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인간의 개입 없이도 ‘반드시’ 계약을 이행하게 만들어…발전 영역 무궁무진
'모든 거래의 혁신’ 만들 스마트 콘트랙트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비트코인은 강했다’ 저자] ‘회전 초밥집에서는 접시의 모양이나 색깔이 장부와 마찬가지다. 결제는 어떤 접시를 쌓았는지 분류된 후 종합해 이뤄진다. 그러나 같은 참치 대뱃살이라고 해도 셰프가 바로 만들어 올린 접시와 몇 바퀴째 돌면서 산화가 진행된 것이 같은 가격에 정산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만약 시스템이 좀 더 지능적이라면 접시의 색깔뿐만 아니라 회전수까지 고려해 가격이 정산돼야 한다.

초밥 접시가 몇 바퀴를 돌았는지에 따라 가격을 변경하려면 논리 문장부터 만들어야 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이프 덴 코드(IF then code)’라고 부르는 조건절이다.
예를 들어 ‘초밥 접시가 회전대를 한 바퀴 도는 회전수 곱하기 500원을 초밥 접시의 색깔 등급 가격에서 차감’이라면 간략한 수학기호·논리함수·지시코드의 조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주변을 한번 돌아보자. 세상은 ‘이프 덴 코드’라는 조건절로 이뤄진 약속투성이다.

◆‘이프 덴(IF then)’으로 이뤄진 세상

자동판매기가 대표적이다. 자동판매기처럼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보험 역시 가장 친숙한 조건절이다. 조금 확장하자면 대학에서 받는 학점이나 게임의 승패에 따른 보상도 ‘만약 어떤 조건이 충족된다면 어떠한 결과를 얻는다’는 조건절이 기본 골격이다.

만약 조건절이 컴퓨터 코드로 만들어져 시스템에 심어지면 중재자나 심판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계약이 이행된다. 계약이 한 번 성립되고 나면 사람의 개입 없이 자동으로 이행되기 때문에 ‘스마트 콘트랙트(smart contract)’라고 부른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을 무시하는 이들도 스마트 콘트랙트란 어휘의 아우라에 기가 죽는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인공지능(AI)처럼 사회를 혁신할 수 있는 미래 기술의 하나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마트 콘트랙트 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암호화폐 이더리움이 비트코인보다 주류들로부터 좀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자동화된 약속이고 조건절로 이뤄진 코드라고 규정한다면 스마트 콘트랙트는 이미 널리 퍼져 있다. 대규모 시험의 점수 처리는 이미 사람의 개입 없이 이뤄지고 있다. 보험에서도 사정관이 특별한 조건만 승인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블록체인에서 스마트 콘트랙트를 그저 사람의 개입 없는 자동 계약 정도로 알고 있으면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 매트 래빈이 날카롭게 지적한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창고에는 어제 입고된 1만 파운드의 알루미늄이 있다고 해킹할 수 없는 블록체인 시스템이 확증해 주고 있지만 나는 이미 뒷문으로 알루미늄을 빼돌렸고 창고는 비어 있다.”

블록체인이 위조 불가능한 시스템이라고 해도 이런 허점 때문에 ‘자동 이행’만으로는 비트코인이 열어젖힌 스마트 콘트랙트의 충격적 의미를 담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청산 기관 없이 수평적인 참여자들 간의 약속 이행이라는 개념이 추가돼야 한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이 P2P(Peer to Peer) 네트워크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스마트 콘트랙트도 P2P 네트워크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분쟁의 조정이나 청산 기관이라는 강력한 제삼자를 전제하지 않는다. 법률적 뒷받침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혹독한 환경에서도 약속이 이행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드넓은 미개척지가 열리고 있다.

여러 학생들이 참여한 시험 점수를 근거로 학점을 부여하는 시스템은 P2P로 진행할 수 있다. 중앙의 서버가 필요 없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의 개인 컴퓨터에 학점과 점수에 대한 조건절이 입력돼 있으므로 학생이 답안을 입력하면 조건에 따라 학점을 받는다. A학점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토큰으로 만들어 참여자들 간에 조건에 따라 배분 받는 방식이다. 중앙 서버 방식과 별 차이가 없고 더 나을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학점이 아니라 복권이라면 어떨까. 복권의 발행 주체 없이도 참여자들 간 합의에 따라 운영할 수 있다. 발행 주체에게 보상을 주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된다는 점도 있겠지만 정부의 규제를 따돌린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당국이 차단하거나 감옥에 보낼 타깃이 없다. 비트코인이 통화 주권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면서도 지금까지 정부를 따돌리면서 건재한 것과 동일한 이치다.

보험은 어떨까. 보험을 운영하는 회사 없이도 동일한 위험에 노출된 피보험자들 간에 보험 계약이 가능하다. 개개인의 유전자 코드가 블록체인에 올라가면 동일한 유전적 확률로 병에 노출된 사람들 간에만 지구적인 규모로 공평하고 저렴한 보험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운영할 수 있다. 마치 수십 년 전까지 사금융의 한 축을 이루던 ‘계’의 지구적 재현으로 볼 수 있다. 법외(法外)에서 이뤄진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계처럼 떼일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혁신이다. 이상적인 스마트 콘트랙트는 계약의 위반을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위반과 동시에 배상을 변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계약들이 규제 바깥에서 자 유롭게 이뤄지면서도 국경마저 초월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1995년 즈음의 인터넷’처럼 태동기의 막바지이며 동시에 산업화의 초기 단계다. 인터넷으로 치자면 아직 구글도 네이버도 유튜브도 페이스북도 없지만 비트코인이 보여준 생존력을 고려하면 이들 기업보다 더 혁신적인 영역과 기업들이 부상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암호학 전문가들조차 암호화폐나 스마트 콘트랙트의 향후 전개와 여파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도 직시해야만 한다. 혁신은 어마어마한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고 순작용과 함께 부작용도 심각하게 고민할 때다. 이제는 시스템의 생존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공존을 모색하면서 말이다.

[돋보기] 닉 사보와 스마트 콘트랙트
스마트 콘트랙트(smart contract)라는 어휘는 전설적인 암호 전문가 닉 사보(Nick Szabo)가 1996년 발표한 논문에서 유래했다. 사보는 암호학의 발달과 네트워크의 확장으로 사람의 개입 없이 코드만으로 충족되는 스마트 콘트랙트가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그의 논문에서 사용한 개인 키와 공개 키라는 단어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백서에 그대로 다시 나온다.

사보는 자동판매기와 함께 자동차 산업에서의 결제 방식을 제시했다. 자동차를 빌려 탈 때 거리나 시간이 경과하면 전자키가 회사로 반납되는 형태를 내다봤다. 이 모형은 20년이 지나 요사이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주창하는 ‘디지털 모빌리티’ 비즈니스의 가능한 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시대를 20년 정도 앞질러 사고하는 만능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데 법학·경제학·게임이론·프로그램·컴퓨터 시스템까지도 해박하다는 점에서 사토시 나카모토와 많이 겹친다.

사보가 논문에서 소개한 시스템은 비트코인에 가깝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이더리움의 전매특허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스마트 콘트랙트의 핵심 요소는 ‘은행의 도움 없이 이뤄지는 결제 시스템’이라는 점은 사보의 논문에서 강조되고 있다.

스마트 콘트랙트가 비트코인의 라이벌인 이더리움만의 핵심 기술이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죽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스마트 콘트랙트와 비트코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