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안소희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 일상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교향곡이다. 어느 리듬, 어느 박자 하나라도 허투루 놓칠 수 없다. 아무리 작은 음률일지라도 곡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각각의 입장과 관점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다. 안소희 작가는 그런 일상의 파편을 모아 훌륭한 인생교향곡을 써 가고 있다.
안소희 작가의 그림은 다소 초현실적인 표현이 많다. 그렇다고 굉장히 신비롭거나 기묘한 풍경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정경이지만, 화면 연출이 꿈속의 상상처럼 친근한 구성이다. 현실과 상상이 맞닿은 캔버스에 초대된 느낌이다. 엉뚱한 대목에서 불현듯 미소 짓게 하는 그림이면서도 한편으론 사연 많은 우수(憂愁)가 엿보인다. 아름답고 즐거운 인생의 깊이가 익어가는 장면들이다. 마치 감정선 하나하나가 버릴 것이 없다고 전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에선 화면 속 인물보다 바라보는 내 자신의 감정이 더욱 주인공다운 이유다.
계단에 소녀가 쭈그리고 앉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옆모습이니, 표정은 읽을 수 없다. 정면을 향한 계단이 대문이라면 소녀의 위치는 집 안을 한참 되돌아간 모퉁이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거실 부분을 초가을 억새밭처럼 표현해 소녀를 저 멀리 밀어내고 있다. 아마도 감정을 쉽게 들키고 싶지 않은 소녀의 마음을 배려한 듯하다. 그나마 흰 벽면이 숨통을 트이게 한다. 지평선과 맞닿은 높은 가을하늘처럼 답답하게 조여든 마음의 여백이 됐다. 작품 <계단 위의 아이>다.



이처럼 안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풍경은 친숙한 일상에서 출발한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나만의 화원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기분이다. 비록 창문 유리의 경계를 넘지는 못할지라도, 바라보는 순간순간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것 같다. 첫인상은 다소 낯설지만 금방 어디서 본 듯 친근해지는 매력이 있다. 마치 “내 그림 앞에 선 당신이 즐거움을 느끼거나, 즐거움이 아니더라도 당신만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나는 꽤 괜찮은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말은 거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을 일으키는 그림이다.
선한 자극을 주는 기억의 조각들


안 작가 자신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 하나 더 있다. 작품 <어 레이어드 우먼(a layered woman)>이다. 푹신한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다소 경직된 인물 표현은 얼핏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서나 봄직한 화법이다. 실내임에도 겹겹이 옷을 껴입은 것을 보면, 뭔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 아니면 수시로 들고나는 수많은 생각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만화적인 상상력을 더한 사실적인 표현은 손맛이 살아 있는 붓 터치를 만나 특유의 생동감을 자아낸다. 유화이면서도 그리 무겁지 않고, 오히려 산뜻한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미세한 감성을 제대로 드러낼 줄 아는 드로잉도 안 작가의 숨은 경쟁력이다. 색연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완성도와 깊이를 전해준다. 특히 잘 짜인 연극의 에피소드 한 장면을 엿보는 것처럼 남다른 긴장과 여운이 있다. 드로잉 작품 <편한 사이1>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구석진 침대에 옆으로 누운 남녀가 꼭 껴안은 모습이다. 서로 체온을 느낄 정도로 붙어 있으면서도 표정은 무뚝뚝하다. 뚱한 표정과 몸짓이지만 친밀한 정도로 봐선 분명 부부일 것이다. 사랑보단 정(情)으로 사는 ‘편한 사이’로서의 부부 일상이다. 소소한 일상의 경험이 삶에 평범한 재미를 더해주는 정경을 제대로 표현했다.


문뜩 떠오르거나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낙서에 가깝게 드로잉하는 것으로 그림은 시작한다. 그림의 주제나 표현의 기초를 멀리서 찾지 않고 자신의 삶에 덧대어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작품과 작가가 닮았다는 말이 곧 진정성이라고 믿는다. 자신만의 감정에 먼저 취하기보다는 그림을 만나는 관객과 함께 교감하길 기대한다. 조금은 막연한 풍경처럼 느껴지지만, 보고 있으면 어느덧 지친 삶의 위로가 돼주는 그림이다. 안 작가 작품의 전시 가격은 대략 10호(53×45cm) 80만 원, 50호(116.8×91cm) 300만 원, 100호(130.3×162.2cm) 700~800만 원 정도다.
안소희 작가는…
1983년생. 제주대 인문대학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10년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낯설거나 혹은 낯익거나’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제주 우수 청년작가 초청전(2013 제주문예회관), ‘새벽 네 시’(2015 갤러리노리), 안소희 소품전(2018 제주 캔북스), ‘계단의 아이’(2021 제주 새탕라움) 등 5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주로 일상의 경험이나 흔적을 일러스트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으로 재치 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전, 이중섭미술관 신년 기획전, KBS 제주 청년작가 기획전 등 여러 기획전에 초대됐다. 현재는 제주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김윤섭 미술평론가는…
미술평론가 김윤섭은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숙명여대 겸임교수,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2021년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아이프(AIF) 아트매니지먼트 대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글·그림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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