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자녀·사위 회사 2곳 운영중

유통업계에 또다시 격변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다. 뉴코아를 인수했던 이랜드는 한국까르푸마저 손에 넣으며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이마트는 이에 뒤질세라 한국에서 철수한 월마트를 접수해 업계 1위의 아성을 더욱 높게 쌓았다. 군웅이 할거하는 치열한 유통전쟁의 현장에서 더 이상 ‘김의철’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전국 곳곳에 한국형 할인점 킴스클럽을 지어 외국계 업체의 국내시장 공략을 막아냈고, 37세에 480평 슈퍼마켓에서 출발해 불과 17년 만에 재계 25위의 뉴코아그룹을 일궈냈던 ‘유통황제’ 김의철 전 회장(64).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서울 서초구 잠원동 일대에 가면 지금도 김 전 회장의 자취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신반포 단지에 빽빽이 들어서 있는 한신아파트는 모두 그의 손으로 지어졌다. 군 경리단 출납담당 사병으로 근무하던 김 전 회장은 고 김형종 한신공영 회장의 눈에 띄어 1969년 한신공영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맏사위가 됐고, 전무자리에까지 올랐다. 78년 그가 독립해 세운 뉴코아의 본점 건물도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여전히 ‘뉴코아’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주인은 바뀌었다. 외환위기 직후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뉴코아는 지난 2003년 이랜드에 인수됐다. 뉴코아의 상징은 얼룩말이다. 김 전 회장이 42년생으로 말띠기 때문이다.김 전 회장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짧은 기간에 국내 최대의 점포망을 거느린 유통기업을 키워내 업계에서는 ‘수수께끼’로 통했다. 뉴코아의 급성장 비결은 철저한 저가전략에 있었다. 뉴코아의 사훈이 ‘외삼촌 떡도 싸야 산다’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뉴코아 창업에 참여했던 전직 임원은 “처음부터 백화점은 생각도 안 했다”며 “유통단계를 축소해 물가안정에 기여한다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고 전했다. 이 전통은 95년 설립한 킴스클럽으로 이어졌다.뉴코아는 유통업계의 변화를 선도했다. 국내 최초로 24시간 연중무휴 영업을 도입한 곳도 킴스클럽이었다. 뉴코아에서는 학력과 서열을 따지지 않았다. 고졸 출신도 능력만 있으며 점포장에 올랐다. 김 전 회장은 매년 설이면 전국 사업장을 일일이 방문해 계장급 이상 직원에게 ‘떡값 봉투’를 직접 나눠줬다. 급여자동이체 대신 월급을 현금으로 줘 월급날이면 총무부서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97년 뉴코아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전직원이 나서서 260억원을 모금하고, 마지막까지 회사 살리기에 안간힘을 쓴 것도 이런 독특한 조직문화에 기인한다.그러나 뉴코아는 결국 무너졌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김 전 회장에게는 ‘실패한 경영자’라는 멍에가 씌어졌다. 무리한 점포확장,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대출, 독선적인 기업경영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힘차게 바퀴를 굴리던 페달이 한순간에 멈추면서 생긴 결과들이다.김 전 회장은 한때 재기를 시도했다. 뉴코아 계열사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씨마유통(옛 뉴타운산업)과 온라인 쇼핑몰 업체인 비투올네트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씨마유통은 98년 부천에 패션쇼핑몰 ‘씨마1020’의 문을 열었다. 비투올네트도 국내 최초의 인터넷 할인쇼핑몰을 시작으로 B2B 인터넷 도매센터, 홈쇼핑형 인터넷 방송국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하지만 한번 실패한 기업인의 재기는 쉽지 않았다. 김 전 회장의 재기 움직임은 채권자들을 자극했다. 결국 2003년 말 공적자금비리에 연루돼 재수감되는 운명을 맞았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을 ‘부도덕한 기업인’의 대표적 사례로 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 전 회장측은 지금도 재기와 관련해 극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김 전 회장은 2004년 7월 석방 이후 철저한 은둔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전직 임원들은 물론 대학 동기들도 그의 근황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씨마유통과 비투올네트는 등기부상에는 살아 있지만 사실상 활동이 없는 휴면법인 상태다. 씨마유통이 있던 잠원동 상가건물은 부동산개발업체에 인수돼 현대적인 쇼핑센터로 변모했다. 