 후, 라오스에 살고 있는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구 불모지인 이곳에 야구를 보급시키기 위해 들어와줄 수 있겠느냐” 하는 부탁이었다. 라오스는 야구 저변이 워낙 빈약해 세계 야구 보급에 앞장섰던 일본 야구인들도 번번이 야구팀 창단에 실패했던 곳이다. 지인은 당시 황무지에서 혼자 힘으로 야구팀 ‘라오 J브라더스’를 창단하는 등 힘들게 야구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당시엔 구단에 ‘매인 몸’이었기에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비로 구입한 야구용품 1000만 원어치를 라오스로 보냈고, 지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야구 홍보 방안과 팀 모집 계획을 짰다. 모두 40명의 선수를 선발했다.
은퇴 후 처음으로 라오스를 방문한 그는 충격에 빠졌다. 오랫동안 전쟁을 했던 가난한 나라의 청년들은 비쩍 골아 있었고,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선수들은 ‘하이파이브’를 시도하는 이 전 감독에게 거부감을 드러냈다. 라오스의 청년들을 본 순간, 그의 꿈은 더 간절해졌다. ‘라오스 사람들에게 반드시 야구를 알려야겠다.’ 이 전 감독은 ‘라오 J브라더스’의 구단주가 됐다.
“낙후된 이 나라에 야구를 보급해 청년들이 꿈을 키우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1904년 척박한 조선 땅에 ‘황성 YMCA 야구단’을 만들고, 야구 보급에 앞장섰던 질레트 선교사 덕분에 오늘의 한국 야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라오스에서 선수들과 스킨십을 늘리고, 스포츠 정신을 심어줬다. 항상 독려하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 훈련을 하다 보니 선수들도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풀었다. 지금은 선수들이 먼저 이 전 감독에게 달려와 안기고, 한국에 있을 때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식을 전한다. 인프라도 점차 갖춰지고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지난해 말 라오스 외교부와 무상원조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라오스 교육체육부에 1600만 원 상당의 야구용품을 지원했고, 조만간 야구 코치를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식 구장 건립이라는 가장 큰 숙제가 남았다. 라오스 정부가 야구장 부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지만, 1억5000만 원의 조성비용 마련이 난항이다. 이 전 감독은 지난해 후원 기업을 찾기 위해 무척이나 뛰어다녔다.
“평생 누구에게 굽실거려본 적이 없는데 참 많이 굽혔습니다. 현직에 있을 땐 모두 ‘도와주마’ 하던 사람들도 유니폼을 벗고 나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뒤늦게 인생 경험을 했죠. 그래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라오스를 오가며 재능기부를 계속 했더니 슬슬 진정성이 통하기 시작하더군요. 도움의 손길이 늘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멉니다. 기업인들이 저를 보고, 사회공헌과 해외시장 개척 차원에서 십시일반(十匙一飯) 모금에 도움을 준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혼자 주먹구구식으로 해 오던 봉사와 재능기부 활동을 보다 조직적,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재단도 설립했다. 선수시절 별명을 따 ‘(사)헐크 파운데이션’으로 이름 지었다. 서울대 야구부 주장을 지낸 박현우 코치 등 서울대 야구동아리 출신 6명이 이 전 감독과 함께하고 있다.
국내 초·중·고교 돌며 야구 지도 및 인생 멘토링
헐크 파운데이션의 재능기부는 국내에서도 이어진다. 형편이 어려운 운동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전국에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찾아가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야구 지도를 하는 것이다. 지난해 다닌 초·중·고교만 전국 40곳이 넘는다. 이 전 감독은 “2015년 초에 아내가 은퇴 선물로 사준 자동차의 1년 주행거리가 4만 km를 넘었더라”고 말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만수가 이런 곳까지 올까 싶은 오지들을 주로 다녔습니다. 한 번 방문을 하면 어린 야구선수들 응원도 하고 내친 김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강연까지 하고 옵니다. 운동선수의 부모님을 만나 격려도 하지요. 올해도 제 발이 닿을 수 있는 학교라면 어디든 달려갈 겁니다.”
