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국 현지취재 -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의 경제 중심지 알마티의 거리는 ‘세계 자동차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알마티 교통경찰국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급속히 늘어난 차량 수가 2006년 말에 거의 45만 대에 다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도요타의 렉서스,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 BMW 등 내로라하는 럭셔리 카들은 물론 벤틀리, 마히바흐, 람보르기니 등 전 세계 부호들이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명차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실제로 올해 벤츠 S클래스 판매량 세계 1위는 카자흐스탄이 차지했다.현지인 최 블라지미르 씨는 “3년 전부터 교통 체증이 심해져 출퇴근 시간의 이동은 삼가야 할 것”이라며 “도심 내 주차 문제도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관세청에 따르면 자동차 수입 규모가 2006년 한 해에만 전년보다 2배 증가된 총 40여만 대를 기록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거의 2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다.더불어 여성 운전자들도 크게 늘고 있다. 알마티 교통경찰국은 2007년 3월 현재 총 4만6291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2004년보다 2.5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최 블라지미르 씨는 “중산층이 없고 상류층과 서민층의 소득이 양극화된 카자흐스탄에서는 웬만한 ‘브랜드’는 밭 붙이기 힘들다”며 “서민층은 ‘브랜드’ 제품을 살 돈이 없고, 상류층은 서구의 ‘최고 브랜드’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의 말처럼 알마티 시내 쇼핑 중심가는 루이뷔통, 불가리,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가 점령하고 있다.이처럼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고속 경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높아진 생활수준과 강한 구매력은 알마티의 풍경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의 ‘맹주’로 거듭나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얼마 전까지 ‘관심 밖의 나라’였다. 사실 ‘중앙아시아’로 분류되는 5개 공화국들(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모두가 1991년 구소련 해체 후 독립하면서부터야 세계사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윤성욱 LG전자 부장은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던 실크로드의 선상에서마저 이 지역은 그저 거쳐 가는 ‘변방’이었다”며 “원주민인 카자흐스탄인들은 몽골 계통의 유목민으로 추운 스텝지역에서 높은 수준의 생활 문화나 경제 발전을 이룰만한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빈국 카자흐스탄은 옆 나라인 우즈베키스탄에 크게 밀리며 더더욱 세계인들의 눈길에서 벗어나 있었다.하지만 200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은 러시아를 제외한 독립국가연합(CIS) 중 최강국으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현재 1인당 국내총생산(GDP) 및 구매력 기준으로 러시아가 카자흐스탄을 앞서 있지만 5~6년 후 양국 국민의 구매력이 약 1만5000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이후에는 매년 10% 수준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이 러시아를 조금씩 앞서 나갈 것”이라고 전망한다.경제 성장의 가장 큰 비결은 ‘풍부한 지하자원’이다. 유철준 우림건설 부사장은 “카자흐스탄에서는 중학교 화학 시간에 배운 원소주기율표에 나온 모든 광물이 채굴된다”고 말했다. 우라늄 금 은 구리 아연 망간 등도 세계 10위권의 매장량을 갖고 있으며 알루미늄 티타늄 크롬 니켈 등도 엄청나게 묻혀 있다.특히 2000년대 들어 폭등하고 있는 국제 유가가 카자흐스탄의 경제 활성화에 ‘기름을 부었다’. 카자흐스탄의 원유 생산량은 육상 유전의 물량 확대, 카스피해 해상 유전 개발에 따라 계속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1998년 이후 매년 15% 이상 늘어나고 있다. 1일 생산량도 2004년 131만 배럴에서 2010년 230만 배럴로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생산량은 중기적으로 텡기즈 유전(추정 매장량 60억∼90억 배럴) 및 카라차가나크 유전(23억 배럴), 장기적으로는 카스하간 유전(700억 배럴)의 생산 개시로 급증할 전망이다.