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별명은 한때 ‘헬리콥터 벤’이었다. 프린스턴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일본의 디플레이션 해법을 묻는 질문에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면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다”고 비유적으로 대답한 데서 유래했다. 지나치게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장기 채권 매입 등을 통해 시중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로 인해 버냉키는 인플레이션보다는 경제 성장에 무게를 두는 낙관론자로 분류됐다.그러나 최근 버냉키의 발언은 예전 별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 경제가 유럽이나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인플레이션에만 주목하는 인상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이런 버냉키의 행보를 두고 ‘헬리콥터에서 매(hawk)로 변신했다’고 표현했다. FRB 내부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제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고 금리 인하에 적극적인 부류를 ‘비둘기파’라 부르고 반대로 물가 상승에 예민하게 대응, 금리 인상 카드를 자주 치켜드는 부류를 ‘매파’라고 분류한다.겉으로 나타난 지표는 버냉키의 판단에 우호적이지 않다. 성장률을 포함한 거시 지표는 당초 기대를 밑돈다. 일부에서는 미국 경제가 경착륙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1분기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전기 대비)은 0.7%에 그쳤다. 2분기 들어 확 좋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올 한 해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FRB조차 미 경제의 흐름이 예상보다 저조하다는 데 동의한다. 최근엔 올해 연간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2.5~3.0%에서 2.25~2.5%로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에 따른 충격도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한 금융 손실이 최대 1000억 달러(약 92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FRB의 추산이다. 일부에서는 서브프라임 문제가 조기에 진화되지 않을 경우 미국의 경제성장률을 1%포인트까지 갉아먹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미국 민간 경제연구소 콘퍼런스보드가 발표한 6월 경기선행지수도 전달보다 0.3% 하락했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의 예상치(0.1% 하락)보다 악화된 것이다. 미국 동부지역의 대표적 경기지표인 필라델피아 제조업지수 역시 7월엔 9.2로 전달(18.0)에 비해 뚝 떨어졌다. 미국 경제의 이런 위축 조짐은 달러화에도 그대로 반영돼 유로화와 엔화 등 세계 주요 통화에 비해 약세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그러나 미국 경제에 대한 버냉키 의장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그는 최근 미 상·하원에서 벌어진 통화정책 관련 청문회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미국 경제 전반에 주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내년에는 잠재성장률 수준의 경제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자리에서 버냉키는 경제 침체에 대한 걱정보다는 인플레이션에 더욱 신경을 쓰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FRB의 주된 정책적 우려사항은 인플레이션”이라며 “인플레이션 위험이 억제됐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분간 금리 인하 조치는 없다는 시그널을 보낸 셈이다. 전형적인 매파(hawkish) 스탠스다.버냉키의 취임 초기 금융시장은 그의 발언에 당황했다. 작년 4월 버냉키 의장이 인플레이션 우려를 표명하자 전 세계 주식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섰다. 채권 시장도 요동을 쳤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금융시장도 버냉키의 화법에 익숙해지는 분위기다.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꾸준히 제기함에 따라 금리를 올리지 않고도 물가를 서서히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FRB는 작년 8월 이후 여덟 번 연속 금리를 동결했다.FRB 의장은 힘이 세다. 미국의 정책금리에 따라 전 세계 자금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FRB 의장은 정치적 입김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임기도 선거로 뽑힌 의원들보다 훨씬 긴 14년이다. ‘세계 경제의 현직 대통령’인 버냉키 의장이 ‘매’로 남을지, 아니면 다시 ‘헬리콥터’로 돌아갈지 금융시장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안재석·한국경제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