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수석의 판정승」. 강경식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이 지난「3·5개각」에서 취임일성으로 금융실명제 보완론을 들고 나왔으나 1주일도 못돼 꼬리를 내린데 대한 과천관가의 평가다.지하자금양성화와 대체입법을 들먹이며 실명제를 뿌리째 뜯어고칠듯하던 강부총리는 「실명제의 근간을 건드릴 수 없다」는 김인호경제수석의 되치기에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의원시절의 개인적 소신과 부총리로서의 정책방향을 혼돈, 대세를 잘못 읽고 있다는 비판이 뒤따른 것은 물론이다.부총리와 경제수석. 정부조직법상으로는 당연히 부총리가 우위에있다. 경제수석은 장관급이나 부총리는 10여명의 경제부처 장관을진두지휘한다. 경제정책의 책임을 지는 것도 당연히 부총리이다.언뜻 보기에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부총리와 경제수석의 비중을 항상 저울질하게 한다. 누가 주도권을잡느냐를 알고 주도권자의 성격을 파악하는게 경제정책의 방향을가늠하는데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경제수석은 규정상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위」의지위를 누린다.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있어 대통령의 입김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힘의 관계」 때문이다. 부총리와 수석 사이에는 명실상부하지 않은 팽팽한 긴장의관계가 있다는 소리는 이래서 나온다.과천관가는 강부총리의 등장으로 문민정부에선 전무후무하게 내각(부총리)우위를 다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이 이같은 기대를 희망사항으로 끝나게 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었다는 얘기다.강부총리는 실력과 소신 등 부총리가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옛 경제기획원에서 기본 소양을 쌓은 뒤 옛재무부 점령군 사령관(재무부차관)을 거쳐 재무부장관을 지내면서 세세한 정책책임감을 갈고 닦았다.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해서는이론만으로는 안되는 타협이란 정치를 익히기도 했다. 기획원과 재무부를 모두 섭렵, 재경원을 안으로 휘어잡을 수 있는데다 의원의경력을 살려 외풍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어느날 갑자기 낙하산 타고 내려온 여느 부총리와는 출신성분이 완전히 다르다는 얘기다.◆ 강경식 -김인호 ‘경제수석 판정승’ ?특히 김인호 수석은 과거 기획원 시절 강부총리가 데리고 있던 부하였다는 점에서 손발이 잘 맞을 것으로 기대됐다. 법제적으로 인간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강부총리 우위는 자연스럽게 보일 터였다. 게다가 임기를 1년도 안남긴 상황에서 청와대만의 「독주」로는 난마같이 얽힌 경제상황을 제대로 풀기 어렵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이미 벌여놓은 것을 매끄럽게 마무리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 높기 때문에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라는 분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그러나 이런 전망이 실명제보완이란 1라운드에서 수석우위로 일단결말이 나고 말았다. 부총리의 개인적 소신보다는 대통령이 내세우는 치적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실명제는김영삼 대통령이 내세우는 개혁정책중 가장 선두에 서는 것인데 그것마저 차·포 떼고 종이호랑이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만들 수는 없다는 사정을 강부총리가 고려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경제수석 우위는 문민정부 내내 일관된 흐름이었다. 자칭타칭 군사정부를 대체하는 문민정부인만큼 뭔가 보여주기 위해선 「때가 잔뜩 낀 내각」보다는 신선한 수석위주로 정책을 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상황론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권 초기엔대부분 대통령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파워가 센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박재윤 초대수석과 한이헌 2대수석은 모두 문민정부에 「지분」을가진 실세였다. 김대통령이 3당합당이라는 초강수를 쓴 뒤에도 민정계와 공화계의 협공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대학교수(박수석)와 기획국장(한수석)이란 현찰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불확실성에 내기를 걸었다. 정권획득과 함께 그들의 뜻을 펼 수 있는장을 마련해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박수석은 「신경제」교범을 만들어 부총리를 바꿔가면서 이를 전도하는데 힘썼다. 