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정대로 했다’ vs ‘대출심사 문제 있다’

지난 7월31일 대우차동차와 쌍용자동차의 무보증 자동차할부대출(상품명은 국민 뉴 오토론ㆍ이하 오토론)과 관련한 1심 판결이 법원에서 열렸다. 이날 서울지법 민사합의29부(재판장 곽종훈 부장판사)는 대출자인 국민은행이 공제보험자인 수협을 상대로 제기한 11억7,500여만원의 공제금지급 청구소송에 대해 국민은행과 수협이 절반씩 책임지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민은행은 대출심사과정에서 여신기관에 요구되는 대출관련 규정과 주의의무를 현저히 결여한 책임이 인정된다”며 “수협은 국민은행에 6억여원의 공제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수협이 절반의 승소를 한 셈이다.그러나 동일 오토론으로 수협이 국민은행을 상대로 벌인 채무자 51명에 대한 채무부존재확인 청구소송에서는 10명만이 채무가 없음이 인정돼 오히려 수협측에 불리한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대출자의 명의가 제3자에게 도용 또는 제출서류 허위 등으로 대출자격을 상실했는 데도 불구하고 은행측이 대출을 실행한 경우는 10명뿐”이라며 “나머지 41명은 정상적인 대출로 보이기 때문에 수협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혀 수협은 41명의 공제금을 국민은행에 지급해야 할 입장에 놓였다.7월 말 현재 오토론과 관련한 소송건수는 총 103건, 부실대출액은 무려 743억원에 달하고 있다. 때문에 국민은행과 수협은 법원판결에 이의를 제기하고 항소의 뜻을 강력히 내비치고 있다.오토론, 삼성화재가 개발무보증 신용대출상품인 오토론은 지난 2001년 2월1일 대우ㆍ쌍용차와 국민은행과 주택은행(2001년 11월 국민은행으로 합병)의 업무제휴로 탄생했다. 이전까지 신용대출로 차량을 구입하는 고객들은 1~2명의 연대보증인을 세우고 높은 신용대출 수수료를 납부해야만 자동차 구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오토론의 등장으로 보증인과 할부금융 수수료 부담 없이 만 20세 이상의 소득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오너가 될 수 있게 되자, 고객들은 최대 3,000만원 최장 36개월까지 대출을 받아 차량을 구입했다. 대출금리 또한 평균 10.7%로 타사와 비교해도 저렴한 편이었고, 오토론은 그해 2월부터 9월까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 4,500여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적을 기록했다.국민은행과 수협이 오토론을 놓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만 재판결과 정작 이 상품은 삼성화재가 개발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화재는 자동차 구입자금대출 금융상품 개발을 끝낸 2000년 7월 말께 대우자동차판매(쌍용자동차 포함)에 판매시행을 제의했다. 여기에 국민은행(주택은행 포함)이 참여하면서 오토론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국민은행은 대우자동차가 판매하는 차량을 구입한 고객의 자동차에 저당권을 설정하고 구입자금을 대출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를 회수하지 못할 때에 대비해 그 손실분을 삼성화재의 보험상품으로 보전받기로 약정했다. 만약 고객의 상환불능이 발생해 차량을 회수하게 되면 저당권을 행사해 처분대금을 회수하고 그 부족분은 삼성화재의 보험상품으로 보전받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차량의 회수가 안되면 손해보험상품만으로는 손실보전이 불가능해지자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조치로 수협의 저당물 손실보상보증공제 상품이 물망에 올랐다. 그리고 수협은 국민은행의 보험사로 최종 결정됐다.수협, 엄정한 대출심사 없었다부실대출이 잇달아 발생하자 국민은행, 수협, 삼성화재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대출자인 국민은행은 약정에 규정된 자격조건대로 대출을 해줬으니 보험금 지급을 요구했고 수협은 대출서류의 허위, 위조와 은행의 대출심사과정이 엄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국민은행, 수협, 삼성화재가 맺은 ‘3자 약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대출고객 자격조건을 명시한 동 약정 11조 5항이다. 