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제 379호 (2003년 03월 10일)

대기업 구매팀 ‘윤리경영’ 첨병 변신

2000년 대기업인 S사 구매부서에서 1년간 근무했던 B씨(31)의 회고담. “일주일에 3~5일은 납품업체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직급에 따라 술자리도 달라졌지요. 예컨대 부장이 참석하면 대개 요정에서, 과장 이하면 단란주점에 갑니다. 물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상품권이 넘쳐났습니다. 상품권도 부장 50장, 과장 30장, 말단직원 10장 등 직급에 따라 나눠가졌지요. 상사들은 ‘웬만한 뒷돈은 받아도 된다’며 당연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요즘도 이럴까. CJ(주) 구매부서에서 18년간 근무했던 이창헌 부장(44)의 설명. “직장생활을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부정한 방법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점심식사 한 끼 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 구내식당에서 우리가 대접할 정도입니다.

시스템이 투명해지면서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납품업체를 선정했다가는 곧바로 감사에 걸려듭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실감날 정도로 감사기능이 강화됐습니다.”

CJ, 신세계, 포스코, 현대차 등 대표적

물론 대다수 기업 구매부서가 180도 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윤리경영’을 기업경쟁력의 척도로 삼고 있는 기업에서는 관행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인식이 절박하다. 특히 기업의 구매부서는 ‘윤리경영’의 리트머스시험지 역할을 하는 곳. 따라서 윤리경영이 정착되려면 그 어느 부서보다도 구매부서가 투명해져야 된다. 대표적인 기업들로 CJ, 신세계, 포스코, 현대자동차 등을 꼽을 수 있다.

연간 5,500억원어치를 구매하는 CJ 전략구매실 55명의 임직원 수첩에는 명함 크기의 구매윤리헌장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이런 경구가 있다. ‘항상 공평무사하고 깨끗한 도덕적 바탕 위에 법규와 약속을 준수하는 열린 구매를 추구한다.’ 이들은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먼저 PIS(Purchasing Information System)를 통해 부정한 방법의 거래를 원천 차단했다. PIS란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를 만들기 위한 정보시스템. 가령 어떤 업체가 거래를 원하면 구매담당자를 찾아갈 필요 없이 PIS 사이트(www.cipis.co.kr)에 등록, 구매담당자가 승낙하면 모든 입찰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구매담당자는 등록여부를 결정하면서 반드시 타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내부감사에 걸려 홍역을 치른다.

설비자재업체인 세진P&V는 CJ의 PIS 덕을 톡톡히 본 경우다. 평소 CJ와 거래를 원했던 세진P&V는 지난해 4월 PIS에 등록, 입찰자격을 얻어 꾸준하게 입찰에 참가한 결과 2억원 수준의 거래를 이뤄냈다. 박종구 사장(38)은 “일반적으로 건설자재의 경우 수의계약이 대다수여서 학연, 지연 등 인맥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며 “CJ 구매담당자에게 아직까지 상품권 한 장 보낸 적이 없지만 공개적인 입찰을 통해 계약이 성사돼 매우 놀랐다”고 전했다.

이밖에 감사기능을 강화해 부조리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없앴다. 회사 감사팀에서 거래업체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것은 물론 ‘사이버신문고’ 제도를 통해 거래업체의 제보를 받는다. 또 오랫동안 거래해 온 업체들의 모임인 ‘협당회’(제일제당에 협력하는 회사들의 모임)이라는 명칭도 ‘CJ파트너스’로 바꾸는 등 제도적 뒷받침은 물론 협력회사와의 관계변화도 꾀하고 있다.

서재열 전략구매실장(상무·46)은 “포장재 등 보통 자회사에서 독점 공급받는 것들도 모두 외부기업에서 공개입찰을 통해 납품받을 정도로 공정성이 확보돼 있다”며 “최근 몇 년간 구매부서에서 부정과 연루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신세계 이마트 구매부서가 있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 빌딩. 이곳은 오후 6시가 되면 자동적으로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단된다. 거래업체와의 상담이 업무시간 이후로 길어질 경우 술자리 등의 향응제공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아래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신세계는 구매부서에 대한 감시기능이 강력하다. 명절 때는 회사 차원에서 협력회사 대표들에게 금품수수 금지 안내문을 보내고 바이어들도 영업담당자들에게 e메일로 협조공문을 보낸다. 신세계가 거래하고 있는 협력업체수는 모두 5,000여개.

