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삼성전자도 가세… ‘조직 수평화’ 연차보다 능력 우선

[한경비즈니스=김서윤 기자] 호칭이 곧 권력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계급장 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능할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꼬리표는 괜히 달린 게 아닐 게다.

유교적 전통을 중요시하는 민족성, 어릴 적부터 예의 바른 아이로 자라야 한다고 교육받은 우리에게 “이 대리, 너는 네 선배 김 과장보다 능력이 뛰어나니 더 높은 레벨을 줄게”라고 회사 측에서 제안한다면 널뛰듯이 좋아할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내일부터 당장 “이(철수) 부장님”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철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쉽게 입이 떨어질까.

도저히 적응되지 않을 것 같은 직급 파괴 바람은 이미 불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조직의 유연화를 선택했다. 최근 삼성의 직급 파괴 소식이 있기 훨씬 전부터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전통적인 직급 체계를 없애고 수평적 조직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변화를 시도해 왔다.
재계에 부는 ‘계급장 떼기’… "사장도 대리도 OO님"
◆ 직급 없앤 대기업들, 유연한 조직 기대

직급 파괴의 대표적인 기업은 SK· CJ· 아모레퍼시픽이다.

SK는 2006년부터 직책으로만 호칭을 부르고 직책이 없는 직원들은 모두 ‘매니저’로 단일화했다. 생존을 위해 파괴적인 혁신에 나서라는 최태원 SK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수평적 호칭을 통해 상하·상호 존중의 문화를 만들고 구성원들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리겠다는 취지였다.

직위·연공서열에 관계없이 자신의 업무에서 전문성과 책임성이 앞서는 매니저 제도가 트렌드화됐다. 직급제가 폐지된 지 11년이 된 SK 직원들은 이제 ‘과장님’이나 ‘부장님’이란 호칭이 더 어색하다.

SK텔레콤은 2006년 10월부터 직급 체계를 바꿨다. 기존에 있던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등의 직위 체계를 없애고 역량과 성과 중심의 밴드 체계로 통합 변경했다. 기존 직책(본부장·실장·팀장 등)은 유지하고 직책이 없는 이들은 모두 매니저로 호칭을 통일했다.

업무 또한 서열 순이 아닌 능력에 따라 부과해 20대에 팀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은 이들도 생겨났다. 과거에는 더 높은 직급이 리더를 맡거나 적어도 30대는 돼야 맡겼던 일이다.

이와 함께 연봉이나 인센티브제도 변화시켰고 새로운 비즈니스에 젊은 인력을 배치했다. SK텔레콤은 직급 체계의 변화로 생산성 향상과 매출의 확대를 가져왔다.

SK주식회사 C&C는 2016년 10월 직급 체계를 허물었다. 기존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의 5단계 직위를 선임·책임·수석 등 3단계로 축소했다.

직급별 체류 기간도 없앴다. 그동안은 사원 3년, 대리 5년, 과장 6년, 차장 3년 등을 거쳐야 부장으로 승진이 가능했지만 제도가 바뀌고는 실력과 전문성만으로도 30대에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게 됐다.

성과급의 직급별 상한선도 없애 직급이 낮은 직원이 상사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CJ는 앞서 2000년 1월 국내 대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임직원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실질적인 직급 파괴의 원조인 셈이다. CJ그룹은 직급 파괴 이후 토론이 활발해져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왔고 취업 준비생들에게 크게 환영 받아 채용 경쟁력이 높아졌다.

아모레퍼시픽은 2002년 ‘태평양’ 시절부터 사내 직원들의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소통 경영을 중요시하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서 회장은 사내에서 “서 회장님” 대신 “서경배 님”으로 불린다.

서경배 회장은 수평적 조직 문화를 위해 여성의 경영 참여도 독려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시행해 왔다. 2014년 8월 기준, 아모레퍼시픽의 임원 69명 중 여성이 7명으로 당시 타 기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 임원 비율이 10배 정도 높았다.

포스코는 2011년부터 연봉제와 월급제 직군으로 구분해 직군별 직무 특성을 반영한 새로운 직급 체계를 갖췄다.

