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상아탑의 바이블은 토익(TOEIC)·토플(TOEFL)」.요즘 대학생들이 갖고 다니는 책을 보면 거의 십중팔구는 영어관련서적. 그것도 토익이나 토플책이다. 특별히 직장인처럼 인사고과에반영되는 점수로 영어실력을 측정받거나 유학준비생도 아닌데 모두들 영어책을 바이블처럼 끼고 다닌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어를 못하면서 취업을 생각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생각이 대학생들의 머리를 꽉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영어는 취업전선에 나선 대학생들에게 있어 「소총」과 같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기초적인 개인무기」인 셈이다.「영어만능지상주의」에 젖은 대학가.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바로 영어공부에 대한 부담으로 전공공부는 이제 단순히 보다 좋은학점을 받기 위한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전공요? 시험 때만 반짝 공부하고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보면 돼요. 요즘 대학생들은 영어와 취업에 도움을 주는 공부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요.』 경희대 유석주군(27, 경영학과 대학원)의 말이다. 행정조교로 수업출석을 체크하러 들어가 보면 들고다니거나 보는 책이 모두 영어책과 취업관련서적뿐. 『전공은 시험때 일종의 문제은행인 「족보」를 알려고 하는 학생들일 뿐』이라는 것이 유군의 덧붙인 말이다. 『대학생들은 외국어능력을 가장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취업시 조금이라도 유리한 점수를 얻기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단기해외연수를 나가려고 한다』는 것은 이화여대 김현정양(22)의 말이다. 건국대 경영학과 3년 김모군(23)은『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영어회화나 컴퓨터 등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시설이나 교육인원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 며 『취업을 염두에 둔 대학생치고 웬만한 영어학원에 한번이라도 다녀보지 않은 대학생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영어가 전부」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점을 교묘히 악용한 범죄로대학생들이 금전적인 피해를 입는 범죄도 발생했다. 지난 4월 H대D대 K대(수원)와 또 다른 K대의 학생들은 LTF(대표 이정수)라는 단체와 영어회화강좌를 개설했다가 LTF측의 대표가 잠적해 강의가 중단됐으며 선납했던 강의료 일부를 사기당해 종로경찰서에 형사고발하는 일이 생겼다.◆ 영어열기 이용한 신종 범죄도 등장LTF는 이전에도 H, K, M, S대 등 서울시내 대학가에서 일반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료를 챙긴 뒤 도주했던 전력이 있는 단체. 이미각 대학의 학생회나 자치단체쪽으로 「경고신호」가 들어갔지만 번번이 학생단체가 사기를 당했다. 대학생들의 「용광로」같은 영어열기를 이용한 범죄였다. 『영어를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강박관념에 따른 무조건적인 영어회화 열기가 대학가를 지배하고있으며 그러한 욕구를 학생단체쪽은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M대에 다니는 한 학생의 말이다.영어열기는 대학가의 하숙집문화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외국인학생을 둔 하숙집이 인기가 높아지면서 외국인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하숙집주인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신촌역근처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외국인학생을 하숙생으로 두면 우선 하숙집의 인기가 좋아지고 방학 때면 집으로 내려가는 학생들도 줄어드는 등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이모(48)씨. 『그러나 막상 외국인학생을 구하려고 했지만 대개 기숙사나 자신들의 거취를 하숙집이 아닌 곳이거나 외국인들끼리 정보를 교환해 미리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 외국인하숙생을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취업준비생들에게 있어 영어와 함께 면접의 비중도 늘면서 생기는또 다른 고민. 바로 외모다. 