이런데도 혹시 향응, 접대, 편의 등을 제공받았을 경우 해당 직원은 물론 거래업체도 강한 제재를 받게 된다. 실제로 지난해 3개 업체가 일정기간 납품을 못하거나 거래량이 축소되는 등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금품이나 향응뿐만 아니라 협력회사와 상담 때 샘플을 받았을 경우에도 이후 이를 돌려줘야 한다. 혹시 부도로 인해 협력회사가 없어 돌려주지 못할 경우 ‘클린뱅크’에 제공해 구매담당자가 개인적인 용도로는 쓰지 못하도록 했다. ‘클린뱅크’란 돌려주지 못하는 제품 등을 임직원에게 팔아서 거둔 수익금을 사회봉사활동비로 사용하는 제도.

윤리실천사무국의 이병길 국장(43)은 “외부기관과 함께 협력업체를 무기명으로 선정, 설문조사를 통해 임직원의 금품수수요구 등에 대해 조사한다”며 “백화점 5명, 이마트 7명인 기업윤리담당 직원들이 이중삼중으로 검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북 포항에 있는 포스코 자재구매실에 들어서면 도서관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2년 전만 하더라도 협력업체 관계자들로부터 ‘시장통’ 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이곳이 이렇게 조용해진 것은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포스코 관계자는 “연간 7조6,000억원의 구매량 중 98%가 전자입찰로 이뤄지기 때문에 협력업체 관계자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밝혔다. 이러다 보니 구매부서에서 향응을 접대받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환경이 됐다는 것.

포스코는 2001년 9월 SRM(Supplier Relationship Managementㆍ공급사 고객관리)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e-프로큐어먼트를 구축, 인터넷을 통한 B2B 구매환경이 완벽하게 구축됐다. 구매계약과 관련한 각종 정보는 공급사, 운송사, 은행, 보험사 등 포스코의 모든 거래선이 공유하도록 했다.

계약도 인터넷으로 체결하고 주문처리도 포스코가 인터넷으로 계약사에 전송한다. 대금정산을 위한 세금계산서는 인편이나 우편으로 접수하지 않고, 전자인증 세금계산서를 온라인으로 송ㆍ수신한다. 입찰공고에서 결제까지 모든 절차가 인터넷상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연간 4만여명의 인력왕래가 줄어들었고, 구매인력도 대폭 감소됐다. 자재구매실의 경우 117명에서 58명으로 줄었다. 박명길 SRM 팀장(45)은 “거래업체에서 방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담당자들의 얼굴도 모른다”며 “구매과정에서의 투명성을 완벽하게 확보했다”고 자랑했다.

현대자동차의 올 초 인사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기획총괄본부 경영개선실의 김치웅 전무가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으로 발령난 것. 경영개선실은 다른 기업의 감사실과 같은 일을 하는 곳으로 이는 윤리경영에 대한 정몽구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회사 안팎의 평가다.

현대자동차의 연간 구매량은 20조원. 이러다 보니 각종 구매과정에서의 비리가 발생할 소지가 적잖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구매총괄본부장 직할로 ‘구매총괄본부 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인터넷 구매시스템을 활용한 구매비리 근절 등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

이중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입찰 과정에서의 투명성이다. 이를 위해 현재 전체 구매량 중 80% 선에 이르고 있는 전자입찰 비중을 더욱 늘려나갈 작정이다. 또 ‘사이버 감사실’과 ‘협력회사 소리함’을 통해 협력회사로부터 거래 관련 불이익과 불만족을 인터넷으로 무기명 접수해 해결하고 있다.

사실 구매부서의 투명성은 회사가치를 높이는데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남경완 전국경제인연합회 연구원은 “윤리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시장가치가 높을뿐더러 글로벌 경쟁력 측면에서도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앞에서 소개한 4개사를 보더라도 ‘1등 기업’은 구매부서의 투명성ㆍ공정성이 확보돼야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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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