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재경부 장관의 후임으로 이헌재 전 재경부 장관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기억에서 차츰 사라져 가던 이헌재씨(사진)가 언론의 중심에 화려하게 컴백한 것은 지난 연말 ‘이헌재 펀드’ 설립을 공표하면서부터다. 국내 금융시장이 외국계 자본에 무차별로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토종 자본 3조원을 끌어모아 ‘우리은행’ 등을 인수하겠다는 게 ‘이헌재 펀드’의 요지.펀드업계에 따르면 아직 자금모집은 이뤄지지 않고 법률 검토 등 준비단계다. 이윤재 전 대통령정책비서관(코레이 대표)이 실무 총괄을 맡고 있으며, 김영재 전 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도 솔로몬신용정보 회장직을 사임하고 펀드에 간여해 왔다. 하지만 김영재씨는 지난 2월4일 “더 이상 이헌재 펀드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헌재 전 장관의 입각이 현실화될 경우 이헌재 펀드의 앞날은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다.어쨌든 이헌재씨가 바람몰이를 시작한 펀드는 금융회사에 투자하기 위한 사모펀드 붐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펀드 조성의 목표로 삼은 ‘우리은행’에 대한 강한 애착은 그 배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지금은 몰락했지만 대우그룹은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 그것도 은행업 진출과 연관이 깊다. 우리은행의 탄생과 이헌재 펀드의 설립 배경 역시 과거를 더듬어 보면 김우중씨의 고민과 접점이 맞닿아 있다.이헌재씨와 김우중씨의 인연은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경기고 동문으로 김우중씨가 6년 선배다. 김우중씨가 70년대 중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대우신화’를 주도할 무렵 이헌재씨는 서울대 법대 수석졸업, 행정고시 수석합격 후 재무부 금융정책과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김우중씨 금융정책과장이었던 이헌재씨를 찾아 가능한 범위에서 도움을 받곤 했다. 그러다 이헌재씨가 79년 율산그룹 파동에 휘말리면서 재정금융심의관을 끝으로 관계에서 물러나자 김우중씨는 (주)대우 상무로 영입해 84년 대우반도체 전무까지 맡겼다.이후 한신평 사장, 증권관리위원회 위원,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 조세연구원 자문위원 등으로 20여년을 관 밖에서 보내던 이헌재씨는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진영의 경제브레인으로 깊숙이 관여하다가 김대중ㆍ김종필 연합정권의 ‘IMF 외환위기 해결사’ 중 한 명으로 전격 발탁됐다. 직함은 비상경제대책위 실무기획단장. 금융 구조조정 및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당시 두 가지 큰 과업은 98년 4월1일 초대 금융감독위원회위원장으로 이헌재씨가 선임되면서 그의 두 어깨로 고스란히 옮아갔다. 이헌재씨는 먼저 금융, 특히 은행에 칼을 빼들었다.한편 당시 전경련 회장대행을 맡고 있던 김우중씨는 김대중 대통령과 자주 독대를 가질 정도로 국가경제 계획 수립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불도저형 스타일답게 5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로 외환보유고 1,000억달러를 만든다는, 당시 누구도 입에 올리기조차 힘들었던 수치를 제시하며 김대통령에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당연히 김대통령의 김우중씨에 대한 은근한 마음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한편 김우중씨는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외발 음모론을 강하게 제기하며 기업의 과도한 부채가 원인이 아니라 이를 감당해 내지 못하는 취약한 국내 금융환경(소규모인 은행)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우중씨의 슈퍼뱅크론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김우중씨의 슈퍼 합작선도은행 구상은 98년 7월 정재계 청와대 회동을 계기로 구체화됐다. 김우중씨는 전경련 사무국과 한국경제연구원에 재계가 주도하는 합작선도은행 설립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이헌재씨도 이 같은 재계의 움직임에 대해 “은행 출자자금이 투명하고 차입금만 아니라면 산업자본의 은행설립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화답했다.그러나 두 사람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우중씨가 시티은행과의 슈퍼은행 설립 합작건으로 미국 방문길에 오르는 등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던 사이에 이헌재씨는 금융구조조정과 아울러 삼성, LG, 대우, 현대, SK 등 5대 재벌 구조조정을 함께 진행하면서 ‘야생마론’을 가다듬는다. 야생마론이란 재벌이라는 야생마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울타리를 쌓아야 한다는 것. 부채 규모 200%가 가장 높은 담장이 됐다. 그러면서 우리 기업의 가장 큰 문제로 ‘차입경영’을 꼽았다. 미국과 일본의 부채비율이 각 154%, 193%인 반면, 우리나라는 519%라는 것. 은행 때문에 기업이 애를 먹는 게 아니라 기업 때문에 은행이 부실해졌다는 쪽으로 심지를 굳혔다.대신 김우중씨의 슈퍼뱅크론은 그해 7월31일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합병, 즉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의 탄생으로 대리만족시켰다. 당시 금융계 및 기업들에 ‘저승사자’로 불리던 이헌재씨의 권력은 결국 과도한 부채로 허덕이던 대우그룹의 몰락을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김우중씨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김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했던 김우중씨를 몰락시키기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마음고생도 심했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우중씨 역시 현재 베트남 등 외국을 전전하며 ‘대우 몰락의 진실’을 언젠가(정권 교체시기를 이르는 듯) 밝히겠다고 벼르고 있어 오랜 인연은 악연이 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 허용 방침도 99년 7월 대우가 몰락하기 직전 ‘허용 불가’ 쪽으로 선회했다. 불과 1년 만의 상황 역전이다. 99년 5월 이헌재씨는 “전세계적으로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는 나라는 드물다”며 재정경제부가 추진하던 은행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2000년 1월 재경부 장관에 임명됐을 때도 “산업자본이 신용창출과 지급결제 기능이 있는 은행에 직접 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재벌의 은행 소유에 반대하는 뜻을 밝혔다. 그러다 그해 5월 4%로 묶여 있는 은행의 동일인 소유지분한도를 연내 철폐 또는 완화하기로 방침을 바꾸지만 그조차도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허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금융전업가에게만 길을 터주겠다는 것.이헌재씨는 금감위원장 4개월 만에 보람 충청 등 5개 은행, 금융기관 20개, 부실기업 55개를 퇴출시켰다. 이후로도 그의 구조조정은 계속돼 투신사 구조조정과 재벌간 빅딜을 주도했으며, 한일ㆍ상업, 국민ㆍ장은, 조흥ㆍ강원ㆍ충북, 하나ㆍ보람은행 합병 및 제일은행 매각을 성사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구조조정 ‘집도의’, ‘저승사자’ 등의 별명을 얻었다.금융지주사 설립 등 법까지 바꿔가며 설립된 우리은행은 이헌재씨의 가장 큰 보람이자 성과물 중 하나다. 이헌재 펀드의 설립도 이렇게 공을 들인 우리은행이 HSBC 등 외국은행에 팔릴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사실 많은 관련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의 은행업 진출은 전적으로 정치논리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재경부의 은행법 개정도 정권의 의지만 확고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산업자본은 확고한 기회를 맞지 못했다. 최근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으나, 현 정부가 반재벌 성격이 강한데다 이헌재씨가 다시 재경부 장관으로 복귀할 경우 기회는 더 줄어들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