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안소희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 일상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교향곡이다. 어느 리듬, 어느 박자 하나라도 허투루 놓칠 수 없다. 아무리 작은 음률일지라도 곡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각각의 입장과 관점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다. 안소희 작가는 그런 일상의 파편을 모아 훌륭한 인생교향곡을 써 가고 있다.
계단 위의 아이, 캔버스에 유채, 80.3×100cm, 2021년
계단 위의 아이, 캔버스에 유채, 80.3×100cm, 2021년
“내 작업들은 바라보고, 관찰하고, 상상한 것의 결과들이다. 어릴 적부터 일상에서 느꼈던 감정과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에 상상을 더해 그리길 즐겼다. 무엇을 관찰한다는 건 계속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영화를 보듯, 책을 읽고 음악을 듣듯,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나를 담아보기도 한다. 내 모습에 그들의 모습을 담아내 공감을 만들고자 한다. 또한 무엇을 상상한다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나의 꿈이나 좀 더 재밌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때로는 어릴 적 일기장마냥 남에게 보이기 싫은 비밀스러운 내 모습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잔디밭이 돼주기도 한다.”

안소희 작가의 그림은 다소 초현실적인 표현이 많다. 그렇다고 굉장히 신비롭거나 기묘한 풍경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정경이지만, 화면 연출이 꿈속의 상상처럼 친근한 구성이다. 현실과 상상이 맞닿은 캔버스에 초대된 느낌이다. 엉뚱한 대목에서 불현듯 미소 짓게 하는 그림이면서도 한편으론 사연 많은 우수(憂愁)가 엿보인다. 아름답고 즐거운 인생의 깊이가 익어가는 장면들이다. 마치 감정선 하나하나가 버릴 것이 없다고 전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에선 화면 속 인물보다 바라보는 내 자신의 감정이 더욱 주인공다운 이유다.

계단에 소녀가 쭈그리고 앉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옆모습이니, 표정은 읽을 수 없다. 정면을 향한 계단이 대문이라면 소녀의 위치는 집 안을 한참 되돌아간 모퉁이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거실 부분을 초가을 억새밭처럼 표현해 소녀를 저 멀리 밀어내고 있다. 아마도 감정을 쉽게 들키고 싶지 않은 소녀의 마음을 배려한 듯하다. 그나마 흰 벽면이 숨통을 트이게 한다. 지평선과 맞닿은 높은 가을하늘처럼 답답하게 조여든 마음의 여백이 됐다. 작품 <계단 위의 아이>다.
막연한 풍경, 캔버스에 유채, 116.8×91cm, 2021년
막연한 풍경, 캔버스에 유채, 116.8×91cm, 2021년
8pm, 캔버스에 유채, 60×49cm, 2020년
8pm, 캔버스에 유채, 60×49cm, 2020년
생각하는 시간, 캔버스에 유채, 60.6×50.0cm, 2020년
생각하는 시간, 캔버스에 유채, 60.6×50.0cm, 2020년
작품 <막연한 풍경>은 계단에 앉아 있던 소녀의 마음이 아닐까. 답답한 집 안에 홀로 남겨진 어린 소녀에겐 상상의 자유만 허락된다. 혼자만의 상상세계에 또 다른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간단한 눈 맞춤이나 작은 교감 정도가 바람이다. 그녀의 상상 속엔 경계가 없다. 저 너머 하늘 선에 맞닿은 평화로운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키를 훌쩍 넘길 법한 억새밭이 겹겹이다. 답답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계단에 앉아 나만의 바다를 상상하는 것이다. 상상은 오로지 나만의 자유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풍경은 친숙한 일상에서 출발한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나만의 화원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기분이다. 비록 창문 유리의 경계를 넘지는 못할지라도, 바라보는 순간순간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것 같다. 첫인상은 다소 낯설지만 금방 어디서 본 듯 친근해지는 매력이 있다. 마치 “내 그림 앞에 선 당신이 즐거움을 느끼거나, 즐거움이 아니더라도 당신만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나는 꽤 괜찮은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말은 거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을 일으키는 그림이다.