『여자라 자격증같은 것에 덜 신경이쓰이는 대신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요즘 졸업을 앞둔 여대생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라는 것이 이화여대 김양의 말이다. 여자뿐만이 아니다.남자대학생들의 경우도 면접에 있어서 외모는 중요하게 작용한다.『방학을 이용해 외모 때문에 고민하던 대학생들 가운데 취업때 면접에서 당할 불이익을 미리 막기 위해 모발이식수술을 문의하거나수술을 받는 대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 홍성철성형외과원장의설명이다.대학측도 면접의 비중을 감안해 대학생들에게 각종 사전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경희대 취업정보실의 한 관계자는 『하루 평균 1백여명의 학생들이 취업정보실을 찾고 있다』며 『최근 면접비중이 높아진 점을 감안해 면접에 대비하는 방법 등을 상담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 어렵다는 취업난을 돌파하기 위해자격증을 따두려는 학생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기본적으로 컴퓨터와 관련한 자격증을 따려는 학생들이 가장 많으며 일부 학생들은미취업을 고려해 아예 자기 일을 할 생각으로 공인중개사자격증을따두는 학생들도 있다』는 것이 유군의 말이다.◆ ‘자격증 따기’ ·외국인하숙생 유치 치열취업난과 그에 따른 대학생들의 영어열풍과 자격증취득붐은 대학생활의 「꽃」이라는 동아리활동마저 변화시켰다. 각 대학가의 동아리가운데 사회과학관련동아리들의 퇴조는 이미 오래된 일. 대신 여행 어학 취미 등 실용적인 동아리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특히 『한총련사태이후 시위가담자들에 대해 취업을 제한한다는 말이 나오자 이른바 운동권동아리들은 상당히 위축된 분위기』라는것이 연세대 김모군(23)의 말이다. 김군은 시위가담자들에 대한 취업제한은 『대학가 학생운동에 있어 가장 유치하지만 가장 강력한대응방법』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취업열기는 학업의 「일시중단」이라는 이상현상도 빚어내고 있다.취업불안에 따라 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휴학을 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취업정보지에 따르면취업을 앞둔 대학 4년생들 가운데 10명중 4명꼴로 취업을 준비하기위해 휴학을 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취업준비장으로 변한 대학가. 그러나 반론도 없지 않다. 한때 언론에서 한자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한자시험이 채용시험에 반영된다고해 대학 4학년생들이 한자공부로 법석을 떨었는가 하면 지난해에는필기시험을 없애자 취업준비에 열중했던 대학생들이 허탈해 하기도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회봉사활동을 취업에 고려한다는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사회봉사활동을 찾기위한 대학생들의 발길이몰렸다.『기업들의 원칙없는 채용기준에 대학가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S대 한 교수의 말은 「책임이 대학에만 있다는 말이아니다」는 설명이다.취업준비로 찌든 대학생과 대학가에 대해 홍익대 학생생활연구소이재창소장(54, 교육학과)은 『근본적으로 대학의 기능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대학은 인격과 교양을 갖춘 지성인을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기술 지식을 갖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두가지 목적의 교육기관. 그러나 지금은 교양 인격보다는 전문적인 지식 기술에 치우치고 있으며 이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분위기에 따른 것이라는게 이교수의 설명이다. 기업에서는 대학에서 필요한 기능 기술을 갖추지못한 인력을 배출해 낸다고 불평하며 이는 곧 대학생들의 취업기회나 학교이미지와 직결되므로 대학은 기업이나 사회의 요구에 맞춘인력을 양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마치 고등학교때 전인교육을외치지만 대학입시라는 분위기에 짓눌려 전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대학교육도 취업이라는 가위눌림에 상아탑의 본질과 존재가치가 왜곡됐다는 것이다.그래서 『지금의 대학은 기능·기술과 교양·인격이 엉거주춤한 불균형 즉 절름발이 상태』라는 게 이교수의 대학가 진단이다.『유능한 교수가 어떤 교수인지 아십니까. 바로 졸업생들을 많이좋은 직장에 취업시키는 교수입니다.』 지방소재 B대학에서 보직을맡고있는 손모교수의 자조섞인 탄식이다. 바로 지금 「일그러진 상아탑」의 모습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