매장량도 풍부하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원유 자원 매장량을 세계 7위 수준으로 산정하고 있으며 LA 타임스는 미국 추정매장량의 5배에 달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인 신문사인 아리랑신문 정상원 대표는 “말 그대로 ‘땅 파면 돈이 나오는 나라’다”라며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 없는 한국인으로선 부럽기만 할 따름”이라고 말했다.15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개혁 개방 정책의 성공도 한몫하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는 “일당 체제는 개발의 필수 조건이자 다양성의 산실”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의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현지인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이었다.현지 신문사인 고려일보 최 디나라 부주필은 “러시아 등과는 달리 밤거리를 혼자 거닐어도 별 문제가 없을 만큼 주변 국가에 비해 치안 상황도 좋은 편”이라며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개혁 개방 정책으로 가난한 카자흐스탄을 국민소득 5000달러대로 끌어올린 것은 대통령의 ‘공’이 크다”고 말했다.러시아, 우크라이나와 함께 CIS 경제를 주도하는 ‘빅3’으로 평가되던 우즈베키스탄이 폐쇄 경제를 고수하면서 국민소득이 카자흐스탄의 10분의 1 수준인 496달러(2006년 말 기준)로 추락한 것과는 대조적이다.카자흐스탄 정부는 독립 당시부터 경제 분야의 개혁 개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왔다. 이를 위해 외환 거래 자율화, 수입 관세 단계적 인하, 외국인 과실 송금 보장 등 그 당시로서는 단행하기 어려운 개방 정책을 과감히 단행했다.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추진하고 있을 정도로 관세 제도도 잘 정비돼 있다. 중앙아시아 5개국에 유입된 외국인 투자액의 80%가 이곳으로 몰리는 이유다.이와 함께 각종 사회 갈등도 매우 적다. 130만 명으로 구성된 1500만 명의 인구 중 50%가 카자흐스탄인이지만 인종이나 민족 간 갈등이 거의 없다. 또 이슬람 그리스정교 기독교 등으로 다양한 종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종교에 대해 터치를 하지 않는 편이다. 한 현지 국내 기업인은 “갇힌 공간에서 아옹다옹 살아가는 농경민족의 치열함이 아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버리면 그만’인 유목민들의 넉넉함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놨다.얼마 전 한 국내 일간지에는 이례적으로 ‘국가 광고’가 게재돼 눈길을 끌었다. 주한 카자흐스탄 대사관이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제62차 유엔 총회 본희의 기조연설 내용과 카자흐스탄의 휴양지 켄데를리 관광 프로젝트 등 국가 소개를 2면에 걸쳐 전면 광고로 낸 것.이미 카자흐스탄에서는 꽤 많은 한국 기업들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동일 우림 성원 등 건설과 국민은행 한화증권 등 금융, LG상사 삼성물산 등 자원 개발 등 카자흐스탄을 지탱하는 이른바 ‘3대 산업’ 모두에서 ‘한류’를 전파하고 있는 중이다. 에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최근 음악회, 차관회의 등 양국 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는 중이다.높은 경제성장률과 정치적 안정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다. 카자흐스탄의 국민 1인당 외국인 투자액은 세계 1위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는 1999년 18억 달러에서 2004년 40억 달러, 2005년 64억 달러, 2006년 104억 달러로 급증했다. 일부에서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과 함께 카자흐스탄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한 또 다른 ‘브릭스(BRICKS)’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다.특히 중국의 애정 공세는 매우 뜨겁다. 지난 2005년 중국석유공사(페트로차이나)의 모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는 캐나다 회사 소유의 ‘페트로카자흐스탄’을 42억 달러에 인수하며 포문을 열었다. 중국의 국제신탁투자공사(CITIC)도 지난해 말 캐나다 소재 에너지 기업인 ‘네이션스 에너지’가 카자흐스탄에 보유한 석유 자산을 19억 달러에 인수했다. 최근에는 송유관 연장과 관련,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을 통해 기존 송유관을 700km 이상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또 이들 정상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카자흐스탄 영토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가스관 건설에도 합의했다.이 밖에 미국과 러시아 등도 카자흐스탄과의 자원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5월 카자흐스탄 외무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카자흐스탄의 최대 외국인 직접 투자국이며 일본이 2위, 영국이 3위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이 지역의 맹주인 러시아는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순방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에너지 자원에 대한 영향력 강화에 힘을 기울이는 중이다.지난 11월 초 카자흐스탄 정부는 외국 에너지 회사가 계약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도록 ‘지하자원법’을 개정했다. 