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8월 21일 화요일 저녁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옷가게나 카페 앞에서 앙증맞은 스쿠터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것처럼 앞머리에 라이트가 붙은 혼다 줌머와 TV에서 봤음직한 파스텔톤 베스파가 드문드문 눈에 띈다. 조금 떨어진 청담동 캘리포니아 피트니스 앞은 (과장을 좀 보태) 최신 스쿠터 전시장 같다. 스타일리시한 20~30대가 많이 다니는 곳답게 형형색색 스쿠터들이 ‘떼’로 주차돼 있다. 근처 직장이나 집에서 운동하러 오는 이들의 ‘애마’다.#장면2. 대학 3학년생 현주연 씨는 8월 초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스쿠터를 ‘질렀’다. 방학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과 아껴뒀던 돈을 합쳐 120만 원을 투자했다. 비록 중국산이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는 “1주일에 5000원이면 등하교 교통비가 해결된다”면서 “차비와 용돈 아껴서 곧 드레스 업을 해 줄 것”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드레스 업’이란 스쿠터를 마음에 드는 색과 디자인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드레스 업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요즘 날마다 스쿠터 동호회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있다.#장면3. “서울의 웬만한 곳은 30분 안에 도착합니다.” ‘비틀맵’으로 잘 알려진 지오마케팅의 전준호 마케팅팀장(사진 오른쪽)은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영업맨이다. 단정한 양복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커다란 고글이 달린 헬멧을 쓰고 거리를 누빈다. 회사에서 별명은 ‘스쿠터 타는 꽃미남’. 지난 3월 구입한 그의 까만색 스쿠터 몸통에는 눈에 확 띄는 노란색 비틀맵 로고까지 붙어 있다. 움직이는 광고판이 따로 없다. 그는 “맑은 날은 하루 40~50km 정도 뛴다”면서 “기동력 좋고, 주차 쉽고, 경제적이고, 스타일 살고…. 장점이 참 많다”고 예찬론을 폈다. “승용차에서 스쿠터로 바꾼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스쿠터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아침 출근길, 저녁 퇴근길, 휴일 극장 앞에 이르기까지 작고 앙증맞은 오토바이인 스쿠터들이 부쩍 늘었다.사실 스쿠터는 이미지가 좋지 않은 교통수단이었다. 다방, 중국집 배달 차량이란 선입견에다 폭주족, 은행 날치기 등의 친범죄 이미지와도 무관하지 않다.그러나 최근의 스쿠터 열풍은 모든 선입견을 불식시킨다.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세대가 스쿠터를 선호하고 있다. 더구나 여성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띄는 특징이다.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20대, 반바지를 입은 10대들이 스쿠터를 타고 거리를 누비고 있다. 젊은 여성일수록 스쿠터에 열광한다.이는 통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터넷 쇼핑몰 옥션이 2007년 상반기 스쿠터 판매 현황을 조사한 결과 여성 구매 비율이 43%를 기록했다. 2005년 상반기 15%, 2006년 상반기 28%에 이은 뚜렷한 증가세다. 특히 여성 구매자의 86%가 20대 초·중반으로 나타났다. 옥션 모터스 담당인 윤영석 팀장은 “여성들의 관심이 늘면서 스쿠터 제조사들이 발 빠르게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이런 현상은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서울 퇴계로 오토바이 거리에는 요즘 젊은 여성 유동 인구가 부쩍 늘었다. 김일식 스피드프라자 차장은 “기름 냄새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여성 고객들이 매장을 찾기 시작했다”면서 “스쿠터 동호회 모임에 나가 봐도 여성들이 크게 늘었다는 걸 체감한다”고 말했다.상황이 이러니 관련 시장 또한 숨 가쁘게 성장 중이다. 한국모터사이클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국내 오토바이 총판매 대수는 2005년 15만 대, 2006년 16만 대에 이어 올해는 18만~20만 대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스쿠터의 비중은 60% 선인 10만~12만 대. 추정 시장 규모는 1800억 원에 달한다. 이권용 대림자동차 마케팅전략팀 과장은 “지난해부터 오토바이와 스쿠터의 판매 비중이 역전됐다”면서 “당분간 스쿠터 열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 들여온 수입 스쿠터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수입 스쿠터는 2004년 1만1000대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2006년에는 4만 대 규모로 4배 증가했다. 올해 7월까지 수입량은 지난 한 해 총수입량에 육박해 벌써 3만 대를 돌파했다. 업계에서는 올 한 해 수입량이 5만 대를 훌쩍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스쿠터 열풍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어울린 결과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선 패션성. 시장 확대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20대 초·중반 여성들은 다양한 색과 디자인이 적용된 스쿠터를 ‘액세서리’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패션 칼럼니스트인 황의건 오피스에이치 대표는 “50여 년 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스쿠터 베스파를 타고 나와 당시 전 세계 여성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면서 “레트로(복고) 무드와 자유분방한 스트리트 문화가 싹트면서 두루 스쿠터의 인기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쿠터와 스쿠터를 타는 젊은 여성이 하나의 ‘룩(look)’이 되었다는 설명이다.