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1176호 (2018년 06월 13일)

‘복지천국’ 핀란드가 기본소득에 관심 갖는 이유

[커버스토리=AI·로봇 시대의 새 화두 ‘기본소득’이 뭐길래]
-헬싱키 현지 취재…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복지 모델 탐색 중


(사진) 실업수당을 받는 실업자 중 2000명을 대상으로 한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에 선정된 실제 참가자의 가정.

[헬싱키= 이정흔 한경비즈니스 기자] 4월 24일 한국에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핀란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규모로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하는 유일한 나라다. 그만큼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것도 당연하다.

공교롭게도 이 뉴스가 나오기 하루 전인 4월 23일 기자는 핀란드 헬싱키의 사회복지국(KELA)에서 기본소득 실험 관계자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실패’ 뉴스는 명백한 오보다. 당시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냐 성공이냐’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핀란드 정부 관계자의 답변은 분명했다. “우리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핀란드 정부가 당장은 성패조차 알 수 없는 이 거대한 실험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이유는 무엇일까. KELA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주도하고 있는 미스카 시마나이넨 연구원의 대답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적어도 다른 나라에서 고민만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를 직접 해보는 중이다. 기본소득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누구보다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험 실패’ 보도는 오보

핀란드에서 기본소득 실험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중도 우파 성향의 중앙당이 집권하면서부터다. 당시 ‘기본소득 지급’을 공약으로 내건 중앙당은 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앞서 대대적인 정책 실험에 돌입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간 핀란드 실업자 중 2000명을 대상으로 매달 560유로(약 70만원)를 지급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핀란드 복지 시스템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복지수당 등의 지급을 도맡고 있는 KELA가 이 정책 실험의 주체가 됐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실업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실업수당과 쉽게 비교된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먼저 직업을 구하게 되면 지원금이 끊기는 실업수당과 달리 기본소득은 한 번 실험 대상자로 선정되면 다시 직업을 구하게 되더라도 지원금이 유지된다. 사용처가 특정돼 있는 기존의 복지수당과 달리 실험 대상자가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 실험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실험 대상자들을 국가가 ‘무작위’로 선정함과 동시에 실험 참가자로 선정된 이들은 이 사안에 대한 개인의 찬반 여부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캐나다 등의 국가에서 ‘자발적인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것과는 비교되는 지점이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표본을 사전 또는 사후에 선택함에 따라 통계 분석을 왜곡하는 ‘선택 편향’을 없애도록 한 것이다.

핀란드 정부는 이를 위해 본격적인 실험을 착수하기에 앞서 관련 법을 제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실업수당을 비롯해 현재 운영 중인 복지 체계와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법률 작업을 담당한 변호사 출신의 마르후카 트루넨 KELA 법률부문 총책임자는 “기존에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었다”며 “입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실험 참가자들이 ‘잃을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무적’ 참여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또한 기본소득 실험으로 기존의 사회복지 체계가 혼란을 겪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실험 참가자를 누구로 선택할지, 이들이 받는 지원금이 기존의 실업수당과 비교해 손해를 보지 않도록 설정돼 있는지 등을 설계하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는 설명이다.


(사진) 마르후카 트루넨 KELA 법률부문 총책임자

◆복잡한 복지수당 간소화 효과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 실험에 모두 2000만 유로(약 252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이처럼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핀란드가 국가 차원에서 대국민적 실험에 나선 이유는 ‘복지 시스템의 전반적 개혁’과 연관이 깊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핀란드는 ‘복지 천국’이다. 북유럽 국가들 가운데서도 다양하고 광범위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더욱이 그 대상은 핀란드 국민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핀란드에 거주하는 이민자들 또한 양육수당·실업수당·보육수당·주택수당 등 동일한 수준의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파이비 실라나우키 핀란드 보건복지부 행정장관은 “핀란드의 복지 시스템은 그 누구도 뒤처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며 “소득이 없는 사람들과 가정주부·장애인 등 어떤 경우라도 최소한의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미 ‘충분한 소득’을 보장받고 있는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실험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40여 개에 달하는 광범위한 복지 혜택을 유지하고 있는 핀란드 정부는 현재 ‘복지 개혁’을 통해 이를 통합하고 단순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고령화 등에 따른 복지수당 증가로 국가의 재정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가운데 복지 시스템의 효율화를 통해 ‘복지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이다.