이 조항에는 대출접수일 현재 금융기관 신용정보교환 및 관리규약에 의한 신용부적격자가 아닌 만 20세 이상인 자 중 소득이 있거나 재산을 소유하고 대출자격 증빙서류를 제출하는 자로서 1인당 자동차 1대로 제한한다고 밝히고 있다. 증빙서류로는 근로자의 경우 재직증명서, 고용보험가입확인서, 직장의료보험증, 공무원증 또는 급여이체통장사본을 첨부한 대출직전월의 급여명세서를 요구하고 있다. 기타의 경우는 재산세 과세증명서, 재산세 납입영수증, 소유부동산(건물 또는 토지) 등기부등본 또는 기타 연간 1,000만원 이상의 소득이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소송당사자인 국민은행과 수협은 부실대출금액이 커지자 대출자격에 대해 첨예한 대립을 나타냈고 급기야 송사에 휘말렸다.수협 공제보험부 관계자는 “솔직히 우리는 국내 리딩뱅크인 국민은행의 대출심사를 철석같이 믿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오토론을 이용해 문제가 생긴 사람들의 대부분은 20대 초반이었고 그들이 제출한 서류는 대부분 허위였다. 특히 이들은 체어맨과 같은 고급차를 구입했다. 은행이 자사 대출상품을 판매할 때처럼 통상적인 대출심사만 했어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은행은 월소득과 상환능력도 파악하지 않았고, 자격서류의 진위여부도 조사하지 않고 대출했다. 후발주자로 참여한 보험사로서는 억울할 뿐이다”고 털어놓았다.그러나 국민은행 개인여신팀 관계자의 말은 다르다. 이 관계자는 “수협, 삼성화재와 약정을 맺을 때는 재직증명서, 재산세 납입증명서 등의 증빙서류만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득이 얼마나 되는지, 상환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논의한 바 없다. 고객이 대출적격자로 나오면 무조건 대출을 해주기로 했고 여기서 부실이 발생하면 보험사에서 책임지겠다고 분명히 약정에 표기해놓았고 그래서 보험에 가입했다. 우리의 귀책사유가 있다면 책임을 지겠지만 은행의 대출과정에는 과실이 없다. 특히 오토론을 개발한 삼성화재는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수협과 국민은행은 법원의 재판결과에 대해 소송 보조참가인과 변호사에 자문을 받은 뒤 항소에 대한 최종입장을 밝히기로 했지만 수백억원이 걸린 문제인 만큼 항소는 불 보듯 뻔하다.국민은행, ‘약정대로 대출했다’한편 법원의 1심 판결이 나오자 오토론을 개발한 삼성화재는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삼성화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외국계 보험사인 로열&선얼라이언스와 재보험계약을 체결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자사가 개발한 상품에서 문제가 생긴 것에 안타까워했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아직 소송은 진행 중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은행이 대출심사를 했어야 한다. 재판결과 우리의 책임이 있다면 약정대로 보험료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국민은행, 수협, 삼성화재가 상대방의 책임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지만 자동차를 판매한 대우차와 쌍용차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두 자동차사는 국민은행과의 약정을 통해 대출과 관련한 서류접수 업무를 위임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대우자동차 관계자는 “통상 자동차 영업사원이 하는 업무는 고객으로부터 법적인 위임을 받아서 처리하는 업무가 아닌 서류를 은행에 대신 갖다 주는 대행 서비스의 의미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쌍용자동차 관계자는 “소송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은행측의 구상권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오토론 시행 당시 영업사원들이 고객의 신분을 직접 확인하는 등 계약과정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차량을 구입하는 고객의 편의보다는 자동차 판매수익과 이에 따른 대출이자, 수수료만을 위해 부적격 대출자를 걸러내는 여과장치를 마련하는 데 소홀히 한 국민은행, 수협, 삼성화재, 대우차, 쌍용차. 앞으로 법원은 누구의 손을 더 높이 들어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