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식 전 하나은행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장 인터뷰

우리나라에서도 생을 마감하고 가족 외에 제3자에게 상속자산을 나누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올바른 유산기부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까. 국내 신탁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배정식 전 하나은행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장(현 법무법인 가온 상속증여·트러스트센터 고문)을 만나 그 답을 들어봤다.
[special]⓶ “유산 기부 문화 확산 위해 세제 개선 절실”
웰빙만큼이나 웰다잉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 번 사는 인생, 잘사는 데에만 집중해도 모자를 듯하지만 더 나은 가치,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참다운 죽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양상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유산기부다. 특히, 우리나라는 예부터 유교사상과 혈족 중심의 상속 문화가 뿌리 깊이 내려져 있어, 유산 하면 대개 가족 상속 이슈로만 치부된 경우가 많다.€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전통적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며, 1인 가구와 고령인구의 증가, 사회적 나눔에 대한 가치가 부각되면서 상속자산을 기부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앞서 고령화를 겪고 있는 일본의 경우 상속인이 없어 국고로 들어간 개인 유산이 500억 엔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2017년 상속자 부재로 국고로 귀속된 재산이 525억 엔(5415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2012년(374억 엔)보다 40%가량 증가한 것이고 2005년의 3배에 육박하는 액수다. 이런 흐름 속에 이미 일본 내 고령자들 사이에선 유산을 미리 기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유사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는 만큼 유산기부 문화도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단, 아직도 자녀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데다 각종 세제 혜택 등 유산기부를 활성화시킬 제도적인 받침이 부족해 보편적인 문화로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변화가 시급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유산나눔의 유형은 무엇이고, 더 나은 사회적 나눔을 위해 개선돼야 할 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배정식 전 하나은행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장이 말하는 신탁을 활용한 유산나눔의 필요성과 한계점에 대해 정리해봤다.

중노년층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급증하고 있는데요. 고령화 시대에 스스로 노년을 아름답게 정리하려는 분들을 위해 유언장 작성하기, 사전 의료 의향서 작성하기, 고독사 예방하기 등의 활동과 함께 유산기부도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가요.
“고령층의 인구 비중이 증가하면서 노년의 삶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센터에서 노년층과 그 가족을 대면 상담 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체감했던 시기는 2017년 전후로 파악돼요. 2013년부터 시작된 경도인지장애 등 치매 어르신의 노후 대비를 위한 신탁 관리가 시작되다가 2017년 전후부터는 확연할 정도로 관련 상담이 증가했죠. 저희 센터 내 상담 인벤토리의 증가는 매년 2배씩 증가했는데, 그중 노년의 자금 관리 비중이 35%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변화는 상속 집행 건수의 증가로도 확인할 수 있죠. 우리나라 전체 사망자 수의 증가와 함께 고령층의 사망자 수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지만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됐는데, 지금까지 상속 하면 무조건 자녀와 손주라는 등식을 생각했는데, 그런 공식을 깨트리는 분들을 자주 접하게 됐어요.”

어떤 분들이셨나요.
“남편과 사별한 80대 중반의 여성 분이 유독 기억나요. 자녀 3명 중 한 분은 해외에 거주했고, 국내에 있는 나머지 두 자녀 중 딸 한 분이 이혼을 했는데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을 가장 자주 찾아왔다고 하셨죠. 이 점만 두고 보면 당연히 ‘그 딸을 더 배려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짐작은 기존의 상속 등식에서만 가능해요. 정작 이분은 자신처럼 혼자가 된 띠동갑 여동생과 같이 살고 싶다는 의지가 크셨고, 그 여동생이 혼자 살면서 형편이 어려우니 본인이 사망하면 그 여동생에게 재산을 주고 싶다고 본인의 상속 플랜을 이야기하셨어요.
[special]⓶ “유산 기부 문화 확산 위해 세제 개선 절실”
그 내용대로 신탁을 진행했고요. 이 시기가 2020년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점부터 고령층들이 상속인 외에도 재산을 남겨주고 싶은 니즈가 일어났던 것은 아니지만, 재산의 이전은 말 그대로 주고 싶은 이들에게 재산을 넘겨주는 의미이지 자식에게만 준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저 역시 체감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상담자들에겐 직계비속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도 있고,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고, 손주도 있고, 증손주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대화를 하게 됐어요. 이후 신기하게도 유산을 기부하겠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죠. 2020년 이전 유산기부 상담과 계약이 몇 건에 불과했는데 2021년 하반기에는 유산기부 상담과 계약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2019년 9월 유산기부의 날이 선포되면서 유산기부 운동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 밖에도 1인 고령 여성인구의 경우 좀 더 가치 있는 일들을 찾을 만한 이유가 더욱 커졌는데, 이들의 상속인은 관계가 소원한 형제 또는 그 대습상속인인 조카들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수요가 더 확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언장 쓰기 문화와 함께 작성 및 보관, 관리도 중요해졌습니다. 하나은행에서도 관련 서비스를 운영하나요.
“이미 자신의 뜻을 남기는 사회적 공감대는 어느 정도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은행의 경우 그 뜻을 남기는 방법으로 2010년부터 지금까지는 신탁을 통해서 진행해 왔어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유언장을 작성하는 캠페인을 기아대책과 협업하고 있습니다. 고령자들의 자서전 형식의 삶을 돌아보기, 유언장 직접 작성해보기 등이며 하나은행 자체적으로도 유언장 보관 서비스를 준비해 올해 1분기(4월 예정)에는 그 서비스를 론칭할 계획입니다.
또한 사랑의 열매, 밀알복지재단, 굿네이버스, 한국자선단체 협의회 등 다양한 기관들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공동의 기부 상품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경우 초고액 기부자들을 위한 다양한 기부 상품이 많습니다. 해외에서는 유산기부를 위한 유언장 작성이 어떻게 이뤄져 있나요.
“제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잘 알려진 유산기부 캠페인은 영국의 ‘레거시10(Legacy10)’입니다. 영국의 레거시10은 상속세 최소 기준금액 이상의 유산을 물려주는 경우 기본적으로 세율 40%를 적용하는데, 2012년 4월부터 유산의 최소 10%를 기부하면 상속세(inheritance tax)를 36%로 감면 받을 수 있는 캠페인이에요. 즉, 10% 세금을 경감시켜주는 유산기부 유도방안이죠.