또 이 법에는 계약 당사자인 외국 회사가 사업이 중단될 정도의 심각한 장애물을 시기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했을 때도 정부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게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최근 들어 카자흐스탄이 ‘먹을 게 없는’ 레드오션으로 전락했다는 기업들의 ‘불평’이 들려오고 있다. ‘금융 위기설’이 심심치 않게 돌면서 카자흐스탄 투자에 나섰던 국내 기업들이 사업을 ‘스톱’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내용은 이렇다. 카자흐스탄 역시 성장 과정에서 급증하는 대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해외 차입에 의존했다. 카자흐스탄 은행들의 해외 차입은 올 6월 말 460억 달러로 3년 반 새 무려 6배나 늘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등으로 인한 세계 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이 같은 차입금이 부담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카자흐스탄의 신용부도 스와프(CDS: 부도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드는 일종의 보험) 프리미엄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카자흐스탄 정부와 주요 은행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기와 비슷한 모습이다.하지만 현지의 전문가들과 한국 기업들은 ‘금융 위기설’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금융 위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뿐 상황이 더 악화될 리는 만무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내년 봄 정도면 충분히 해소 가능하다는 게 요지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조달 금리가 폭등한데가 사실상 대출이 중단됐다”며 “하지만 이는 국제적 금융 위기의 여파보다는 이를 활용한 정부의 국가 구조조정 단계로 파악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최 블라디슬라브 카자흐스탄 중소기업연합회 이사도 “국가가 석유 기금으로 대출금리 안정화에 나섰고 자원 보유국으로서 유동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유동성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주한카자흐스탄 대사관 관계자는 “최근의 신용 경색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의 미래는 매우 밝다”면서 “고유가의 지속, 원유 생산량 및 수출 능력 확대, 강력한 국내 소비의 뒷받침, 지속적인 정치적 안정, 정부의 효과적·효율적 거시경제 운영, 시장 경제로의 경제 개혁 추진 등 여러 요인들이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수긍하게 하는 요인들”이라고 강조했다.현재 카자흐스탄이 겪고 있는 성장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10여 년 전의 한국과는 달리 ‘땅 파면 나오는 돈’을 부럽도록 많이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인들이 국내에서의 ‘떠들썩함’과는 달리 최근의 신용 경색을 차분하게 맞이하고 있는 이유다. 10만 명에 달하는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파워’는 CIS 국가 중에서도 돋보인다.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는 카자흐스탄 최대 전자제품 유통 업체 술팍의 안드레이 박 사장을 꼽을 수 있다. 이 회사는 현재 카자흐 가전시장의 35%를 주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만 3억 달러(약 2700억 원)가 넘는 매출을 올렸다. 또 다른 대형 전자제품 유통 업체인 ‘플라넷타 엘렉트로니키(사장 바체슬라프 김)’와 ‘테흐노돔 플러스(사장 에두아르트 김)’도 고려인 회사다. “카자흐 전자제품 시장은 고려인이 점령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세계 10위의 구리 채광·제련 업체로 시가총액만 100억 달러를 웃도는 ‘카작무스’의 블라디미르 김 회장도 빼놓을 수 없다. 김 회장은 2006년 영국 선데이 타임스가 선정한 ‘영국 최고 갑부 명단’ 34위에 오른 세계적 부자다. 개인 재산만 14억3700만 파운드(약 2조6000억 원)에 이른다. 그는 카자흐스탄 정부가 1990년대 중반부터 삼성물산에 위탁 경영을 맡겼던 카작무스를 2004년 삼성물산 현지 지사장이던 차용규 씨와 함께 인수해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소련 붕괴 이후 오일과 자원 달러를 바탕으로 고속 경제 성장을 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주요 기업인 가운데는 30~50대의 고려인이 상당수를 차지한다.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최근 정치 분야로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올 8월 중순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유리 최(59) 고려인협회 회장이 6년 임기의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대형 건설회사 ‘악아울’ 대표인 빅토르 최(50)는 4년 임기의 하원의원에 선출됐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