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늙고 병들었는데, 곁에 있는 자식은 아직 철이 없다.’ 아버지가 지금 처한 상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나와의 인연은 부자간 이상으로 질겼던 것 같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본 적이 없다. 결혼 후 말이 좋아 부모님을 모시고 살지 아직 결혼 12년차에 곁방살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교 때 몇 번 1, 2등 한 것을 가지고 ‘이 아이는 S대 법대를 가서 재학 중 고시 패스를 할 재목’이라는 최면에 꼬여 일찍 좌절을 경험하며 방황 아닌 방황을 하게 했던 것도 아버지다. 대학에서 전공은 국문학이나 문예창작 쪽을 하고 싶었건만,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아버지는 굳이 법정계열로 원서를 쓰게 하셨다. 비록 전공은 행정학이었으나 국가고시는 이미 고등학교 때 포기했던 터다. 문학에 미련이 남아 학교 교지를 만드는 교지편집실에서 교지를 편집하며 아버지와는 다른 쪽을 보며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있으니,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맞나 보다.아버지가 내 인생에 참견 아닌 참견을 한 것은 진로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가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니었으나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금쪽같던 내 첫사랑과 헤어지는 단초도 아버지에게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저축이라고는 모르고 거듭된 시행착오에다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도 하나도 부끄럽거나 불안하지 않게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 주셨다. 그러다 보니 4남매 중 제일 형편없는 자식이라 품안에 품고 힘닿을 때까지 데리고 살려 했던 아버지의 의도는 여지없이 빗나가고 영원한 열아홉 살 아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2001년 겨울, 내 인생을 사사건건 간섭해 꼬이게 했던 아버지가 ‘림프암’이라는 신종 암에 걸리셨다. 가족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할 만큼 심각한 고비를 몇 번인가 넘기고 난 지금 아버지는 암과 친구가 되었고, 가족들은 암 환자와 친구가 되었다. 난 진실로 아버지의 병이 실감나지 않았고 지금도 실감하고 있지 않다. 언젠가 아버지가 마루에서 쓰러졌을 때 깜짝 놀라 일으켜 세우다가도 슬픈 것이 아니라, ‘아니 이 덩치가 산만한 사람이 왜 쓰러지나’ 싶어서 오히려 웃음이 났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르는 병원에 모셔다 드리면서 ‘숨겨 놓은 돈이 있으면 내 사업에 투자 좀 해 달라’고 졸랐으며, ‘이자 비싸게 무는 대출금 좀 갚게 보증 좀 서 달라’고 괴롭혔다.결국 부탁하는 사람도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도 서로 마음이 상해 한 달 간 말도 하지 않으며 지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정황을 곁에서 지켜본 여동생은 ‘아마도 아버지 돌아가시면 오빠가 제일 많이 울 것’이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부모 자식도 성인이 되면 가끔 봐야 서로 반갑고 귀하고 그런가 보다. 40여 년을 떨어지지 않고 살다 보니 귀한 것이 귀한 줄 모르고, 고마운 것이 고마운 것을 모르며 사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미안한 것이 미안한 것인지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반성도 해본다. 내가 그간 아버지께 했던 유일한 효도는 ‘철부지 저 놈 때문에 눈을 못 감겠다’는 생각으로 오래 사시도록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부자 아버지도 아버지고, 가난한 아버지도 아버지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의 아버지도 아버지고 실패한 사람의 아버지도 아버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나에게 근검과 절약, 용서와 관용, 성실과 인내 등 성공에 관한 모든 덕목을 당신의 삶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미 다 가르쳐 주셨다. 다만 내가 배우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고, 주워 담지 않았을 뿐. 나 역시 평범해 자식을 키워보니 아버지의 속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식 이빨이 썩을 줄 뻔히 알면서도 사탕을 입에 넣어 주는 것이 부모’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무슨 뜻이었을까.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아들이 고맙다.2007년 새해가 밝았다. 나는 아마 올해도 새벽 2~3시쯤 술에 절어서 집에 들어가 ‘너는 언제 사람 될래?’라는 아버지의 걱정을 들으며 그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다.글/ 박종홍1966년 서울 출생. 1993년 출판계에 입문, 거름과 더난 출판사를 거쳐 2003년부터 경제경영 출판사 이코북을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