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늪으로 빠지는 경제

일본의 간판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자동차는 올 들어 11월 말까지 3000명의 비정규직 사원을 해고했다. 앞으로도 파견 사원의 계약 기간 연장을 중단하는 방법 등으로 연내에 추가로 3000명을 감원할 예정이다. 최대 시장인 북미 지역의 판매 부진으로 일본 내 자동차 생산을 당초 계획보다 40만 대나 감산했기 때문이다. 고급 차종 렉서스의 주력 공장인 다하라 공장에선 내년부터 주간·야간 2교대를 주간 근무만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 중이다.닛산자동차도 일본 내 공장의 감산 규모를 확대해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 7만2000대를 추가 감산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닛산의 감산 규모는 14만7000대에 달하게 됐다. 총 감산 규모는 당초 금년 국내 생산 계획인 138만8000대의 10%를 웃도는 것이다. 닛산은 추가 감산에 따라 비정규직 감원 폭도 지난달 발표했던 1000명에서 1500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닛산은 글로벌 경기 후퇴에 따라 지난 9월부터 유럽·미국 지역 수출용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생산하는 규슈 공장과 북미 지역용 고급차 ‘인피니티’를 생산하는 도치키 공장에서 총 7만5000대를 감산하고 있다.세계 경기 둔화의 여파에도 끄떡없을 것 같던 일본의 제조업도 흔들리고 있다. 일본 제조업의 대표 주자인 자동차 업계에선 요즘 감원 등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고 있다. 도요타 등 자동차 8개사는 연내에만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9000명의 직원을 감축할 계획이다. 덴소 등 자동차 부품 업체의 인적 구조조정도 불가피해 자동차 산업 전체로는 올해 감원 규모가 1만 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제조업이 흔들리면서 일본 경제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예외 없이 침체 국면에 진입했다. 일본 내각부가 최근 발표한 올해 3분기(7~9월) 실질 경제성장률은 연율로 마이너스 0.4%를 나타냈다. 지난 2분기 마이너스 3.7% 성장을 한 뒤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나타낸 것이다.일본 경제가 분기 기준으로 연속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은 미국의 정보기술(IT) 거품 붕괴 영향으로 2001년 2분기부터 4분기까지 3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약 7년 만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률이 2분기 연속 감소하면 ‘경기 침체’에 빠진 것으로 본다.3분기의 마이너스 성장은 미국발 금융 위기 확산에 따른 세계경기 후퇴로 기업들의 설비 투자가 큰 폭으로 줄어든 게 결정적이었다. 설비 투자는 전 분기 대비 1.7% 감소했다. 개인 소비와 수출도 각각 0.3%와 0.7% 증가하는 데 그쳤다.전문가들은 일본의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시라카와 히로미치 크레디트스위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일본 경제는 글로벌 경기에 민감하게 연동돼 있다”며 “글로벌 경제가 침체되는 한 일본은 깊은 경기 후퇴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실제 일본 경제의 앞에는 악재투성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금융 위기 영향으로 내년 중 미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의 수출이 올해보다 더 줄어들 것이란 얘기다. 또 자동차 업계가 감원을 본격화하는 등 고용 상황도 나빠지고 있다. 고용 악화는 개인 소비의 위축으로 내수 침체를 더욱 가속화한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 정부는 내년 중 마이너스 성장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요사노 가오루 경제담당상은 정부의 내년 경제 전망과 관련,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플러스 성장이 된다는 자신은 현시점에서 거의 없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내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란 점을 사실상 시인한 셈이다.사실 민간 이코노미스트들 사이에서도 내년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IMF도 일본의 성장률을 마이너스로 예상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매년 12월 예산 편성의 기초가 되는 경제성장률 전망치 등을 포함해 경제전망치를 확정한다. 과거의 경우 2002년 실질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제로(0)로 잡은 적은 있다. 하지만 이번처럼 마이너스 성장 전망치를 제시하기는 처음이다.문제는 7년 만에 찾아온 경기 침체를 돌파할 만한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소비 진작용으로 전 국민에게 1인당 1만2000엔(약 16만 원)씩을 나눠주는 특단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 중이지만 효과는 불투명하다.그냥 쓰라고 돈을 나눠 준다지만 적지 않은 국민들은 “국민 세금을 그렇게 낭비해도 되느냐”며 시큰둥해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기 진작에 실효성이 없다”며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전 국민에게 돈을 나눠 주려면 시간과 인력이 엄청나게 필요하다”며 볼멘소리다.현금 지급 논란 때문에 일본 정부가 발표한 다른 경기 부양책들도 그 의미가 퇴색하는 분위기다. 일본 정부로선 내심 가장 인기를 끌 것으로 여기며 내놓았던 ‘현금 지급’이 오히려 애물단지 경기 대책이 돼 버린 셈이다.일본 정부는 세계 금융 혼란으로 인한 국내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지난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다. 두 대책에 일본 정부가 직접 지출하는 재정은 7조 엔(약 94조 원)이지만 내수 부양 효과는 32조 엔에 달할 전망이다.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에서 민간 소비를 부추기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책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2조 엔의 현금을 가구별로 나눠준다는 것. 일본 정부는 당초 2조 엔 규모의 소득세·주민세 감세를 검토했다. 그러나 더욱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소비를 유발하기 위해 감세 대신 일반 가구를 대상으로 한 현금 지급으로 방향을 틀었다.현금은 1인당 1만2000엔씩 나눠주되 18세 미만 어린이나 청소년과 65세 이상 고령자에 대해선 2만 엔씩을 지급할 예정이다. 18세 미만 자녀 2명을 둔 부부의 경우 총 6만4000엔(약 86만 원)을 받게 되는 셈이다.이렇게 정부가 ‘공돈’을 나눠준다지만 거리 시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무덤덤하다. 도쿄 시내 신바시에서 만난 30대 회사원 가토 야스에 씨는 “가계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경기 활성화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며 “그러면서 나중에 소비세를 올리겠다고 하는 것은 반갑지 않다”고 말했다. 치바현에 사는 여성 회사원인 사토 게이코(48) 씨는 “1만2000엔이면 밥값 밖에 더 되느냐”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중화요리점 종업원인 마츠모토 토모시(51) 씨는 “이 돈을 지급하기 위해서 들어갈 경비가 아깝다. 그러면서 소비세 인상을 거론하니 점점 더 정치를 믿기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도쿄 다이토구에서 의류점을 경영하는 야마시타 노부오(63) 씨도 “현금을 나눠주면 소비로 이어지지 않고 퍼주기로 끝날 뿐”이라고 주장했다.국민들의 반응이 차가운 건 바로 9년 전에도 비슷한 정책을 썼지만 재정만 축내고 내수 부양 효과는 없었다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거품 경제 붕괴 후 ‘10년 불황’의 터널을 지나던 일본은 1999년 ‘지역진흥권’이란 상품권 7000억 엔어치를 전 국민에거 나눠 준 적이 있다.그러나 당시 나눠준 상품권 중 32% 정도만 실제 소비에 쓰이고 나머지는 현금화돼 저축된 것으로 분석됐다. 소비 진작 효과가 기대에 훨씬 못미쳤다. 오히려 상품권을 찍어 나눠주는 데 들어간 행정비용 415억 엔만 헛되게 낭비했다는 비판이 거셌다.이번 경우도 경기 부양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전문 기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미즈호종합연구소는 이번 현금 지급 정책도 소비로 이어지는 것은 30%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측했다. 일본 국내총생산(GDP) 기여도는 0.1~0.2%에 불과하다는 분석이다. 세계 동시 불황의 와중에 일본 경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