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격돌…한국 위기 넘을까
미국 바이든 정부의 인프라 확충 계획에는 국적과 관계없이 미국 밖의 반도체 회사를 끌어들여 가치사슬의 중심지를 미국에 두겠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대목. 자칫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이는 샌드위치 위기에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지난 1월 20일 바이든 정부 출범을 앞두고 주요 직책에 대한 인선이 속속 발표되는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은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었다. 여성으로는 첫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NEC) 위원장,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에 이어 재무장관이라는 화려한 이력뿐만 아니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워진 미국 경제를 어떤 처방으로 구해낼 것인가’ 하는 난제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이든 복잡한 현실을 푸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차가 길고 논리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경제정책일수록 더 어렵다. 이 때문에 특정 경제이론에 의존하기보다는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에 기여했던 종전의 정책 처방을 참고로 하는 실증적 방법이 많이 활용된다.

평가의 준거 틀로 삼아 왔던 여러 정책 처방 가운데 앨런 재무장관이 1999년 4월 예일대 동문회에서 연설했던 ‘예일 거시경제 패러다임’이 애용돼 오고 있다. 특히 조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으로 근무했던 오마바 정부 시절 경제정책의 근간이 되면서 당시 최대 난제였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적용됐다.

전체적인 기조는 경기 침체, 위기 극복 등과 같은 단기 과제 해결은 케인즈언 이론을 선호하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과 완전 고용 등과 같은 장기 과제는 신고전학파 이론을 받아들인 독특한 정책 처방 패키지다. 즉, 단기 과제는 총수요와 총공급(혹은 IS/LM) 곡선으로 이해하고, 지속 가능 성장과 고용 창출 등의 장기 과제는 토빈과 솔로 모델을 선택했다.

정책 수단은 재정정책보다 통화정책이 더 유용하다고 봤다. 이 때문에 재정정책은 경기 부양을 위해 일시적으로 적자 폭이 커지더라도 ‘재정 건전화’의 틀은 깨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통화정책은 물가가 어느 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경제 활력을 북돋는 데 바람직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종 목표인 장기 성장과 완전 고용을 위해서는 물적자본, 인적자본,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정부는 재정 건전화를 도모하고, 통화당국은 통화 완화 기조를 유지해 기업 이윤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제도 투자세액공제제도를 도입하고, 소비세율을 높여 저축과 투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봤다.

예일 패러다임을 토대로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1960년대와 1990년대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토빈 교수가 케네디 정부에 정책자문을 했던 1961년 이후 106개월 동안 확장 국면이 지속됐다. 1990년대에는 예일대 교수들이 다시 클린턴 정부와 손을 잡으면서 확장 국면이 2001년 3월까지 120개월 동안 지속됐다.

예일 패러다임은 미국 이외 국가에서도 활용됐다. 1990년 이후 ‘엔고(高)의 저주’에 걸려 20년 이상 침체 국면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교수의 발권력을 통한 엔저 유도 권고를 받아들여 ‘잃어버린 30년’ 우려를 차단한 아베노믹스가 대표적인 예다. 고이치 교수는 토빈의 제자다.

미국, 인프라 확충 통해 대중 견제 포석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지 2개월이 지나면서 예일 거시경제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한 바이드노믹스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경기부양책을 추진해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제적 피해와 국민의 고통을 극복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인프라 확충 계획을 통해 미국을 재탄생시키고 중국을 따돌리겠다는 목적이다.

경기부양책과 인프라 확충안의 규모가 예상 수준을 훨씬 넘어 두 계획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옐런 재무장관의 ‘고압 경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고압 경제란 ‘넘치는 것이 모자라는 것보다 낫다’는 정책 처방을 말한다. 실행 방식도 트럼프 정부의 노이먼·내시식 제로섬 게임 방식에 대한 반성으로 섀플리·로스의 공생적 게임 방식을 택하고 있다.

공생적 게임 방식의 모든 경기 대책은 일자리 창출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국민의 화합과 통합을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는 코로나19 사태로 그 어느 분야보다 중하위 계층의 고용 사정이 악화된 점을 감안해 이들 계층을 중심으로 오바마 정부 때보다 더 강화된 ‘일자리 자석 정책(employment magnet policy)’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정책도 고용창출계수가 높은 제조업 부활정책을 더 강화해 추진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제조업을 다시 보자는 ‘리프레시’ 운동과 함께 해외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까지 불러들이는 ‘리쇼오링’ 정책을 추진해 세계 공급망의 중심을 중국에서 미국으로 재편시킨다는 방침이다.