실제로 유통 라인에서 잘 팔리는 스쿠터는 파스텔톤의 복고풍이거나 디자인이 심플한 클래식 스타일이다. 옥션의 최고 인기 제품인 ‘뉴 이탈리안 치노’의 경우 파스텔 색상의 판매량이 월등히 많다. 혼다 줌머와 조커, 야마하 비노, 이탈리아의 베스파 등 고가 라인의 수입산 역시 탁월한 패션성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이와 함께 스쿠터 고유의 장점인 경제성 또한 강력한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스쿠터는 배기량 50cc와 125cc로, 다른 모터사이클 종류에 비해 유류비 부담이 적다. 출퇴근용으로 사용할 경우 1주일에 5000원 정도(50cc 기준)면 충분하다. 1년이라고 해봐야 25만 원선에 불과하다. 승용차 운행에 비해 10분의 1 정도이고, 심지어 대중교통에 비해서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차체가 가볍고 작아 운행이 쉽고 운행이나 소유가 까다롭지 않다는 점도 장점이다. 자동차 면허가 있으면 운행할 수 있고, 50cc 이하는 넘버 등록 의무조차 없다. 여기에 좁은 공간에 자유자재로 주차할 수 있고 하이힐을 신고도 탈 수 있는 편리함을 빼놓을 수 없다.최근에는 인터넷 쇼핑몰 인기상품으로 떠오르면서 가격도 많이 내렸다. 일본과 한국 제품의 디자인을 모방한 중국산의 경우 100만 원 이하 제품이 수두룩하다. 일반적인 가격대는 중국산이 100만 원 안팎, 국산은 200만~250만 원선, 일본산과 이탈리아산은 300만 원 안팎이다.스쿠터의 인기는 각양각색의 독특한 문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 스쿠터가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연예인의 애장 스쿠터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의 주인공 윤은혜가 타고 다니는 낡은 스쿠터는 밝고 꾸밈없는 성격을 표현하는 소품이다. 수퍼주니어의 신동, 영화배우 류승범 등은 아끼는 스쿠터를 공개해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이뿐만 아니라 스쿠터 레이싱이 주목을 받고, 스쿠터와 스타일에 관한 전문지가 창간되기도 했다. 대표적 오토바이 제조업체인 대림자동차는 전용 경기장을 갖추고 ‘스쿠터 레이스’를 수년째 진행하고 있다. 잠실에 있는 전용 경기장에선 9월 2일 올 들어 세 번째 레이스가 펼쳐진다. 전속 레이싱 모델도 있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300~500명의 관중이 모여드는데, 대부분 스쿠터 동호회 활동을 하는 젊은층이다. ST50, 베스B 등 레이싱 클럽도 있다.이에 비하면 동호회와 전문 쇼핑몰 증가세는 당연한 현상에 속한다. 다음 카페만 해도 ‘클래식스쿠터매니아(회원 9만6600명)’, ‘스쿠터드레싱(회원 3만3000명)’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한편, 관련 업체들은 고객 니즈에 들어맞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면서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스쿠터 특수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옥션은 여성 스쿠터족 증가세를 겨냥, 8월 말까지 할인 이벤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최대 20만 원까지 할인혜택을 주고 3개월 무상 애프터서비스도 보장한다. 판매 1위인 ‘뉴 이탈리안 치노’는 79만9000원에 선보인다.스쿠터를 마케팅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도 늘었다. 매일유업과 한국코카콜라는 고객 이벤트의 일환으로 스쿠터를 경품으로 내걸었다. 또 영화관 CGV는 휴대폰 영화 예매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오는 10월 11일까지 휴대폰으로 가장 많이 영화를 예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스쿠터 경품을 제공한다.제조사들의 발걸음도 아주 바빠졌다. 대림자동차는 올 들어서 신모델 4종을 한꺼번에 출시, 공격 경영에 나섰다. 2009년 스쿠터 점유율을 70%까지 끌어올린다는 게 이 회사의 목표다. 이권용 과장은 “하향 일로에 있던 모터사이클 시장이 스쿠터의 인기로 회복세”라고 말하고 “뛰어난 품질력으로 승부하겠다”고 밝혔다.요즘 잘 팔리는 스쿠터는 십중팔구가 중국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의 베스트셀링 스쿠터 톱10은 하나를 빼고 모두 중국산으로 채워져 있다. 실제 수입 스쿠터 중에서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엄청나다. 올 들어 수입된 모터사이클 가운데 중국산은 60% 이상인 3만6000대에 달하고 있다.중국산의 경쟁력은 뭐니 뭐니 해도 싼 가격이다. 국산보다 30~50% 낮은 가격이다 보니 주머니 가벼운 10~20대의 눈길이 먼저 닿을 수밖에 없다. 국산 스쿠터 평균 가격은 200만~250만 원선이지만 중국산은 70만~80만 원대부터 골라잡을 수 있다.여기에 인기 디자인을 그대로 카피해서 만들어 내니 ‘싸고 예쁜 스쿠터’를 찾는 이들로선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제조사들은 일본 혼다, 야마하, 한국 대림자동차, S&T 등의 모델을 거의 그대로 베껴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자동차는 중국산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지만 스쿠터만큼은 한국 거리를 휩쓸고 있는 셈이다. 김일식 스피드프라자 차장은 “100여 개 중국 제조사들이 디자인을 카피해 원조 모델의 절반 이하 값에 팔고 있다”면서 “문제는 애프터서비스(AS) 센터가 없어 고장이라도 나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중국산은 공식 AS센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판매점에서는 AS 지원이 없는 조건으로 가격을 더욱 낮춰 파는 경우도 있다. 이렇다 보니 운행에 있어서도 위험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미 운행 중 정지, 엔진 과열 등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취재 = 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