교통비며 숙식비 등 모든 경비는 스스로 부담한다. 주최 측에서 봉투라도 내밀면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니다”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보통 지도자들이 물러난 뒤 경기 중계나 해설 등을 하며 ‘쏠쏠하게’ 수익을 올리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별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왜 그는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이 전 감독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비전표’를 들고 와서 보여줬다. ‘Never ever give up’, ‘10+3’, ‘BYC정신’ 등 자신의 인생철학을 담은 문장들이 정리돼 있었다.
재능기부를 하는 이유로 그는 BYC정신을 꼽았다. 2007년 이 전 감독은 미국에서 돌아와 SK와이번스의 코치가 됐을 때, 야구장에 ‘만원 관중’이 들면 팬티만 입고 구장을 뛰겠다고 공약했다. 그해 5월 26일 인천 문학구장은 만원이 됐고, 그는 기쁜 마음으로 팬티만 입은 채로 운동장을 도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당시 BYC 속옷을 입고 있었거든요.(웃음)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게 BYC정신의 핵심입니다. 46년 동안 받은 사랑을 반드시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대중과 공공연하게 해 왔는데, 입을 싹 씻을 순 없잖습니까. 실은 아내가 더 적극적입니다. 감독직을 물러나고 더 바쁜 남편에게 불평할 법도 한데, 오히려 더 열심히 나누라고 합니다. 은퇴 후 꼭 하고 싶었던 아내와의 동유럽 여행도 미루고 여기까지 왔네요.”
‘10회 말’ 인생, 안달복달 말고 봉사 즐거움 만끽
‘10+3’은 인생에서 10년 계획을 세 번 세웠다는 말이다. 전설의 공격형 포수인 이 전 감독의 어릴 적 별명은 ‘쌍코피’다. 중학교 1학년 말 야구를 시작하면서 10년 후 최고의 선수가 되는 꿈을 품었다. 하루에 평균 4시간씩 자면서 공 던지는 연습을 했더니 자다가도 쌍코피가 터졌다. 그렇게 3년, 천하무적이 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끝내 1984년 한국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타자가 됐고,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홈런 타자가 됐다. 미국에서 지도자로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도 10년 뒤를 내다보고 꿈을 키웠다. 5년간 마이너리그에서 코치를 하고, 6년째 메이저리그 코치가 되겠다는 것. 당시엔 불가능한 일 같아 보였지만, 불과 3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입성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지독한 노력파, 즉 ‘독종’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88년 만의 우승을 이끌면서 그는 월드시리즈와 코리안시리즈 우승반지를 모두 끼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으로 기록됐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미국의 선진 야구를 국내 프로팀에도 접목시키겠다는 각오로 SK와이번스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아직 감독으로서 원하는 것을 다 해보진 못했지만, 언제 어디에서든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더그아웃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마음 졸이던 그때보다 지금 훨씬 너그럽고 시야가 넓어졌음을 느낀다. 재능기부와 봉사를 하며 얻은 수확이다.
“야구복 벗으면 제 인생도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내려놓지도 못하고 늘 안달복달하면서 살아왔죠. 야구보다 더 좋은 게 봉사였습니다. 역전 홈런의 짜릿함은 3일 정도 가지만 봉사로 인한 잔잔한 엔도르핀은 무척 오래 가더군요. 그 재미로 계속하게 됩니다.”
그동안 두 번 세웠던 10년 계획은 모두 성공했으니 세 번째도 두고 볼 일이다. 이만수 전 감독은 자신의 인생을 야구 경기에 비유해 ‘10회 말’이라고 했다. 9회까지 잘 온 다음 연장전에 서 있다는 뜻. “안타를 치고 점수 나면 마무리인데, 글쎄요. 이 연장전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동안처럼 아웅다웅하진 않으려 해요.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겁니다. 참 올 봄에는 아내와 동유럽에 가기로 한 약속도 지킬 겁니다.”
1, 2, 3. 라오스의 청년 야구단 라오 J브라더스 선수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이만수 전 감독.
4. 여자 야구단 블랙펄스의 선수들에게 야구를 지도한 후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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