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유수 장수기업의 생존 배경에는 패밀리오피스의 역할도 적잖다. 단순히 자산관리를 넘어 기업의 경영권 승계, 상속·증여, 교육, 자선 활동 등 팔색조 패밀리오피스의 핵심 기능은 무엇이고, 국내외 차이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Big Story] 해외 패밀리오피스 '활발'...한국형 서비스의 현주소는
세계에는 100년 이상 장수한 기업들이 수만 개나 된다. 일본에 3만여 개, 미국과 독일에도 1만 개가 넘는 장수기업들이 지금도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은 100년 이상 기업이 두산, 동화약품,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 10곳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정부는 2016년부터 ‘중소기업진흥에 관한 법률’ 및 ‘중견기업 성장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을 개정,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를 도입해 45년 이상 된 중소·중견기업을 ‘명문 장수기업’으로 선정하고 경제적·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 기업이 존경받는 문화 확산을 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재까지 총 19개사에 불과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장수기업의 탄생은 단순히 유능한 설립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기업의 영속성을 위한 요소로는 차세대 인재 육성,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 경영 환경 변화에 대한 빠른 대응 등이 복합적으로 요구된다. 설립자 및 그 가족 구성원들은 투자, 상속·증여, 리스크 관리 등을 통한 경제적 자산의 보존은 물론 교육, 공익, 자선 활동 등을 통해 높은 수준의 인적·사회문화적 자산을 유지해야 안정적인 기업 경영이 가능하다.

자신의 세대에서 많은 부를 축적한 설립자 가문에서는 현재의 부를 보존하고 다음 세대로의 성공적인 부의 이전을 위해 가문의 자산을 관리하는 회사를 설립하게 됐고, 이를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라고 통칭한다. 패밀리오피스는 싱글 패밀리오피스(single family office)와 멀티 패밀리오피스(multifamily office)로 구분된다.

싱글 패밀리오피스는 한 자산가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패밀리오피스로 한 자산가 및 그 가족에게 최적화된 자산관리 및 투자, 승계 계획 수립 및 실행, 신탁자산 관리, 위험관리 등을 총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반면, 멀티 패밀리오피스는 여러 자산가의 자산관리 등을 목적으로 여러 자산가를 유치해 운영해주는 형태다.

EY의 글로벌 패밀리오피스 전담 조직(EY Global Family Enterprise and Family Office)은 싱글 패밀리오피스 유형을 그 역할과 형태에 따라 5단계로 구분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역할 확대를 통해 점차 패밀리오피스의 형태 중에서 5단계에 해당하는 풀서비스 오피스(full-service office) 또는 개인 신탁 회사(private trust company) 형태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Big Story] 해외 패밀리오피스 '활발'...한국형 서비스의 현주소는
패밀리오피스의 역사 및 서비스 시스템
패밀리오피스는 19세기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집사에게 체계적으로 가문의 자산을 관리하도록 한 것에서 시작됐으며, 미국 석유왕으로 유명한 록펠러가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 이후 JP모건 가문이 현재의 패밀리오피스 형태를 발전시켜 가문의 자산과 미술품을 관리해 온 것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빌 게이츠 등 유명 가문은 대부분 패밀리오피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문의 재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가문의 부(富)가 3대를 넘어 지속되도록 하고 있다.

미국 및 유럽 중심의 패밀리오피스는 자산운용사, 헤지펀드, 자선재단 등의 형태를 가지며 특히 가문의 뜻과 전통을 중시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공헌 활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자산관리만 하는 프라이빗뱅킹(PB)과는 구별된다.
또한 패밀리오피스의 목적이 상속이 거듭되더라도 경영권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 장수기업을 만들고 자산이 여러 세대에 보존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인 만큼 주식신탁의 역할도 크며, 명문장수기업들이 수백 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주식신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Big Story] 해외 패밀리오피스 '활발'...한국형 서비스의 현주소는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가 미국과 영국의 패밀리오피스 운영 방식과 유사하게 신탁을 활용한 패밀리오피스 구조를 일반화하고 있는데, EY에서 발간한 ‘아시안 패밀리오피스(The Asian Family Office)’ 보고서에 따르면 자산가가 신탁을 설정한 후 지주사 형태의 중간 회사를 설립해 싱가포르에 패밀리오피스를 두고 재산을 관리하는 방식이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팬데믹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