트럼프 정부 시절에 가장 크게 훼손됐던 대외정책은 다자 채널을 우선적으로 재가동해 당면한 글로벌 현안을 모든 국가가 함께 풀어간다는 방침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첫 업무로 오바마 정부 시절 부통령으로 근무할 당시 강한 신념을 갖고 추진했던 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를 행정명령으로 서명했던 것이 단적인 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바로 기후변화 시대다. 이상기온 등 기후변화야말로 생태적 대참사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환경 문제다. 세계는 10년마다 0.2도 속도로 더워지고 있는 가운데 2020년대 들어서도 어김없이 폭염과 극심한 가뭄, 한국 등 동북아 지역의 긴 장마와 홍수 피해로 사망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그런 만큼 기후환경협약을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바이든 대통령의 일관된 주장이다. 오바마 정부 시절 8년 내내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포스트 교토의정서’ 논의를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회원국은 윤리적 의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으로 이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바이든 정부가 출범할 경우 각국은 대책 차원에서 ‘그린 성장’과 기업 입장에서는 ‘그린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추는 일이 그 어느 과제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에너지 청정형’으로 생산구조를 바꾸는 동시에 원자력, 풍력 등으로 에너지원을 다변화시켜야 생존이 가능한 시대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경기부양책과 함께 중장기적으로 인프라 확충 계획을 추진하는 것은 대내적으로 경쟁력 순위가 세계 13위로 추락할 만큼 낙후된 인프라를 개조해 한편으로는 민간기업 활동과 국민 생활을 뒷받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취업이 어려운 중하위 계층의 일자리를 창출해주겠다는 1930년대 추진됐던 뉴딜 정책 관점에서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크다. 지난해 중국 경제는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률을 기록해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70%를 넘는 수준까지 추격해 왔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골드만삭스, 일본경제연구센터(JCER) 등은 2028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연임을 가정한다면 자신의 집권 기간 중에 중국에 추월당하는 치욕을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중, 반도체 격돌…한국 위기 넘을까
미·중 반도체 주도권 경쟁…
한국 전략적 선택 기로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디지털 콘택트 추세가 앞당겨져 초연결 사회가 도래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중심축 국가(pivot state)’일수록 주도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중심축 국가란 특정 국가에 의존하기보다 다양한 국가와 서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양회를 계기로 내수 위주의 ‘쌍순환’ 전략과 세계가치사슬(GVC)의 중심지를 더 강화하는 ‘홍색 공급망’ 전략을 추진하고, 바이든 정부는 주요 7개국(G7) 회의, 대서양 동맹 등을 통해 트럼프 정부 때 훼손됐던 유럽 등 동맹국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아시아 국가와 경제협력네트워크(EPN)를 구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콘택트를 바탕으로 한 중심축 경쟁 시대에 대중국 견제책은 ‘반도체 굴기’가 가장 효과적이다. 바이든 정부가 인프라 확충 계획에서 국적과 관계없이 미국 밖의 반도체 회사를 끌어들이는 ‘리쇼오링’과 함께 미국 내 연관 산업을 반도체로 집중시켜 가치사슬의 중심지를 미국 내에 두겠다는 야심 찬 구상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시진핑 정부의 ‘제조업 2025’ 계획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경제 대국의 패권 다툼과 깊은 연관이 있다. 1980년대 미국이 일본의 부상을 견제할 목적으로 양국 간 맺은 반도체 협정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뿌리가 됐다. 오히려 미국이 한국의 반도체 육성정책을 지원해 초기 비용과 시장 진입장벽을 낮춰준 것이 압축 성장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90년대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 경제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성장기를 누렸던 한국 반도체 산업에 위협이 됐던 것이 중국의 ‘제조업 2025’ 계획이다. 시 주석의 주도로 모든 국가 역량을 집중해 반도체 자급율을 70%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에 위협을 느낀 트럼프 정부의 견제로 한국 반도체 산업도 위기상황을 간신히 피해갈 수 있었다.

문제는 반도체 굴기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번에는 한국 정부와 반도체 업체들이 잘못 대처했다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오래전에 경고했던 샌드위치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양국으로부터 자국 내 생산기지 증설과 추가 투자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만을 감안해 경제적으로 중국에 쏠려 있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대외정책 우선순위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하루 빨리 한국 정부는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급변하는 미·중 간 경제패권 다툼에 맞춰 대외경제정책 우선순위에 균형을 회복해야 할 때다. 최소한 ‘친미원중(親美遠中)’으로 가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의 전략과 절충을 모색해야 한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사진 한국경제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