한수석도 세계화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경제부처통폐합 등 껄끄러운 정책들을 쾌도난마처럼 요리했다. 이경식 정재석 홍재형 부총리는 경제수석이 벌여놓은 정책상을 뒤처리하는데시간을 쏟아야 했다. 주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해 추진했다기 보다는위로부터 내려오는 정책을 하청받아 성실시공에 힘쓰는 하청업체에불과했다는 얘기다.다만 이런 사정은 구본영 수석-나웅배 부총리 시절에는 다소 바뀌었다. 구수석이 『내각이 소신있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게 경제수석의 본분』이라며 앞으로 나서는 일을 극구 꺼린 탓이다. 또 상공재무 기획원장관을 모두 거친 나부총리가 다시 컴백하면서 무게가내각쪽으로 쏠린 영향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각우위는 8개월의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청와대 입김이 작용하지도 않고 현실경제도 나아지지 않은데 대한 문책에 따른 것이다.이들의 바통을 넘겨 받은 이석채 수석-한승수 부총리는 전형적인수석위주였다. 이수석은 취임후 1개월만에 「경쟁력 10% 높이기」로 내각과 경제계를 몰아쳤다. 노동법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금융개혁위원회로 난국돌파를 시도했다. 한부총리는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질질 끌려 다녔다.결국 이 수석이 한보부도와 「이석채쇼크(은행이 부도나더라도 한은특융은 불가능하다고 밝혀 해외에서 은행들이 지급불능사태에 빠진 것)」라는 암초에 걸려 좌초하면서 한부총리도 함께 난파했다.그는 『등산만 하다간 부총리로 기억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로 7개월간의 짧은 「견습」 부총리관을 피력했을 뿐이다.수석우위는 5, 6공화국 시절에 정착된 것으로 분석된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를 지냈던 김재익 수석은 「경제대통령」으로불릴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83년10월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3년여동안 세워놓은 안정기조는 5공화국 끝날 때까지 바이블로 지켜졌다. 강력한 금리인하 등 이상정책을 단행, 돈키호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 「안되옵니다」로제지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서석준 신병현 김만제 정인용으로이어지는 부총리는 김수석이 그린 밑그림에 색칠하는 결과에 머물렀다.◆ 박정희 대통령시절엔 ‘내각우위’6공화국 때는 문희갑(88년12월~90년3월)과 김종인(90년3월~92년3월)의 양수석이 대부분의 정책을 요리했다. 문수석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등 개혁정책을 강하게 밀어 붙였다. 당시 조순 부총리가 뒷받침하긴 했으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청와대에 있었다. 날개꺾인 문수석의 뒤를 이은 김수석은 「5·8조치(비업무용부동산강제처분)」를 통해 강력한 재벌정책을 추진했다. 6공화국 후기에최각규 부총리가 「장기집권」(91년2월~93년2월)하며 독특한 색채를 자랑하기도 했으나 청와대 우위라는 기본적 구도를 깨트리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경제발전초기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이와는 정반대였다. 내각우위가 확립돼 있었다는 말이다. 박대통령이 「5·16」직후 취약한권력기반을 경제개발로 벌충하기 위해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면서 기획원에 힘을 몰아준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부총리들의 독특한 개성과 대통령의 신임이 어우러지며 전설적인인물들이 탄생됐다. 「왕초」 장기영 부총리(64년~67년)와 「쓰루」 김학렬 부총리(69년~72년)가 대표적이다. 유신이후엔 남덕우 부총리(74년~78년)가 중공업 공업화의 기틀을 잡으면서 경제정책을 주도했다. 60~70년대 경제수석으로 이름을 남겼던 이들이별로 없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다.내각과 청와대의 힘겨루기는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는 피할 수 없는운명과도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외형상 모든 경제정책은 부총리의책임 아래 입안되고 집행되는 듯하나 최종적 책임은 대통령이 지게되는만큼 청와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서다.핵심은 정도의 문제. 청와대가 너무 나서면 내각의 설자리가 없어지고 내각으로만 힘을 실어주면 작은 잔가지에 넋을 뺏겨 큰 줄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부총리와 수석이 밥그릇 싸움이 아닌 선의의 경쟁을 통해 경제정책의 효율성을 높여야 할 것이라는 지적은언제나 타당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