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6시30분 서울 여의도 기아그룹 본사 2층 대회의실.한승준 기아자동차 부회장은 채권단의 「자금지원 없는 부도유예」결정에 대해 기아그룹의 공식입장을 발표하면서 기자들에게 한가지양해를 구했다.미리 배포한 보도자료중 「두달동안 자금문제는 자체해결하는 것을원칙으로 하되 불가피할 경우 채권단과 협의하겠다」는 문구를 「…최대한 자체해결하되…」로 정정해 달라는 것이었다.「김선홍 회장 등 최고 경영진의 사표제출」이라는 채권단의 집요한 요구를 거부한 채 과감히 「홀로서기」를 택한 기아 임직원들의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그러나 이같은 자력갱생 의지가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될지는 기아인들조차도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아차」가 「휘발유」를 자체조달해 가며 달려야 할 길이너무나도 험난한 「가시밭길」이란 것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아그룹 계열사 축소방안●계획은 야무진데=지난달 30일 첫번째로 열린 채권단 1차회의에서 김선홍회장은 『개발, 제조, 판매 등 자동차사업과 직접 관련이없는 것은 물론이고 비록 관계가 있더라도 돈이 될만한 것은 모두과감하게 처분하겠다』며 확고한 자구의지를 피력했다. 김회장의말대로 기아의 자구계획에는 누가봐도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 내겠다는 각오가 배어있다.우선 현재 28개의 계열사를 기아자동차, 기아자동차판매등 5개사만남기고 모두 정리하며 여의도 본사사옥을 비롯해 1백15건의 부동산등을 팔아 3조1천억원의 부채 상환 자금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또 △올 연말까지 임원 35%, 간부사원 20%, 일반 사원 8%씩 등 총8천8백35명의 인력을 감축하고 △임원의 연봉 60%와 사원의 연봉50%를 반납하는 등의 방법으로 연간 1조원 가까운 인건비를 절감한다는 것이 자구계획의 골자다.이에대해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 실무진에서는 『진로나 대농과같이 앞서 부도방지 협약대상으로 지정된 기업들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성의있는 자구계획을 가져왔다』며 비교적 후한 점수를줬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은 너무 높다=기아그룹의 재무담당 간부들에게 『채권단이 1천8백억원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는데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눈을 치켜뜨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가 이래봬도 일년에 12조원(매출액)을 올리는 회삽니다. 그 정도 돈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두달 동안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를 합해서 1천3백억원 가량이 더 필요한데, 그정도라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말뒤에는 이런 단서가 꼭 따라 다닌다. 『기업을 살리기 위해 부도를 유예해줬으면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터줘야 할 것 아닙니까.』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내심으로는 무척 버거워하고 있다는 얘기다. 부도방지 협약적용에 따라 기아가 관련된 채권·채무관계는 상당부분 중단된 상태. 대출금 원리금 상환은 두달 동안은 중지돼 금융비용은 조금 줄었지만 협력업체들에 발행한 진성어음이 할인이안돼 이를 대신 막아줘야 하는 고통이 있다. 특히수출환어음(D/A)이나 수요자금융과 같이 외상 채권을 일시에 회수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은 「차의 판매가 곧 손해」라는 최악의상황을 의미한다.하지만 기아가 가장 두려워 하는 「암초」는 다른 데에 있다.제2금융권, 그중에서도 특히 보험 리스 렌탈사 등과 같이 부도유예협약의 사각지대에서 언제든지 채권회수에 나설 가능성이 상존하고있는 것이다. 기아가 제2금융권에 지고 있는 단기부채는 모두4조4천여억원. 이중에서 1조원 가량을 보험 리스사등에 지고 있는데 대부분 신용대출을 해준 이들 금융기관이 채권확보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어음을 돌려대기 시작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언제까지 「홀로 아리랑」 부를 수 있을까=「팔말구초(八末九初)」. 기아 경영진들은 『두달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채권단이 일단 9월29일까지 부도를 유예해 준만큼 그사이에는 그럭저럭 꾸려 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기아의자생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시기는 그 보다 훨씬 일찍 올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각종 자금 결제가 몰리는 이달말 또는 내달초 쯤이면 생사의 향방을 타진해 볼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기아 회생의 견인차」라는 막중한 임무를 안고 태어난 세피아Ⅱ가 제구실을 얼마나 해낼지도 이때쯤이면 윤곽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정부도 외면한 상황에서 채권단의 「고사작전」에까지 시달리고 있는 기아가 차판매와 같은 「정공법」만으로 난국을 헤쳐갈수 없을 것이란게 대체적 견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대우 기아자동차등 완성차 3사의 기아특수강 공동경영과 같은 「깜짝쇼」가 조만간 재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니 인터뷰 / 권우하 제일은행 상무"기아 2개월은 버틸 것"▶ 기아의 정상화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채권단이 김선홍회장의 사표와 감원등에 따른 노조동의서를 제출토록 고집했던 것은 지배주주가 없는 기아그룹의 특성상 그렇게 해야만 소신있게 자구를 추진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영진에일종의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은행과의 협조가 원만히 이뤄진다면 정상화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너무 낙관적인 것 아닌가.기아가 잘못되면 기아만 타격을 입는게 아니다. 10조원의 대출을해준 채권단도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된다. 기아측의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필요하다.기아는 김회장의 사표제출후 채권단이 취할 태도에 불안감을 갖고있다.채권단의 목표는 기아를 살리는 것이다. 사표를 낸다고 해서 채권단이 이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표는 이사회나 주총에서 수리된다.▶ 자금을 채권은행이 집중관리해 기아와 협력업체의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는데.기아자구자금의 은행관리는 지난4일 채권단 대표자회의에서 합의된사항이다. 진로 대농의 경우에도 주거래은행들이 자구자금을 관리했다. 이는 채권확보 차원에서 필수불가결하다. 자금의 처분 및 변제충당순서는 9월말 2차대표자회의에서 결정된다.▶ 2개월후에 부도처리될 수도 있나.채권 금융기관들이 함께 결정할 문제다. 어떤 경우를 가정하고 대책을 세울순 없다. 할인판매 대금등으로 기아가 적어도 2개월은 버틸 것으로 전망한다.★ 미니 인터뷰 / 한승준 기아자동차 부회장"은행 자금지원 믿는다"▶ 채권단과 경영진 퇴진 문제로 아직도 심한 마찰을 빚고 있는데.잘 알다시피 기아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돼 있다. 따라서 최고 경영자의 의미도 다른 기업에 비해 조금은 독특한 데가 있다. 따라서현최고경영자가 중심이 돼야만이 자구노력의 발판을 만들어 갈수있다. 두달 후에 정부 국민 누가 봐도 최고 경영자의 존재 필요성을 공감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채권단이 전략상 부도를 유예해준 것일 뿐 최고 경영자의 사퇴를끌어내기 위해 다각도로 목을 죄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그런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누가 봐도 확실한 자구노력을 이뤄내겠다.▶ 협력업체의 어음이 할인되지 않고 있는데.매우 중요한 문제다. 협력업체의 문제는 단지 협력업체에 국한된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존망과도 직결되는 문제다.게다가 (협력업체를 외면하는 것은)우리를 부도유예 대상 기업으로 선정한 본래 의미와도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별한 대책이 있나.협력사가 위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일일점검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이후 지금까지 협력업체의 물품대 변제를 최우선으로 처리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금융단도 어떻게든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