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는 은행이 몇 개나 있을까.답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공상은행, 농업은행, 중국은행, 건설은행 등 4대 국책은행만 합쳐도 전국 지점수가 10만개쯤 있다는 사실이다. 지방 곳곳에서 영업하고 있는 군소 민영은행수를 포함한 정확한 통계는 집계된 적이 없다.방대한 영토와 낙후한 전산망 때문에 중앙행정의 영향력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하다 보니 은행마저 산간벽지 지점에 대해선 지휘권 밖으로 치부해 버리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이렇다 보니 중국 은행권에선 지금까지 대출 때 신용보다 ‘끈’과 ‘백’이 더 중시됐고, 부실채권 관리도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은행 지점장이 고객돈을 빼돌리는 내부 비리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났다.그런 중국 은행권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중국 정부가 내년 말 금융시장 전면 개방을 앞두고 대형은행들의 체질개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중국 내 은행과 외국투자가간의 짝짓기가 가속화되면서 외국인 경영진과 이사회 멤버가 현지 대형은행에 잇따라 투입되고 있다. 그동안 나태한 업무 관행에 젖어 있던 중국의 은행들은 이제 전산 인프라를 구축하고 리스크 매니지먼트 비법도 배우기 시작했다.광둥기술사범대학원 경제학 교수인 장루이가 최근 <중국경제일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국유은행 개혁방법은 해외증시 상장과 외국 전략 투자가 모집이다. 구체적으로는 외국금융사와 제휴를 맺어 선진국 자본과 업무 노하우를 도입한 후, 이렇게 해서 업그레이드된 은행을 해외증시에 상장시키는 방법이다.정부의 의지에 따라 중국의 대형 국유은행들은 최근 잇달아 외국금융사를 전략적 투자파트너로 맞았다. 4대 은행 중에는 건설은행이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 및 싱가포르 테마섹에 총 14.1%의 지분을 넘겼고 중국은행은 스코틀랜드왕립은행 및 메릴린치에 10%의 지분을 매각했다. 세계 최대 금융그룹 씨티는 상하이 푸둥개발은행 지분 4.6%를 확보한 데 이어 지분율을 곧 외국투자가 지분 상한인 20%로 확대할 계획이다. 외국 파트너를 맞이한 은행들에는 보통 외국인 간부와 기술이 투입된다.중국 은행들은 이 같은 짝짓기를 통해 IT인프라 구축과 업무 프로세스 혁신에 필요한 거액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테마섹이 각각 건설은행 지분 9%와 5.1%를 사는 데 투입한 돈은 총 44억달러이고 스코틀랜드왕립은행 등이 중국은행 지분 10%를 인수하면서 수혈한 돈은 31억달러였다. 교통은행에는 HSBC 자금 17억5,000만달러가 들어왔다. 중국의 대형은행들은 외국 돈과 기술로 상장 준비를 마친 후 연말부터 차례로 홍콩 등 국외 증시에 상장될 예정이다.중국 은행권의 해외 지분매각은 최근 들어 더욱 과감해지는 추세다. 외신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한때 파산 위기까지 갔던 중소 규모의 지역 금융기관인 광둥개발은행 지분 51%를 외국인을 포함한 일반인에게 경매 형식으로 팔 계획이다.보도 내용대로라면 광둥개발은행은 민간에 팔리는 중국의 첫 국영은행이 된다. 중국에서 외국인은 은행 지분을 25% 이상 보유할 수 없고 단일 외국인 주주의 지분 상한은 20%지만 광둥개발은행의 경우 외국인이 중국 국내기업과 조인트 벤처를 구성하면 은행에 대한 지배권도 행사할 수 있다.지방정부와 국유기업들이 더 이상 은행에 함부로 벌리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도 있다.몇 년 전만 해도 국유 형태가 대부분인 중국 은행들의 주요 임무는 국책사업 및 국유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대는 것이었다. 정부관리의 말에 따라 대출이 이루어졌고 리스크 매니지먼트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채권자나 채무자 모두 은행돈을 눈먼 돈처럼 여기는 풍조가 생겨 대출을 받아간 기업들은 부도를 내는 경우가 많았고 은행 고위간부가 횡령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2001년 말의 경우 4대 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은 1조7,656억위안(약 223조원)으로 당시 중국 한 해 정부예산(1조8,844억위안)에 맞먹었다. 총대출에서 부실채권이 차지하는 비율은 25.4%로, 부실채권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일본(6.8%)과 비교해보면 중국의 금융부실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국제결제은행(BIS)은 당시 이 비율을 47%로 추정했다. 중국 은행권 부실채권 문제가 특히 심각했던 이유는 비율이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는 점 외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주식과 채권 같은 간접금융상품이 제대로 발달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은 여전히 자금조달을 거의 은행대출에 의존하고 있어 중국 금융자산 중 은행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77%에 달한다. 