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배용태 성미정 부부

서울 강남 가로수 길에는 ‘마이 페이버릿’이라는 컬렉션 숍이 있다. 이곳은 장난감, 그림책, 디자인 서적 같은 것을 파는, 개성 있는 물건을 찾아 헤매는 어른들을 위한 잡화상이다. 이 독특한 가게를 통해 취향과 생계를 동시에 해결하고 있는 배용태 성미정 부부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시인들이다.강남구 신사동 가로수 길에는 평일 오전부터 각종 잡지와 인터넷 쇼핑몰 관계자들이 화보 촬영을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그리고 점심 무렵 문을 여는 몇몇 레스토랑들 외에는 아직 덜 깨어난 거리에 장난감 가게 하나가 일찍부터 문을 연다. 한글로는 ‘내가 좋아하는’ 정도의 뜻인 ‘마이 페이버릿(My favorite)’이라는 가게다.“우리가 문을 연 3년 전에는 가로수 길이 이렇지 않았어요. 이미 사람들이 많이 알고 찾던 홍대 앞이나 삼청동보다 월세도 훨씬 쌌고요. 당시에는 액자 가게가 몇 군데 있는 정도였습니다.”최신 유행을 이끄는 거리에서 ‘마이 페이버릿’을 운영하고 있는 배용태 성미정 부부는 가로수 길에서도 특이한 존재다. 좁은 바닥에 아는 이가 없다 보니, 남편은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고 아내는 일본에서 몇 년 살다 왔다더라 하는 소문까지 났다. 취향은 독특한데, 연줄은 없는 사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정도다.부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닌, 등단한 시인들이다. 1994년 남편 배용태 씨는 ‘현대사상’으로, 아내 성미정 씨는 ‘현대시학’으로 데뷔했다. 아내가 남편보다 네 살 위로, 부부는 시인들의 모임에서 동료로 만났다고 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누나와 동생, 그쯤 되는 두 사람이 결국 결혼까지 했다.“시는 별로였어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요. 사람은 참 담백했어요. 여분의 말과 행동이 없는 사람이랄까요. 혹해서라기보다 책을 이야기하면서 서서히 친해졌어요.”아내는 웃으면서 남편의 시보다는 군더더기 없는 남편의 성품이 좋았다고 한다. 이제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시가 더 이상 쓰이지 않아서 그만두었고,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등의 시로 유명한 아내는 계속해서 시를 쓰고 있다.애당초 두 사람의 시 스타일은 많이 달랐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만큼은 비슷했다. 10년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림 인형 책 도자기 장난감 등 빈티지 제품들을 구경하러 다니고 함께 모으면서 두 사람의 취향은 더욱 비슷해졌다. 그들은 비싼 옷과 좋은 집 대신 마음에 드는 좋은 물건을 사고, 서로의 그런 생각과 수집벽을 인정할 수 있는 부부로 살아 왔다. 부부가 국내외 여행이라도 떠날 때면 벼룩시장이나 골동품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작은 가게를 하면서 올해 일곱 살 난 아이까지 세 식구 먹고 살 정도의 양식을 벌고, 가끔 여행도 다닌다니까 잘 모르는 이들은 우리가 엄청나게 부유하다고 생각하더라고요.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도 듣고 살고요. 우리가 이 일을 위해 남들보다 포기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은 봐 주지 않는 거죠. 실상은 3년 동안 겨우 겨우 장사를 배우면서 세 번 정도는 크게 망할 뻔도 했었지요.”이익과는 무관하게 부부의 취향대로 모은 물건을 파는 가게에는 아톰, 마징가Z 같은 장남감이 즐비하고, 책을 열면 입체 그림이 튀어나오는 팝업북과 볼 만한 이미지가 가득 찬 외국 서적이 쌓여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접하게 된 장난감과 나중에 읽게 된 동화책이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과물이다.