아직도 ‘뉴타운빌딩’으로 불리고 있지만 씨마유통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비투올네트가 입주해 있던 잠원동 인근 사무실도 낯선 젊은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가끔 비투올네트 앞으로 우편물이 올 뿐이라고 했다. 김 전 회장의 주소지로 돼 있는 잠원동 아파트에는 친척만 살고 있었다. 그는 김 전 회장의 근황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었다.김 전 회장은 한때 한배달 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고대사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바로잡기운동을 하는 단체다. 박정학 한배달 대표는 “김 전 회장은 재계 모임에는 일절 나가지 않았지만, 매주 목요일 열리는 한배달 강좌에는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며 “역사의식이 남다른 분이었다”고 전했다. 다행히 그는 김 전 회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은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도 나서기를 사양했다.김 전 회장은 한배달에서 발간하는 잡지를 전국 중고교와 경찰서, 군부대, 교도소에 무료로 보내는 활동을 했다. 어렵게 접촉한 김 전 회장의 측근도 “뉴코아의 기부금 한도를 거의 한배달 지원금으로 채웠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김 전 회장이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언론에 보도된 것에도 불만을 토로했다.그는 “김 전 회장은 항상 사원식당만 이용하던 분이었다”며 “변명의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매도당해 안타깝다”고 했다. 김 전 회장은 80년 뉴코아 설립 후 7년 가까이 강남구와 서초구의 청소원들에게 크리스마스 때마다 양말 3세트씩을 익명으로 기부했다. 그러다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중단했다. 전국의 등대지기들도 빼놓지 않고 위문했다. 김 전 회장의 측근은 “뉴코아의 사보이름이 등대지기였다”며 “칠흑 같이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등대지기처럼 뉴코아가 우리 기업계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항상 말했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은 법적으로는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 이들을 위한 ‘제2의 국립묘지’ 건립을 소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뉴코아가 무너지면서 그의 꿈들도 물거품이 됐다.김 전 회장에게는 그에게 쏟아진 사회적 비난이 가장 큰 상처가 됐다. 한때 이민을 생각할 만큼 감당하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에 나가면서 신앙생활을 통해 안정을 찾았다. 현역에 있을 때는 손대지 않았던 골프도 가끔 즐긴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경영서적을 열심히 찾아 읽으며 여전히 관심의 끊을 놓고 있지 않다. 김 전 회장 측근은 “삼성경제연구소의 리포트를 챙겨보고 있고, IT혁명이나 와이브로, 블루오션 전략에도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이다.하지만 김 전 회장 일가로 범위를 넓히면 ‘재기’ 움직임은 한층 뚜렷하다. 이와 관련, 관심을 끄는 곳은 인터넷 육아·완구용품 쇼핑몰인 마이토이월드와 이유식·베이비푸드 유통업체인 커머스재팬 등 두 곳이다. 경기도 광주시에 본사가 있는 마이토이월드는 한때 업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2002년 모 신문사로부터 업계 최우수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김 전 회장의 딸 김재연씨(34)가 사장을 맡고 있으며, 외동아들인 김태훤씨(32)가 이사로 일하고 있다. 커머스재팬은 일본 이유식 1위 업체인 와코도의 국내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다. 김 전 회장의 사위인 박종채씨(38)가 사장으로 있으며, 부인 김재연씨가 감사를 맡고 있다.김태훤 이사는 “가끔 경영자문을 해주시지만 직접적 관련이 없는 독립회사”라며 “아직은 작은 업체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토이월드와 커머스재팬을 김 전 회장의 재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을 강하게 부인했다.김 전 회장 측근도 “아직은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계시다”며 “아버지로서 자식들의 기업이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는 “김 전 회장은 초기에 잠원동 신반포 단지를 건설하고, 사우디·쿠웨이트 등 해외 건설현장을 누볐고, 80년대 뉴코아를 창업해 재계 25위 유통그룹으로 키웠던 한국경제의 살아 있는 주역”이라며 “재기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풍토가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