미국의 경우 기부자 조언기금(Donor Adivsed Fund, DAF) 제도가 매우 유연한 기부제도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DAF는 말 그대로 기부자가 기금 운용에 조언을 해 좀 더 높은 운용수익을 거두어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하고 다시 기부금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DAF 제도가 없지만 신탁 설정을 통해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자선잔여신탁(Chritable Remainder Trust, CRT)을 통한 유산기부를 하는데, 기부자(신탁의 위탁자)는 CRT를 설립한 후 매월 일정 금액을 자신을 수익자로 해 받을 수 있고, 소득세 등 세제 혜택도 부여돼 있는 제도예요. 연방세, 주세 모두 혜택이 있는 제도이고 CRT 설립 당시 금액의 10%를 기부하기 때문에 설립 이후 효과적으로 운용된 수익 역시 본인의 소득세 혜택이 부여되는 추가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세제 혜택이 있어 취소 불능 신탁인 게 특징이죠.”

우리나라도 ‘공익신탁법’이 시행되면서 국내에도 조금씩 ‘기부와 금융이 만나는 기부 상품’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합니다. 신탁을 활용한 유언장 보관은 어떤가요.
“맞습니다. 신탁제도를 통해 금융에 상속과 기부가 만났음이 분명해요. 다만 공익신탁에 있어서는 매우 미미한 수준이고 그 이유는 공익신탁을 주로 운영하는 곳이 금융기관인데 금융기관은 다양한 분야의 기부 설정 요청이 들어왔을 때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유언장 보관은 신탁과는 별개의 영역입니다. 말 그대로 유언장을 작성하게 되면 그 유언장을 잘 보관해주는 서비스이기 때문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은행의 유언장 보관 서비스는 올해 4월경 론칭할 예정입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를 보면 유언장 작성 때부터 유언공증인과 연계해 작성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공증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업무 절차를 편리하게 구축해 유언장 작성 문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소액 유산기부도 신탁으로 가능한가요.
“공익신탁을 통해서 특정한 목적의 신탁이 설정되면 본인과 그 뜻에 동참하는 많은 이들이 매우 적은 금액으로도 기부를 할 수 있어요. 공익신탁을 설정하면서 최저 1만 원 이상 등으로 설정하면 가능하기 때문이죠. 또한 공익신탁이 아니더라도 1만 원 이상의 금전 기부신탁을 설정하고 생전수익자를 기간을 정해 기부기관으로 지정하거나 사후에 기부기관에 이전되도록 신탁을 설정할 수 있어요. 일종의 유언대용신탁을 그 도구로 활용하는 셈이죠.”

아직도 우리나라에선 유산기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첫째는 기부에 대한 세제가 많이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기부단체들도 세제 분야 전문가들과 제도 개선에 대한 연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이 주식을 기부한 후 세금 폭탄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하죠. 둘째는 기부가 이루어진 재산에 대한 사용이 3년으로 제한된 점도 좀 더 탄력적으로 개선됐으면 해요. 유산기부 된 재산의 처분 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고 그 이후 금전의 기부금 활용에는 시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익신탁 측면에서 보면, 공익신탁의 운용자산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운용으로 한정돼 있어 DAF와 같은 제도가 나올 수 없는 토양입니다. 일정한 수준의 수익률을 추구하는 제도적 장치에 대한 보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유산기부 문화가 뿌리 내리기 위해 ‘신탁법’은 어떻게 변경돼야 할까요.
“우선 공익신탁의 활용 개선이 도모돼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운용자산의 다양화가 먼저 확대돼야 하죠. 지나치게 안정성만 추구하는 내용은 현장에서 기부가망자들에게 어필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구조적인 기부 설계와 운용이 이제는 균형점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미국의€ CRT와 같은 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신탁을 설립한 후 연금처럼 수익자가 자금을 받아 생활하고 설정된 재산에 대한 세제 혜택이 부여돼야 하죠. 그래야 연금기부처럼 활용하고 일정 부분의 유산기부 파이프 라인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겁니다. 아울러 신탁 설정이 비대면으로 좀 더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신탁제도 전반에 대한 내용으로 현재 신규 신탁은 반드시 영상으로 수탁자와 대면 후 설정되도록 하고 있어요. 본인이 비대면으로 신탁을 설정한 후 추가 입금해 기부를 확대할 수 있도록 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글 김수정 기자 사진 김기남 기자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