반면 미국은 이 비중이 26%다.이 때문에 중국 금융당국은 국유 상업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을 2005년까지 15%로 낮춘다는 것을 목표로 이 비중을 매년 2~3%씩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대출 심사기준을 강화하고 부실채권을 헐값에 외국금융사에 대량 매각했다. 중국은행감독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 비중은 올 하반기 들어 10% 이하로 내려와 중국 정부가 목표달성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 스탠더드&푸어스는 여전히 중국이 금융권 부실을 털어내려면 이 나라 국내총생산(GDP)의 40%에 해당하는 6,500억달러를 쏟아부어야 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 신용평가회사는 중국 금융시장을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중국 은행권의 또 다른 고질적인 병폐는 횡령사고다. 4대 국책은행인 중국은행에서만 홍콩지점장 류진바오가 은행돈 100만달러를 횡령한 후 지난해 기소돼 최근 사형을 구형받았고 헤이룽장성 지점장도 10억위안(약 1,270억원)을 가로채 해외로 도주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류진바오 사건이 터진 후 중국은행 간부들의 자격을 전면 재검토해야겠다며 이 은행 고위직 2,000명의 입사지원서를 새로 받기도 했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으나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던 셈이다. 중국 정부는 이들 은행에 외국인 대주주가 생기고 해외증시 상장을 거쳐 지배구조가 추가로 확대되면 그동안 소홀했던 내부감시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외국 금융회사가 노리는 것외국 금융회사들이 중국 당국의 바람대로 기꺼이 중국 은행들의 파트너가 돼주는 이유는 물론 중국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해서다. 일종의 말뚝박기다. 중국의 중산층 인구는 10년 안에 1억명이 될 전망이고, 이들 대부분은 현재 신용카드가 없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도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완전한 미개척지인 셈이다. 현재 중국의 총저축액은 1조5,000억달러에 달하고 연말이면 1조7,000억달러로 불어날 전망이다.성장 가능성은 무한해 보이지만 외국사가 이 시장에 진입하기란 쉽지 않다. 서비스 수준이나 금융관리 노하우는 국제기준에 떨어질지 모르지만 4대 은행만 해도 이미 각각 수만개씩 지점을 거느리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이다. 외국 금융사 입장에서 뒤늦은 출발을 만회할 방법은 현지은행을 파트너로 잡는 것뿐이다.특히 가장 적극적인 곳은 싱가포르 국영 투자은행 테마섹이다. 테마섹은 이미 중국 민셩은행 지분 4.55%와 건설은행 지분 5.1%를 확보한 데 이어 현재 중국은행 지분매입을 추진 중이다. 이 3개 은행에 대한 투자가 마무리되면 테마섹의 총투자액은 50억달러에 달해 HSBC를 제치고 중국에 가장 많이 투자한 외국 금융회사가 된다.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중국 은행이 파트너를 모집할 때면 외국회사 여러 개가 달려들어 입질을 한다. 중국 화시아은행에 투자할 예정인 도이체방크의 경우 프랑스 소시에테제너럴, 싱가포르 OCBC 등 다른 9개 원매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쳤다. 로컬 은행들의 몸값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미국 뉴브리지캐피털이 선전개발은행 지분을 매입할 때는 장부가치의 1.7배를 지불했고 HSBC는 교통은행이 1.8배를 줬다.하지만 이렇게 중국 은행들에 정성을 들이고 있는 외국 금융사들이 투자한 만큼 과실을 따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현재 유일하게 공개된 성적표는 HSBC 것으로, 이 은행은 상반기에 중국 대륙에서 12억5,000만홍콩달러(약 1,650억원)의 이익을 거뒀고 이중 교통은행이 기여한 부분은 7억홍콩달러였다. 꽤 우수한 성적표라고 할 만하다.하지만 지금 당장은 외국은행들은 중국 은행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큰 소득을 얻는 것보다는 줄 것이 많은 입장이다. 외국은행의 중국투자에는 지분제한이 있는데다 경영참여가 원천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HSBC는 교통은행의 최대 민간투자가지만 이사회 19자리 중 이 은행의 몫은 중 2자리뿐이다.당분간은 외국은행과 중국 은행들이 서로의 문화를 배우는 데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외국인 파트너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은행과 제휴한 스코틀랜드왕립은행의 조지 매슈슨 이사장은 “중국에 진출한 지 10년이 됐지만 그동안 사업규모는 겸손한 수준이었다”면서 “이번 제휴를 통해 고객정보와 현지문화를 배워 중국사업 확장의 토대로 삼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