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취미 챙기며 ‘기록’ 남겨라

‘자식은 더 이상 노후 적금통장이 아니다’라는 말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하는 말이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궁핍과 질병만 면한다면 노년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외로움이다. 이런 점에서 ‘가족이야말로 진정한 노후 대책’이다.현대 가족은 많이 변화했다. 자녀와 노부모 부양, 생계를 같이 하는 경제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기능은 ‘핵가족화’ ‘여성의 경제 활동’ ‘기러기 가족’의 출현 등으로 의미를 잃고 있다. 대신 가족이야말로 ‘험난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인 사람들’,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곳’이라는 정서적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부부, 또는 자녀 역시 타인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가장 오래 함께 생활하고 유전자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나의 인생사와 감정, 기호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타인이다. 이들이 존재하기에 노년기는 덜 외롭고 더 여유롭다.‘가족이야말로 노후 대책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은 노후 준비 또한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인간관계는 피상적이고 찰나지만 가족이야말로 가장 친숙하고 가장 지속적인 관계다.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내 가족이다.우선 건강을 지켜라 = 가족이 함께 하는 밥상은 보약보다 좋다.“당신, 요즘 여윈 것 같아요. 회사일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된다고요? 이번 저녁에는 전복죽을 준비할게요.” 다정한 아내의 말에 P 씨는 금방 기운이 난다. 성장기인 자녀들과 이번 주말에는 삼겹살 파티를 하자고 약속한다.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하루에 최소한 한 번은 가족과 식사하라. 균형 잡힌 식단, 인공 감미료 대신 사랑으로 양념한 맛깔스러운 음식도 좋지만 가족과의 따뜻한 대화, 관심과 격려는 보약 열 첩보다 낫다.고기를 주지 말고 낚시법을 알려주라 = 노후 준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자녀의 사교육비’라고 한다. 대학 입시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기형적 교육 풍토에서 소신을 갖고 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게리 베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자녀에 대한 투자는 수익률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고 말했다. 단위 생산 요소를 투입하면 계속 수익이 올라가는데 일정 지점을 지나면 수익률 증가율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교육비에 따른 효과도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적당한 수준으로 사교육 지출을 조정해야 한다. 사교육을 줄임으로써 얻는 것은 가계의 여유와 함께 아이들에게 스스로 시간을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꼭 가르쳐야 하는 것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부모의 힘으로 대학 교육을 마치고 결혼 자금, 사업 자금까지 얻어 쓰면서 부모의 노후에 관심이 없는 자녀들이 주위에 너무 많다.베풀 줄 아는 부자의 소양을 가르쳐라= 내 주변에서 가장 부러움을 받는 이는 K 씨 가정이다. K 씨는 벤처기업을 창업해 성공했으며 그의 누이 역시 유명 화가로 성공했다. 부러움을 받는 이유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들의 성공을 ‘화목한 가정의 힘’으로 이해한다. 그의 부모는고향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다. 이 가족은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두 남매가 아직 형편이 어려울 때 손자들을 모두 길러주었다. “나는 손자들 보는 게 제일 즐거워. 기운이 없다가도 얘들 발자국 소리만 들으면 힘이 부쩍 나곤 했지. 놀이동산이다, 꽃 구경이다 하면서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노인네들도 많지만, 그건 1년에 몇 번이면 충분하지.”K 씨는 부모가 시골 땅을 판 돈으로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겼다. “돈보다는 신념을 위해 살아라.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도 중요하다. 제대로 투자하고 돈을 좇지 마라.”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베풀 줄 아는 부모에게서 그는 이미 부자의 소양을 배웠다.취미를 유산으로 남겨라 = P 씨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라디오로 들은 FM 방송 덕분이라고 한다.그는 음악이 있어 정년퇴직 후의 시간이 더 좋다고 한다. “성악가가 꿈이셨던 어머니와 함께 어릴 때부터 오페라를 들으면서 흥얼거렸죠.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온 가족이 함께 음악회에 가곤 했습니다. 정말 즐거운 추억이었죠. 어릴 때부터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신 어머니에게 늘 감사합니다.”흔히 은퇴 이후의 시간을 ‘7만 시간의 공포’라고 부른다. 일본의 시니어르네상스클럽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나이 60세에 정년퇴직해 80세까지 산다고 했을 때 자유 시간이 모두 7만 시간이라고 한다.이 시간을 가치 있고 즐겁게 쓸 수 있는 활동을 몇 가지 만들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노후 준비로 취미생활도 빠뜨려서는 안 될 항목이 되는 것이다. 취미를 가짐으로써 노년기에 얻을 수 있는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우선 한 가지 일에 몰입하게 되면 평소 사용치 않았던 뇌의 신경세포를 자극하게 되고 뇌의 회로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 젊은 뇌를 유지시켜 준다. 취미를 발전시켜 전문가 수준에 이르면 그것이 제2의 직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가장 쉬운 것처럼 보이는 취미, 이것이 쉽지 않다. 좋은 취미를 갖는 것도 어렵지만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지에 이르기는 더욱 어렵다.일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정년 이후 빨리 늙는다고 한다. 무엇이든 좋다. 세상에는 2만 가지의 취미 활동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찾고, 이런 활동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배워야 한다. 또 취미 생활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최상일 것이다.가족은 인간관계 학습장이다 = “나는 6남매 가운데 셋째예요. 경쟁적으로 공부하고 집안일을 도왔죠. 또 서로 타협하는 법도 배웠고 인간관계는 ‘기브 앤드 테이크’라는 것도 체득했습니다.”지역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M 할아버지는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이 돼 가는 데다 변화에 적응할 줄 모르는 동료들 사이에서 ‘문제 해결사’로 통한다. “사람은 끝까지 사회성을 잃지 않아야 돼요. 이제는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우대해 주는 세상이 아녜요.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자기 역할을 해야 하고 어른이면 베풀 줄 알아야 하는 거지요.”사람은 그래서 끝까지 가족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 가족이야말로 인간관계를 배우는 장소이기 때문에.‘기록’을 남겨라 =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모르는 점이 세 가지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죽음에 대해 아는 세 가지가 있다. ‘누구나 죽는다, 혼자서 죽는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라고.죽으면서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지만 대신 많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할 사람들은 당연히 가족이다.내가 참석한 예식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례식이 있다. 오랜 입원 생활 끝에 돌아가신 K 할아버지는 세 남매를 두었다. 세 남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를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을 만들기로 했다. 아버지의 옛날 사진, 편지들을 모아 영상 기록을 만들었고 주변 사람들에게서는 녹음을 땄다.어머니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신혼 시절 어렵게 살림을 장만하고 즐거워하시던 이야기를 들었고 친구분들로부터 아버지의 인품에 대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병상에서 자손들에게 남기는 아버지의 육성을 녹음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는 너무 사이가 좋았던 가족이니까, 죽어서도 함께 있자”고 제의해 가족 납골당을 마련하고 그곳에 모셔졌다.자녀들이 만든 비디오테이프는 장례식에서 상영됐고 문상객들은 새삼 돌아가신 분의 인생사와 인품을 되새기며 추모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큰 아들은 “이 비디오 한 편을 통해 아버지가 우리 가족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은 죽어도 자손들을 통해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김동선·웰비즈 대표(‘마흔 살부터 시작해야 할 노후대책 일곱 가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