기존의 육아수당·교육수당·실업수당으로 나눠 지급하던 것을 ‘기본소득’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해’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복잡한 복지수당 지원 절차를 간소화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핀란드 복지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복지 누수 현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이와 같은 복지제도의 개혁이 ‘실업수당’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라나우키 행정장관은 현재 핀란드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사회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꼽았다. 이들 젊은 층의 노동 의지를 어떻게 고취할 수 있을지를 고민 중이라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시장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이미 저임금 일자리, 파트타임이 늘어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애써 노동시장에 재진입하려고 하기보다 실업수당에 기대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길 선택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인센티브의 함정’이다.

현재 핀란드의 복지 시스템은 50여 년 전인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모델이다. 이런 ‘과거의 복지 시스템’으로는 향후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시장의 변화’를 반영하기에 역부족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현재 KELA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이끌고 있는 미스카 시마나이넨 연구원은 “기본소득 실험은 2017년 시작됐지만 사실상 그전부터 30여 년에 걸쳐 오랫동안 관련 논의가 진행돼 왔다”며 “우리는 지금 누구보다 현실적인 접근법으로 개혁을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미스카 시마나이넨 KELA 연구원.

◆성공이냐 실패냐, 2020년 돼야 결론 

2016년 말 핀란드 주민인 미카 루수넨 씨는 우편함에서 낯선 편지를 하나 받았다. 그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는 기본소득 실험의 대상자로 선정됐고 향후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받게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그는 16개월 동안 실업자로 지내며 정보기술(IT)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직업학교를 다닌 뒤 한 IT 기업의 인턴으로 막 취직했을 때였다. 현재는 같은 회사의 정규 직원으로 채용돼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본소득을 지원받고 있다.

루수넨 씨는 “기존에도 다양한 수당을 받았지만 이렇게 간단하고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수당은 없었다”며 “지금 회사에 취직하기 전부터 나는 스타트업 창업을 고려 중이었는데 기본소득 덕분에 여전히 이와 같은 선택지를 포기하지 않고 고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의 실제 사례다. 기본소득 덕분에 저소득 임금이나 파트타임 일자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찾아서 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루수넨 씨의 사례를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핀란드의 기본소득과 관련해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기본소득이 국민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을 독려하기보다 ‘베짱이’들을 양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논란에도 정작 당사자인 핀란드는 의연한 반응이다. 현재 진행 중인 기본소득 실험은 2018년 말 완료한 뒤 2019년부터 본격적인 결과 분석을 시작할 계획이다. 2020년이 돼야 최종 결과가 나올 것이고 그전에는 어떤 결론도 섣불리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실험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는 분명하다. 실업률이다. 2년의 기본소득 지원을 통해 참가 대상자들의 취업률이 높아지면 성공이고 그 반대는 실패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되는 2년 동안 연구자들은 실험 결과와 관련된 어떤 내용도 외부에 밝힐 수 없도록 돼 있다. 이 실험의 중간 결과가 알려지면 실험 대상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 실험의 목적이 애초에 ‘실험 성공’이 아니라 기본소득에 따른 피실험자들의 ‘행동 변화’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데 맞춰져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지점이다.

트루넨 법률담당 총책임자는 이 실험에 대해 “지금은 복지 혜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전환이 요구되는 때”라고 의미를 강조했다. 미래의 복지 시스템은 단순히 국민들에게 일정 정도의 현금을 지급하는 것을 넘어 직업교육 트레이닝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종합적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그는 “핀란드 정부가 향후 기본소득 실험을 확대하지 않기로 한 것은 아쉽지만 이후 정책 수립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결정이 난 것이 없다”며 “적어도 이 실험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꿔 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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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8-06-1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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