EY에서 발행한 ‘글로벌 패밀리오피스(Global Family Office)’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는 약 1만여 개의 패밀리오피스 운용자금이 1조2000억 달러(약 1350조 원)에 달해서 이미 사모펀드 및 벤처캐피털의 운용자금을 합한 액수보다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렇듯 패밀리오피스가 세계 투자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할 뿐만 아니라 고용 및 성장 기회를 창출하는 엔진이므로 서방국과 싱가포르를 포함한 특정 아시아 국가에서는 패밀리오피스의 장기적 존립과 확대를 지원하는 정책을 앞 다퉈 펼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의 경우 팬데믹 속에서도 승승장구해 왔는데, 싱가포르 통화청에 따르면 최근 3~4년 사이에 싱가포르에 설립된 싱글 패밀리오피스는 약 5배 이상 급격히 증가했다고 하며, 싱가포르에 자리 잡은 싱글 패밀리오피스가 2019년 대비 2배로 늘어나 약 400개로 추산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정부 차원에서 아시아 자산가 유치를 넘어 세계적인 부호의 패밀리오피스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는데, 그 결과로 최근 구글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 폴 앨런, 영국 가전 기업 다이슨의 창업주인 제임스 다이슨, 세계적인 투자자이자 헤지펀드 대가인 레이 달리오와 같은 글로벌 거물급 자산가의 패밀리오피스 설립을 유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싱가포르는 낮은 세금, 우수한 치안, 패밀리오피스 유치를 위한 현지 정부의 인센티브 등 기업친화적 제도를 운영한 덕분에 세계적인 부호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와중에 저금리·저성장 시대에서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패밀리오피스 설립 붐을 촉진시켰다. 이는 유동성이 풍부한 경제 환경에서 부호들이 자산을 직접 운용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는 데다 상속을 위한 대책을 필요로 하는 자산가들의 수요가 싱가포르에서 불꽃을 피운 것이다. 경쟁적 위치에 있는 또 다른 금융 중심지인 홍콩의 경우 중국의 새 보안법 이슈 여파로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세계적인 부호 가문 및 자산가의 싱글 패밀리오피스 설립을 지원하고자 내놓은 세제 혜택을 살펴보면, 싱가포르 내에서 설립한 패밀리오피스가 관리하는 국내외 투자기구·펀드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의 면세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패밀리오피스에서 발생한 거의 대부분의 투자이익에 대한 싱가포르 세금이 면제되는 방식이다.

세 가지 유형으로는 해외 펀드(Non-Resident Fund)에 적용되는 섹션 13D, 싱가포르 법인형 펀드(Resident Corporate Fund)에 적용되는 섹션 13O, 인헨스드 티어 펀드(Enhanced Tier Fund)에 적용되는 섹션 13U가 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특례는 승인 여부, 최소 투자 요건, 연간 최소 지출액, 최소 3명의 투자전문가 고용 요건 등 유형별 성격이 각각 상이하나, 펀드를 운용하는 패밀리오피스가 싱가포르에 설립되기만 하면 각종 세제 혜택을 부여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나아가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 자체에도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제도(Fund Management Scheme)는 싱가포르 펀드매니저 3인 이상을 고용한 패밀리오피스가 적격 펀드를 관리하거나 자문해 얻은 수수료 수입은 일반 법인세율인 17%가 아닌 10%의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을 적용받을 수 있으므로 패밀리오피스 운영비용 부담을 상당히 낮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투자 측면의 혜택 지원 이외에도 패밀리오피스의 기능을 체계적으로 관리, 운영하기 위한 각종 인프라가 갖춰진 환경 속에서 각종 세제 혜택까지 부여하니 글로벌 자산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의 성장은 아직도 진행형이며, 이러한 패밀리오피스에 대한 지원 제도와 다양한 세제 혜택의 제공은 완전 고용, 금융허브라는 위상을 지키고 있는 싱가포르의 경제 활성화 정책 중에서도 패밀리오피스에 대한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다.

국내 패밀리오피스의 현실과 한계
현재 우리 한국 사회에서 해석하는 패밀리오피스는 선진국의 소위 ‘정통 패밀리오피스’와는 달리 개념과 목적, 그리고 발전 방향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최근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급격히 확장해 나가고 있는 아시아 패밀리오피스와도 운영 구조 및 방식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패밀리오피스는 기업승계를 고민하는 중견·중소기업 오너뿐만 아니라 증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슈퍼리치 개인 등을 고객으로 유치하기 위해 투자 상담 이외에도 외부 전문가 등과 제휴해 컨설팅을 제공해주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판 패밀리오피스는 멀티 패밀리오피스와 유사한 형태로 주로 투자·세무·법률 컨설팅에 초점을 맞추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 싱글 패밀리오피스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들을 보면 주로 현금성 자산을 많이 물려받은 설립자의 2세 또는 3세와 회사 매각으로 수천억의 자산을 확보하고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개인 투자 회사와 같은 형태에 국한돼 있다.