선한 자극을 주는 기억의 조각들
a layered woman, 캔버스에 유채, 72.7×100cm, 2021년
a layered woman, 캔버스에 유채, 72.7×100cm, 2021년
편한 사이1, 종이에 색연필, 33×37cm, 2019년
편한 사이1, 종이에 색연필, 33×37cm, 2019년
인생의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적절한 망각의 덕분이지 싶다. 만약 매사의 경험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고 살아야만 한다면 너무나 불행할 것이다. 어느 정도 차면 자연스럽게 넘치는 샘물처럼, 인생도 ‘기억의 샘물’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억이 아주 증발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 망실된 기억이 추억으로 소환돼 뜻밖의 선물 같은 기쁨을 느끼곤 한다. 안소희는 바로 그림을 통해 세월의 먼지에 덮였던 기억들 중 선한 자극을 줄 수 있을 법한 조각들을 되찾아주는 셈이다. 적당한 상상력과 시각적 재미를 더해 더욱 흥미로움을 자극하면서.

안 작가 자신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 하나 더 있다. 작품 <어 레이어드 우먼(a layered woman)>이다. 푹신한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다소 경직된 인물 표현은 얼핏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서나 봄직한 화법이다. 실내임에도 겹겹이 옷을 껴입은 것을 보면, 뭔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 아니면 수시로 들고나는 수많은 생각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만화적인 상상력을 더한 사실적인 표현은 손맛이 살아 있는 붓 터치를 만나 특유의 생동감을 자아낸다. 유화이면서도 그리 무겁지 않고, 오히려 산뜻한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미세한 감성을 제대로 드러낼 줄 아는 드로잉도 안 작가의 숨은 경쟁력이다. 색연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완성도와 깊이를 전해준다. 특히 잘 짜인 연극의 에피소드 한 장면을 엿보는 것처럼 남다른 긴장과 여운이 있다. 드로잉 작품 <편한 사이1>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구석진 침대에 옆으로 누운 남녀가 꼭 껴안은 모습이다. 서로 체온을 느낄 정도로 붙어 있으면서도 표정은 무뚝뚝하다. 뚱한 표정과 몸짓이지만 친밀한 정도로 봐선 분명 부부일 것이다. 사랑보단 정(情)으로 사는 ‘편한 사이’로서의 부부 일상이다. 소소한 일상의 경험이 삶에 평범한 재미를 더해주는 정경을 제대로 표현했다.
eye contact, 종이에 색연필, 37×38cm, 2019년
eye contact, 종이에 색연필, 37×38cm, 2019년
self portrait, 캔버스에 유채, 49×49cm, 2021년
self portrait, 캔버스에 유채, 49×49cm, 2021년
안 작가의 그림은 일상의 기억에 상상의 꿈이 더해진 삶의 일기다. 꿈꾸듯 일상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행복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경험한 대로 삶의 결이 만들어져 가겠지만, 그 경험들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의 몫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으로도 충분히 꿈같은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듯 그는 자신이 본 것, 느낀 것, 꾸는 꿈, 경험한 일들을 자신만의 언어도 정리해 가고 있다. 그 작품들은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한다기보단, 그림을 통해 각자의 여러 감정이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는 단초를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림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선사하고 싶다는 것은 모든 작가의 꿈일 수도 있다. 안 작가는 자신만의 해법을 한 가지 알아낸 셈이다.

문뜩 떠오르거나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낙서에 가깝게 드로잉하는 것으로 그림은 시작한다. 그림의 주제나 표현의 기초를 멀리서 찾지 않고 자신의 삶에 덧대어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작품과 작가가 닮았다는 말이 곧 진정성이라고 믿는다. 자신만의 감정에 먼저 취하기보다는 그림을 만나는 관객과 함께 교감하길 기대한다. 조금은 막연한 풍경처럼 느껴지지만, 보고 있으면 어느덧 지친 삶의 위로가 돼주는 그림이다. 안 작가 작품의 전시 가격은 대략 10호(53×45cm) 80만 원, 50호(116.8×91cm) 300만 원, 100호(130.3×162.2cm) 700~800만 원 정도다.

안소희 작가는…
1983년생. 제주대 인문대학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10년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낯설거나 혹은 낯익거나’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제주 우수 청년작가 초청전(2013 제주문예회관), ‘새벽 네 시’(2015 갤러리노리), 안소희 소품전(2018 제주 캔북스), ‘계단의 아이’(2021 제주 새탕라움) 등 5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주로 일상의 경험이나 흔적을 일러스트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으로 재치 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전, 이중섭미술관 신년 기획전, KBS 제주 청년작가 기획전 등 여러 기획전에 초대됐다. 현재는 제주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김윤섭 미술평론가는…
미술평론가 김윤섭은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숙명여대 겸임교수,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2021년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아이프(AIF) 아트매니지먼트 대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글·그림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