연봉제 직군은 역할과 성과에 따라 승진과 보상을 주는 ‘성과주의’ 체계로 가닥을 잡았고 월급제 직군은 기존 직능 자격제를 유지하며 현장 인력을 기술력 중심으로 운영한다. 직능 자격 명칭을 호칭으로 사용하며 이에 따른 승진 제도를 운영한다.

한화그룹은 2012년부터 매니저 호칭을 도입했다. 대리부터 차장까지 직급에 상관없이 매니저라고 부르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2014년 직급을 간소화하고 연봉제와 성과주의 직급 제도로 운영 중이다. 임원을 제외한 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수석으로 구성됐던 6단계 직급에서 3~4단계로 줄였다. 호칭은 매니저로 단일화했다. 능력과 성과 중심으로 조직을 이끌겠다는 게 조직 개편의 골자였다.

홈플러스도 2014년 사장을 비롯한 전 임직원의 호칭을 직급 대신 ‘님’으로 통일했다.


◆ 새 인사제도 덕에 개인기 펼쳐

삼성전자는 오는 3월부터 직급 체계를 폐지한다. 실용주의를 우선시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작품이다. 기존 사원1(고졸)·사원2(전문대졸)·사원3(대졸)·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나뉘었던 직급을 개인의 직무 역량에 따른 CL(Career Level) 1~4 체계로 단순화했다.

팀장·그룹장·파트장·임원 등 보직을 맡은 이들을 제외하고 ‘~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기업들이 직급과 임금을 파괴하고 나서는 이유는 더욱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또한 불합리한 수직 관계를 깨고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기존의 학력과 근속 연수를 기준으로 한 직급 체계는 기업의 경쟁력을 이어 가기 힘들다는 시각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CJ 관계자는 “기존의 연공서열형 수직 구조를 통해서는 능력 있는 인재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며 “기업들이 점점 글로벌화되며 조직 자체도 직급 중심의 문화보다 유연성과 역동성으로 움직이는 해외 유수 기업들처럼 변화하길 바라고 있다”고 조직 파괴 바람의 배경을 설명했다.

SK 관계자는 “조직 내 계급을 허물고 난 뒤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팀을 구성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는 등 직원 스스로 열정을 보이며 업무에 임한다”며 “직원들이 각자의 역량을 펼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새 인사제도는 불합리한 수직적 관계를 깨고 연차보다 개개인의 능력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라며 “앞으로 능력 있는 후배가 선배보다 더 높은 직급을 받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CJ푸드빌에서 근무 중인 8년 차 직장인 P 씨는 “입사했을 때부터 서로 ‘~님’이라고 불러 크게 불편하지 않다”며 “본부장 빼고 스태프에서부터 아르바이트생까지 모두 서로를 ‘~님’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그는 “사내에 직급이 있기는 하다. ‘대리님’, ‘주임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지 서로의 직급이 뭔지는 다 알고 있다”며 “그래도 위에서부터 아랫사람들에게 ‘~님’이라고 불러주고 서로 존칭 쓰면서 지내니 좋다”고 직급 체계에 대한 속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나이가 어린데도 더 높은 직급을 가진 직원도 있고 그들도 서로 존칭을 쓰면서 ‘님’으로 부른다. 직원들은 이런 수평적인 직급 체계에 거부감 없이 당연시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 연봉 줄이기 ‘꼼수’ 지적도

한편 실제로 새로운 인사제도 개혁이 반갑지 않은 이들도 있다. 기업으로선 그릇된 것이나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한다는 쇄신의 차원이라지만 어떤 면에서는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S사에서 근무 중인 이모 과장은 “기존에는 연봉 테이블이 있어 연차가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연봉이 올랐지만 직급이 사라지면 인사 평가나 협상을 통해서만 연봉을 올릴 수 있다”며 “한국에서 연봉 협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직급뿐만 아니라 연봉도 수평적 구조로 가게 돼 기업이 인건비를 줄이기 좋은 제도”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오세조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직급 파괴는 조직의 결속과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위한 필요조건”이라며 “직급에 함몰된 수직적 관계보다 직원을 동반자로 여기는 수평적 관계가 직원들의 에너지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 교수는 “지속되는 불황 속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연한 조직 운영이 필수”라며 “창의·융합을 위한 차원에서 서로를 예우하고 모두가 경영 철학을 가진 회장처럼 오너 정신을 갖고 일한다면 결과적으로 회사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s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