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3명이 230만명으로 증가..."사교육 열풍 편승했다" 지적하기도

최근 대주주 지분정보제공업체인 미디어 에퀴터블(www.equitables.co.kr)은 국내 보유주식의 가치를 따져 산정한 ‘2002년 한국의 100대 부호’를 발표했다. 예상대로 10위권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 총수와 그의 가족들이 대거 포함됐다.이건희 삼성 회장, 신동빈 롯데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신격호 롯데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 이명희 신세계 회장, 구본무 LG 회장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포진한 것.(표 참조)그런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하게 9위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5,000억원대 재산가인 강영중 대교그룹 회장(53)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이름 석자는 생소할지 몰라도 그는 학습지업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강회장이 이끄는 대교그룹은 (주)대교, 건설알포메 등 7개 계열사에 임직원이 1만8,000명(눈높이교사 포함)이며, 2001년 매출액 7,000억원, 당기순이익이 750억원에 달하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강회장이 국내 최초로 학습지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대교를 일군 것은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학습지 시장이 지금은 2조5,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크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황무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ROTC로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강회장은 1976년 학습지 시장에 뛰어들었다. 서울 성북구돈암동의 좁고 허름한 단칸 사무실에서 ‘공문수학연구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설강습소를 연 것이다. 당시 사설강습소의 회원은 3명이 전부였다. 그것도 모두 이웃주민들의 자녀였다. 동업자도 없었고, 그의 일을 도와주는 직원도 없었다. 당연히 자신이 사장 겸 교사, 경리, 영업 등 회사운영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요즘말로 ‘솔로 창업’을 한 셈이다학습지사업에 몸담은 것은 재일동포 사업가인 숙부 강대희씨가 자녀들이 당시 일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던 ‘공문수학’으로 효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 조카인 강회장에게 한국에서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권한 것이 계기가 됐다.주위에서는 모두 반대했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강회장은 ‘교육사업은 실패할 확률이 낮다’는 생각에 숙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일본 ‘공문수학’과 제휴를 맺고, 교육방법 중 국내 현실에 맞지 않는 학원식 교육은 제외하고 ‘능력별 프로그램 학습방법’을 도입했다. 당시 국내에 폭넓게 확산된 그룹과외에 접목시킬 요량이었다.그는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회원들을 모집했고, 회원수도 조금씩 늘어나면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4년 만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첫 고난이 찾아왔다. 1980년 7월 단행된 과외금지 조치가 그것이다. 당시 100명의 교사와 4,200여명의 회원이 있었으나 이 조치로 2명의 사무국장과 교사 2명만 남게 됐고 회원수도 400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강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되돌아봤다. “사업의 뿌리도 내리기 전에 아무런 예고 없이 취해진 조치여서 회사는 물론 나도 방향타를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나 내가 책임져야 할 식솔과 그들의 믿음이 나를 다시 서게 했다.”이를 계기로 기존의 ‘그룹과외식’에서 문제지만을 회원에게 배달한 뒤 교사가 집을 방문해 지도하는 ‘가정방문식’ 학습시스템으로 전환했다.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학습시스템은 학부모들로부터 더욱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눈높이 브랜드’로 고속성장위기를 거뜬히 넘기고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1985년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과도한 로열티 인상을 요구한 일본 공문수학과 마찰을 빚게 된 것. 강회장은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던졌다. 10년간 키워온 공문수학이라는 브랜드를 버리고 과감하게 홀로서기에 나섰다.1986년 상호를 ‘대교’로 바꾸고, 이어 새 브랜드로 ‘눈높이’를 채택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눈높이는 당초 광고카피 문구로 채택을 반대하는 임원들도 많았지만 뜻이 좋으면 결과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결정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눈높이 브랜드는 대성공이었다. 가르치는 사람(공급자)이 아니라 배우는 학생(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하겠다는 ‘눈높이 교육’ 전략은 학부모와 학생 모두에게 열띤 호응을 얻었다. 강회장을 두고 “승부사적 기질이 돋보인다”라는 평을 하는 임직원들이 적잖은 것도 이 때문이다.이후 대교의 발전은 ‘눈부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1993년 회원수 100만명을 돌파한 데 이어 1999년 200만명을 넘어서며 사교육시장에 핵폭풍을 일으킨 것이다.강회장이 ‘한국의 100대 부호’ 9위에 오른 것은 이처럼 대교의 비약적인 성장 덕분이다. 법인으로 전환한 1987년 이후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고,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던 외환위기 때도 대교는 당기순이익 300억~4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주)대교 주식의 52%를 갖고 있는 그에게 막대한 부가 따라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강회장은 지금까지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교육사업으로 2009년까지 매출액 4조원, 신규 사업 매출액 1조9,700억원을 올려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갖고 있다.강회장이 학습지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펼친 사업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학습지시장의 고속성장으로 풍부한 실탄을 확보한 뒤 사업다각화에 나섰지만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신규 사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형편이다.엑스포과학공원, 주간신문 등 의욕적으로 시작했으나 실패한 사업이 적지 않다. 또 건설업 진출과 골프장 인수 등은 교육기업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들었다. 업계 일각에서 “강회장의 성공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교육 열풍에 편승했을 뿐”이라고 폄하하는 이야기가 나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두 번에 걸친 노사간 마찰로 일부 직원들로부터 “보수적인 노사관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그러나 그가 20여년에 걸쳐 이룬 성공신화는 사업을 시작하는 수많은 후배 경영인들에게 여러 측면에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경영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0여개의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한 것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