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부산 경남상고를 졸업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당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 오시다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하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최고 성적 우수 그룹으로 불리는 ‘특대생’으로 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많은 고민 끝에 군인의 길을 걷기로 한다. 강원도 홍천에서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첫딸인 누나를 출산했다. 홍천에서도 신앙심과 금실이 좋기로 소문난 두 분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한때를 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천지가 갈라지는 너무도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1969년 5월 30일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어둠을 밀어내는 이른 아침, 아버지는 눈물로 보채며 떨어지기 싫어하는 세 살배기 딸에게 ‘일찍 오마’라는 약속을 남기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부대로 출근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셨다. 출근 후 4시간 뒤인 12시께, 부대 내 위병소에서 아버지가 카빈 소총을 스스로 자기 가슴에 겨누고 자살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저녁쯤에야 전해졌다. 갓 서른의 어머니와 세 살배기 딸을 남기고 아버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 몸속에서 잉태된 지 5개월째를 맞고 있었다.당시 부대 관계자들은 사건 발생 즉시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현장을 모두 정리하고 6시간 만에 가족에게 통보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군에서 내린 아버지의 사망 원인이다. ‘가정불화에 의한 우울증 자살.’사병도 아닌 장교가 우울증 때문에 세 살 된 딸과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그것도 백주 대낮 부대 내 위병소에서 소총을 이용해 자살했다니, 신혼의 어머니에겐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해 11월 나는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어머니는 군이 발표한 사망 원인으로 인해 내가 어머니 몸속에 있던 중인데도 불구하고 시댁 식구들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겪으셨다. 어머니는 그런 와중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진실 규명을 하고자 뛰어다니셨다. 사건 발생 얼마 후 박정희 대통령 연설 단상에 갓 태어난 나를 안고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뛰어 올라 실신 하신 것을 시작으로 3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국방부와 정부에 수많은 진정과 조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직도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 중인 상태다.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일 뿐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긴 시간을 보내 왔다. 아버지를 그리워할 시간도 없이 아버지 죽음의 진실만을 생각했다. 그 시간 속에 아버지가 있다.아버지를 직접 뵌 적이 딱 한번 있다. 32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를 내가 32세가 되던 해 만났다. 내 고향인 홍천에서 춘천 성당묘지로 아버지를 이장하던 그날 두꺼운 비닐에 싸여진 채 장교 모자와 군화를 신고 있는 뼈만 남은 아버지를 보며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평생을 혼자 사시면서 누나와 나를 대학까지 가르치셨다. 그 곱고 예쁘던 서른한 살 새댁은 올해 70세 할머니로 내 옆에 계시다. 아직도 어머니는 “진실 규명을 못하고 죽으면 내가 어떻게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며 내 손을 잡고 한없이 우시곤 한다.이제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버린 나는 요즘 부쩍 아버지가 그립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 두 딸의 아버지로 살면서 그동안 그리워할 겨를조차 없었던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특별한 성장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무척이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많이 안아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늘 일에 쫓겨 마음만 앞서는 것 같아 내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우리 가족 모두가 같이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자주한다. 늘 사랑하며 가까이서 보듬는 가족이 모든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내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다.글 / 임경환·비플라이소프트 사장뉴스저작권사업 공식 유통사인 비플라이소프트를 경영하고 있다. 온·오프라인 통합 스크랩 기능으로 기존 신문 스크랩 업무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아이서퍼 2.6’은 지난해 정보통신부 선정 ‘신소프트웨어상품 대상’, ‘2006 디지털 이노베이션 대상’ 등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