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경제학과 절반정도 고시 매달려...수강인원 미달로 폐강과목 속출

서울대 경제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신모군(21). 신군은 올 여름방학 내내 종로에 있는 한 회계학원에 등록해 중급회계와 원가회계 등을 수강했다. 장래희망은 공인회계사(CPA)로 2년 후인 4학년 때까지 합격을 목표로 하고 있다.특히 오는 2학기부터는 서울 암사동 집을 나와 학교 근처 원룸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그는 “입학 당시에는 경제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관련 분야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장래가 보장되는 자격증을 따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더 나을 것 같아 진로를 바꿨다”고 말했다.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전공 공부 대신 다른 것에 몰두하는 학생들이 크게 늘고 있다. 어려운 경제학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 봤자 뚜렷한 비전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 특히 법학이나 경영학 전공자들의 경우 사법시험이나 공인회계사시험을 통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경제학도들도 이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고시파’다. 최근 들어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또는 공인회계사시험 등을 중비하는 경제학도들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전공을 외면하는 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속칭 명문대뿐만 아니라 지방대에서도 이런 현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이 가운데 서울대 경제학과의 고시열풍은 가히 위험수준이라는 것이 학교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대략 50% 정도는 고시에 매달리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인 이모군(21)은 “주변 친구들을 보면 절반 가까이 사법시험,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등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뒤처지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 최근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서울대 경제학과가 지난해 학부 졸업예정자 2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40%에 육박하는 70여명이 고시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연세대와 고려대, 서강대 등 다른 주요 대학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고려대 경제학과 4학년 장모군(23)은 “경제학과 학생의 30% 이상은 각종 고시에 매달리는 것으로 안다”며 “학교측에서도 각종 특강을 마련하고 고시실을 운영하는 등 학생들에게 오히려 고시를 부추기는 측면이 강하다”고 꼬집었다. 한양대 경제학과 2학년 이모군(22)은 “각 대학의 경제학과를 고시합격자수로 평가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비고시파들의 경제학 외면현상도 심각하다.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 봤자 별로 소용이 없다는 논리다. 취업시험만 해도 요즘은 대부분 면접만으로 당락을 가르기 때문에 경제학이 설자리는 별로 없다는 것. 특히 한때 필기시험을 치르면서 경제학을 필수로 하는 업체들이 많았으나 요즘은 손에 꼽을 정도로 크게 줄었다. 오히려 비경제학 과목을 많이 수강해 학점관리에 신경 쓰는 것이 더 낫다는 분위기다.상경계열 내에서 경제학 선호도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학점이 나빠 경제학과에 배정된 학생들의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될 상황이다. 원하지 않는 학과에 들어온 이상 적성에 맞을 리 없고 따라서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서울 소재 사립대 경제학과의 한 조교는 “떠밀려 경제학과에 들어온 학생들의 대다수는 아예 전공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학부제가 계속되는 한 이런 현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대학원생 곁눈질도 간과하기 힘들어경제학과 학생들이 전공을 도외시하면서 폐강되는 과목도 속출하고 있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경제학 관련 폐강과목이 매 학기 나올 정도다. 고려대의 경우 지난해 수강생이 7명에 미달했다는 이유로 미시경제이론과 경제통합론 등 2과목을 폐강했고, 한국외국어대 역시 학기마다 4~5개 과목의 강의를 취소해야 할 정도로 학생들이 외면하고 있다.지난해 한양대 경제학과에서 개설했던 국제경제학에는 단 1명만이 수강을 신청해 폐강했고, 연세대는 아직 폐강과목은 나오지 않았지만 경제정책과 계량경제학 등에는 학생이 10여명밖에 수강하지 않아 폐강 위기에 몰려 있다. 전남대와 충남대 등 지방 국립대들도 학생들이 외면하자 계량경제학실습과 경제학설사 등을 폐강한 사례가 있다.학부생뿐만 아니라 대학원생들의 곁눈질도 간과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아예 군입대를 연기하고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례도 흔하다. 대학원을 일종의 도피처로 생각하는 셈이다.연세대 대학원 경제학과의 김모군(25)은 “주위에서 대학원 수업은 적당히 듣고 오히려 사법시험이나 공인회계사 자격시험에 매달리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며 “이런 학생들은 중간에 합격하면 대학원을 휴학하거나 그만둔다”고 말했다.이러다 보니 대학원생들의 질적인 문제도 지적된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경제학과대학원 진학 희망자가 준데다 진학 후에도 딴전을 피우기 때문이다.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의 경우 경쟁률이 2대1 수준으로 떨어진데다 내년 신입생부터 필기시험을 치르지 않고 면접만으로 뽑을 예정이다. 이에 따라 경제학과 주변에서는 대학원 신입생 학력 저하가 우려된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학과사무실에서 만난 한 학부생은 “대학원에 원서를 넣으면 좀처럼 떨어지기 어렵다”며 “학생들 사이에 대학원 가기가 가장 쉽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대학들은 아예 정원을 채우기도 벅찬 경우가 부지기수고, 대학원 경제학 전공과목 가운데에도 폐강되는 과목이 속출하고 있다.돋보기 / 대안 찾는 경제학과명칭변경·전공세분화 ‘안간힘’위기를 맞고 있는 경제학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잇따르고 있다. 경제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학과이름을 바꾸는가 하면 교과내용을 수정하는 등 변신작업에 나서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또한 경제학회 차원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한양대 경제학과의 변신이다. 이 대학은 올해부터 경제금융대학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경영학과에 경영대학이 있듯 경제학과를 단과대 차원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명칭을 바꾸고 단과대학으로 독립시킨 이유는 금융을 적극적으로 경제에 접목시키고 경제학을 활성화시키겠다는 것. 학부생들을 위한 세부 전공도 크게 바꿨다. 전체 교과를 크게 금융경제, 산업기술경제, 공공경제정책, 국제통상 등으로 나누고, 현장 연계 교육인 인턴십도 도입했다.경희대 역시 경제학부 대신 경제통상학부로 명칭을 바꾸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경제학이 주는 딱딱한 이미지를 버리기 위해 기존의 ‘경제’에 ‘통상’이라는 국제적인 이미지가 풍기는 용어를 추가했다. 수원대도 경제학과 교수들이 앞장서 학과의 명칭을 경제학부에서 경제금융학과로 개편했다.이 밖에 세종대는 경제학과 무역학을 묶어 경제무역학과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았던 소비자와 기업에 대한 과목을 경제학과 내에 만드는 대학도 생겨나고 있다.경제학회 차원의 움직임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경제학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고, 경제학 교과서를 바꾸자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 일부 소장파 경제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미 구체적인 검토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