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영상 20도…벚꽃 핀 워싱턴
‘슈퍼 엘니뇨’ 영향, 가스 수요 감소에 에너지 기업 ‘울상’

세계 전역이 이상 기온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1950년 이후 최악이라는 ‘엘니뇨(적도 해수면 온도 상승에 따른 이상 고온 현상)’가 덮친 결과다. 북반구에서는 이상 고온으로 초여름 같은 겨울을 맞고 있고 남미에서는 폭우와 홍수가 겹치면서 수십만 명이 대피하는 소동을 빚고 있다. 2016년 1~2월쯤 엘니뇨가 물러가면 여름에는 라니냐(이상 한파)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라니냐는 농작물 작황에 큰 타격을 입힐 우려가 크다. 벌써부터 세계 농산물 시장이 작황 우려로 들썩이고 있다.

남부선 토네이도…농산물 작황 우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지구 북반구 지역은 이상 고온으로 초여름 같은 겨울을 나고 있다. 러시아 기상청에 따르면 모스크바의 낮 기온은 2015년 12월 22일 섭씨 영상 7도까지 치솟았다. 1936년 이후 79년 만에 최고다. 예년(평균 영하 6.5도)보다 10도 이상 높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도시 가운데 하나인 핀란드 헬싱키는 2015년 12월 21일 기온이 섭씨 영상 10.3도를 기록했다. 에스토니아의 수은주도 평균 10도 이상으로 올라갔다. 독일 드레스덴에서는 벚꽃이 피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6월에 피는 장미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동안 미국 남쪽 플로리다 주에서 동북부, 캐나다 몬트리올에 이르기까지 기온이 섭씨 영상 20도를 오르내렸다. 수도 워싱턴 D.C.의 기온은 2015년 12월 24일 21.6도였다. 1933년(20.5도) 기록을 갈아 치웠다. 워싱턴 D.C.에서도 벚꽃과 개나리가 활짝 피었고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뛰었고 여성들은 민소매 차림으로 산책을 나왔다.

미국 남부 지방에선 때 아닌 겨울철 ‘토네이도’로 최소 43명이 사망했다. 중심 시속 300km의 엄청난 광풍을 앞세운 토네이도가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미국 아칸소·루이지애나·미시시피·테네시 주 등 중남부 지역을 강타했다.

파라과이·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 등 남미 지역에서는 홍수로 최소 6명이 숨지고 16만여 명의 주민이 대피하는 소동을 겪고 있다. 파라과이에서는 홍수로 쓰러진 나무에 4명이 숨지고 13만 명이 대피하는 등 피해가 가장 큰 것으로 파악됐다. 파라과이 정부는 수도 아순시온과 7개 지역에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기상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상이변을 ‘엘니뇨’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엘니뇨는 스페인어로 ‘남자 아이’ 혹은 ‘아기 예수’라는 뜻이다. 기상학적으로는 적도 부근 동부 태평양 일대의 바닷물 온도가 평년보다 높아지는 현상이다.

북극의 찬 바닷물은 바다 밑을 따라 흐르다가 적도 부근에서 바다 위로 올라온다. 그러나 북극해 수온이 충분히 차갑지 못하면 해수 이동이 약화돼 찬 바닷물이 적도 해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태평양의 수온이 올라간다. 바닷물이 더워져 육지의 온도도 올라가고 해수 증발이 많아진다. 태평양 동쪽인 남미에는 홍수가 발생하고 반면 서쪽인 호주 등에는 가뭄이 발생하게 된다.

여름철엔 최악 라니냐 예고
엘니뇨는 보통 2~7년을 주기로 나타나는데 2015년은 1950년 이후 65년 만에 최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2015년 엘니뇨를 ‘슈퍼 엘니뇨’, ‘몬스터 엘니뇨’라고 부르기도 한다.

엘니뇨는 가뜩이나 시름시름 앓고 있는 세계경제에 더 큰 부담을 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벌써부터 농산물 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하이투자증권에 따르면 엘니뇨의 영향으로 세계 밀 생산량의 14%를 차지하는 호주의 밀 생산량은 2015년 절반 수준으로 줄고 세계 최대 설탕 생산국인 브라질을 포함한 남미 지역에서는 설탕 생산량이 크게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밖에 쌀과 커피 등 다른 농작물 생산량도 1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생산 차질로 가격이 뛰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15년 12월 27일 말레이시아산 팜유는 6월 이후 9.6% 상승했고 원당은 25% 올랐다고 보도했다. 설탕과 유제품 가격도 상승세를 보였다. 엘니뇨가 오세아니아 지역의 파종과 생장기인 2016년 1~2월까지 이어지면 농산물 가격은 더 크게 요동칠 수 있다. 경제는 침체돼 있는데 농산물 가격만 오르는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엘니뇨는 에너지 회사들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세계 최대 천연가스 소비국 미국에서 따뜻한 겨울로 수요가 줄면서 천연가스 가격이 1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가격 하락에는 공급과잉 우려도 한몫하고 있다. 천연가스업체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셰일가스 붐에 발맞춰 앞다퉈 생산량을 늘렸다. 시추 기술도 발달돼 저비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천연가스 공급은 역대 최고지만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은 2년간 계속 떨어지고 있다.

미국 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2015년 12월 2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올겨울 이상 고온으로 난방용 천연가스와 등유 소비가 감소하고 있다”며 “원유 공급과잉과 세계 경제성장 둔화 등에 따라 약세가 이어지는 에너지 가격을 더욱 끌어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엘니뇨는 통상 ‘라니냐’ 현상을 동반한다. 라니냐는 스페인어로 ‘여자 아이’를 뜻한다. 엘니뇨의 반대 현상이다. 여름철 적도 무역풍이 강해지면서 차가운 해수가 올라와 적도 동태평양 수온이 낮아지고 서태평양 해수면과 수온이 상승한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와 인도·호주·남아프리카에서 홍수가 발생하고 페루와 칠레 등의 남아메리카 연안 사막은 가뭄이 생긴다.

라니냐는 여름철 농작물 작황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엘니뇨보다 더 큰 걱정거리다. 1987~1988년, 1997~1998년, 2009~2010년에도 엘니뇨가 끝난 이후 라니냐가 곧 바로 시작됐다. 에릭 놀랜드 CME그룹 선임 이코노키스트는 “라니냐가 발생하면 대두·옥수수·밀 등 곡물 가격이 50% 정도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커머더티 웨더 그룹도 엘니뇨가 2016년 여름에 라니냐로 바뀌면 미국 중서부에 고온 건조한 날씨가 나타나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BMI리서치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라니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옥수수·대두·밀·원당·면·커피 등에 주목할 것을 권했다.

워싱턴= 박수진 한국경제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