“책 읽기를 좋아해서 웬만한 소설은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동화책 읽는 재미를 뒤늦게 알았어요. 길이가 짧고 좋은 일러스트가 있는 동화가 소설보다 더 풍부한 상상력을 줍니다. 그저 애들만 읽는 책이라고 치부하기는 아까웠어요.”처음 ‘마이 페이버릿’을 찾은 사람들은 아이를 둔 부모들이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원한 것은 학습 테이프가 붙어 있는 영어 동화책이나 중국산의 값싼 장난감이었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스위스 원목 장난감과 색채가 아름답고 공들인 일러스트를 담은 책들은, 그것들이 자극하는 창의력과 상상력과는 무관하게 시장에서 ‘교육적이지 않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곧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주인 부부의 불안감을 타개해 준 것은 책의 아름다움을 알고 장난감을 수집하는 어른들이었다.“손님들이 어른들을 위한 제품에 열광했어요. 한때는 광고마다 우리 가게에서 사 간 책이 등장하거나, 책에서 모방한 시각 이미지들이 넘쳐났지요. 문예사조만 알던 시인들이었지만 사진과 디자인 쪽으로도 공부를 했죠. 이제는 디자이너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즐겨 찾는 가게가 되었습니다.”부부는 가게에 놓을 책들을 미리 읽어보고, 어떤 이미지가 실려 있는지 하나하나 점검한다. 장난감 역시 구입 단가가 비싸더라도 오리지널 제품들만 고집한다. 그래서 부부가 소장하고 있는 물건들은 거의 오래된 제품들이다. 1930~80년대 만들어진 팝업북, 1960년대의 인형, 1970년대 이전의 로봇이 그 예다. 이렇게 부부가 기울이는 애정과 수고로움이 ‘마이 페이버릿’의 유일한 장사 밑천이다.부부는 올해 ‘앨리스설탕’이라는 필명으로 공저 ‘나는 팝업북에 탐닉한다(갤리온, 2008)’를 냈다. 앨리스는 성미정, 설탕은 배용태를 이르는 말이다. 로버트 사부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팝업북에서 시작되는 책은 부부가 가게에서 사진을 찍고 밤마다 글을 써가며 의견 교환을 거친 후 완성됐다. 책이 다루고 있는 팝업북의 세계 역시 그림이 튀어나오는 책 한 권이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뭐, 어른들이 그런 데다 돈을 써’라며 손사래를 칠 어른들과는 관계없는 별세계다. 이 책은 둘이 함께 미쳐있는 물건들에 대해 펴낼 많은 책들의 서막에 불과하다.‘마이 페이버릿’은 몇 년 후쯤에 문을 닫을 생각이다. 부부끼리 약속한 유럽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다. 아내 성미정 씨는 더 채우기 위해서 좀 쉬고 포기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소중한 보물창고를 잃게 되는 손님들이야 아쉽겠지만 부부의 여행 이야기 또한 책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성미정 씨가 쓰는 시 외에 부부가 함께할 에세이들을 한창 구상 중이다.“시도 장사도 팔리지 않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시기에 따라 얼마 만큼 원하는 정도가 있는데, 지나치게 앞서거나 뒤처져서는 안 되나 봐요. 그 동안 거대 자본 속에 내팽개쳐진 상태에서 자본과 무관한 희한한 가게를 해왔잖아요. 팔리지 않는 물건들에 대한 고찰도 책에 담고 싶습니다.”부부는 자신들이 공저한 책에 김종삼 시인의 ‘드뷔시 산장’의 한 구절을 인용해 놓았다. “결정짓기 어려웠던 구멍가게 하나를 내어 놓았다/(한 푼어치도 팔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오늘도 지나가는 것은 분명 차 한 대밖에/.” 구멍가게에 ‘드뷔시 산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계를 연명했던 시인과 좋아하는 물건을 팔아 세 식구 살림을 꾸리는 시인 부부가 겹쳐온다.배용태(오른쪽) 1971년 출생. 한광대 국문과 졸업. 1994년 ‘현대사상’ 등단. ‘마이 페이버릿’ 운영 중. ‘나는 팝업북에 탐닉한다’ 공저.성미정 1967년 출생. 강원대 사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상상 한 상자’.김희연·객원기자 foolf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