발전 방향 측면에서 살펴보면 국내에서 운영되는 싱글 패밀리오피스는 사실상 ‘자산운용사’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자산가들도 가문의 부를 체계적으로 다음 세대에 이전하는 방안을 고민하기보다는 자산의 투자 수익률 증대 등을 통한 현재 부의 확대에만 집중하는 모양새다.

최근에는 멀티 패밀리오피스의 형태로 국내외 금융기관, 법무·회계법인 간 협업을 기반으로 기존의 자산관리·기업 솔루션 서비스에서 벗어나 가업승계, 사회공헌, 문화예술 영역까지 패밀리오피스가 확대되는 움직임도 보여서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가문의 부를 다음 세대까지 보존해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는 패밀리오피스 본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싱글 패밀리오피스 형태의 활성화가 필수적이다.

금융위원회는 이미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에 귀속돼 있는 신탁업 규제를 완화해 한국판 패밀리오피스 키우려는 시도를 했으나 아직까지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해외와 같이 신탁에서 자산가들의 가족 자산에 대한 운영과 더불어 회사 경영권을 운용해주는 패밀리오피스 기능을 할 수 있게끔 신탁업자의 자율성을 확대해 기업 자산과 개인 자산을 통해 보다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또한 국내 각종 규제를 완화해 패밀리오피스가 활성화된다면 묶여 있는 자금이 투자에 적극 활용되면서 산업 발전에도 적잖은 기여할 것으로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Big Story] 해외 패밀리오피스 '활발'...한국형 서비스의 현주소는
성공적인 패밀리오피스가 되려면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패밀리오피스 운용자금 규모에도 불구하고 과거 전통적인 패밀리오피스는 소수의 유능한 전문관리자에게 의존해 상당히 배타적으로 운영 및 성장했다. 현대사회의 급격한 경제적·사회적·지정학적 변화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기술 발달, 새로운 정부 규제의 증가 등을 고려하면 패밀리오피스 운영 방식 또한 직면한 위기에 도전하고 적응해야만 가문의 소중한 유산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6월 EY 싱가포르에서 전 세계 12개국 250개 이상의 싱글 패밀리오피스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분석한 ‘EY 싱글 오피스 스터디(EY Single Office Study)’에 따르면, 패밀리오피스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운영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첫째로 전략 및 관리(strategy & governance) 측면에서 경제적 이윤 추구 외에도 다양한 가치의 실현을 원하는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다수의 패밀리오피스들이 기존의 재무적 성과에 더불어 비재무적 성과인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기준을 어느 정도 달성했는지 여부, 그리고 고객, 지역사회, 이해관계자에게 미치는 영향에도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울러 비재무적 지표에 비중을 두고 성과를 검토한 58%의 응답자의 경우에는 실제 성과도 기대보다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으며 응답자의 44%가 향후 12개월 안에 환경 및 사회 측면에서의 투자를 계획 중이라고 응답햇다.

둘째로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에 대한 대응 및 리스크 관리 측면이다. 응답자의 74%가 ‘사이버 침해 또는 해킹을 당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이에 대비해 마련해 둔 방안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응답이 72%에 달했고, 61%는 ‘사이버 침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발견하는 프로세스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라는 응답도 61%나 됐다.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리스크 관리에 있어 응답자의 49%만이 ‘잠재적인 리스크를 확인하는 내부 절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응답했을 뿐만 아니라 31%는 ‘리스크에 대한 대응이 최고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진 않다’고 답변해서 보다 체계적이고 구조화된 관리 체계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부와 규제(wealth & regulation) 측면에서의 어려움도 있다. 자산가들이 부의 확대를 위해 수익률이 좋은 투자처 및 높은 수준의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국가를 찾으면서 국가별 규제도 다변화됐다.

특히 상당수 패밀리오피스들이 국가 간 투명성 및 정보 교환에 대한 요구사항 증가, 국경을 넘는 세금 준수(cross-border tax compliance)에 대한 복잡성 증가, 코로나19 이후 규제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를 경험하고 있으며, 역외의 원격 근무에 따른 잠재적인 세무 이슈 등이 리스크로 작용하게 됐다. 이에 따라 응답자의 약 3분의 2가 관련 세법을 완벽히 준수해 신고 및 납부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패밀리오피스가 세계적인 금융 시장을 기반으로 한 선진국 외에도 빠르게 확산되며 주요 투자자본으로 거듭나는 상황에서, 한국의 재산가들도 성공적인 패밀리오피스의 설계 및 운영과 가문의 부를 다음 세대까지 보존하기 위해 선진 사례를 참고해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체계적인 운영 철학과 사전적인 대비책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이나래 EY한영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