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생존법②

한승원 소설 ‘다산 1, 2’정약용 저·박석무 옮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18년 6개월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된 다산 정약용은 조정의 적들이 언제 사약을 내려 보낼지 모르는 극도의 정서적 불안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한승원의 소설 ‘다산(랜덤하우스 펴냄)’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어여쁜 저 아가씨와 함께 노래 부르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함께 말을 하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함께 얘기하고 싶어라.뜻밖에도 다산은 근엄한 학자에 어울리지 않게 동문 밖의 아가씨들을 노래한 ‘시경’의 ‘동문 밖의 연못(東門之池)’이라는 시를 떠올린 것이다. ‘시경’은 공자가 당시 회자되던 시들을 엮은 것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서였다. 다산 역시 ‘시경’의 시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여기서 빅터 프랭클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한 장면과 오버랩된다. “수용소에서 배고픔 곤욕 공포 불의에 대한 강한 분노 등을 참고 견디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의 소중한 모습이다.” 여기서 ‘수용소’를 ‘유배지’로 바꾸면 다산이 처한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어디서인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거나 보리밭 언덕길에 먼지바람이 일어나면, 사약을 가진 금부도사가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하고 놀라곤 했다.”다산은 유배지에 도착하면서 사약이 내려올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다산은 극도로 약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동문 밖의 연못’이라는 시를 암송하고 또 암송했다. 그렇지 않으면 프랭클이 말한 ‘정서적 자멸’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왜 하필 ‘시경’의 ‘동문 밖의 연못’이었을까. 다산은 부부 관계마저 예절로 포장해야 했던 유교사회였기에 선비들이 애송한 ‘시경’의 시를 끌어들여 사랑하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삭막한 삶을 위안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사랑하는 여인은 고향에 두고 온 홍씨 부인일 것이다. 홍씨 부인은 긴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 딸 혜련의 혼례를 앞두고 빛바랜 붉은 치마를 깨끗하게 빨고 다리미질해 보냈다. 다산은 그 치마를 보고 얼마나 애잔했을까.한승원은 다산이 말한 여인은 곧 삶의 열정이자 사업에 다름 아니라고 묘사한다. 그에게 있어 글은 사업이고, 그 사업에 대한 열정은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았다.= 그가 사랑해야 할 어여쁜 아가씨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함께 있었다. 책을 쓰는 일이 그 어여쁜 아가씨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기였다. 어여쁜 여인을 사랑하듯이 열정적으로 사업을 하지 않고 어떻게 그것(글쓰기)을 이룰 수 있는가.정서적 자멸 상태에 처한 다산을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은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였고 글쓰기였다. 당시 다산은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닌 ‘비삶’의 상태였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리면서 위안을 구하고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극적으로 생의 에너지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다산의 글쓰기는 한 권의 작은 책자에서 시작됐다. 유배 길에 오를 때 다산은 짐 속에 성호 이익(다산의 역할모델)이 모아놓은 속담집과 몇 권의 책을 가져왔다. 먼저 그는 성호의 책 속에 들어 있는 속담을 정리하고 보충하며 책 한 권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또 ‘삼창고훈’을 고찰하고 해석하는 책을 썼고 문득 속담이 생각나면 속담집에 첨가했다. 조선의 예절에 대한 글도 한 편씩 써 나갔다. 이렇게 해서 유배지에서 보낸 첫 해인 1801년에만 ‘속담집’과 ‘소학보전’ ‘이아술’ ‘기해방례변’ ‘상례외편’ 등 무려 6권의 책을 펴낼 수 있었다.= 선비의 사업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잉잉거리면서 꽃을 찾아가서 꿀과 꽃가루를 머금어다가 통 속에 저장하고 애벌레를 먹여 키우는 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어여쁜 아가씨와 사랑에 깊이 빠지듯이, 책 저술하는 사업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가자, 금방 날이 저물고 밤이 짧았고 배고픔과 추위도 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사약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다산은 이렇게 시작해 무려 500권의 책을 펴낼 수 있었다. 정적들에 의해 대역죄인이 된 다산은 ‘죽은 목숨’과 다름없었지만 이를 극적으로 타개했다. 이런 점에서 다산이야말로 요즘 회자되는 ‘자기 경영’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에게서는 조직(권력)에서 추방당하고서도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운 ‘1인 기업가’의 모습도 발견된다.다산은 100통에 이르는 편지를 두 아들에게 보내면서 자녀 교육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산이 쓴 편지글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비 펴냄)’를 보면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오직 독서만이 살 길이다’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해 들려줬다.= 오직 독서만이 살 길이다. 의원이 삼대를 계속해 오지 않았으면 그가 주는 약을 먹지 않는 것같이 반드시 몇 대를 내려가면서 글을 하는 집안이라야 문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하듯, 머릿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뚫어보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다.다산은 항상 책을 읽을 때에는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적어 두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게 바로 책을 읽으면서 메모하는 습관이다. 이게 바로 ‘생산적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메모한 것을 내용별로 분류해 엮으면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이다.= 중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다.다산이 두 아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또한 요즘처럼 경제 위기 시대에 더욱 울림이 큰 경구가 아닐는지. 위기에 봉착할 때 흔히 자포자기에 빠져 삶을 놓아 버리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럴수록 더욱 필요한 게 바로 독서라고 다산은 강조하는 것이다.다산이 두 아들에게 일러준 ‘선비의 양계법’은 퍽 인상적이다. 그는 아들에게 “선비의 양계와 소인의 양계의 차이는 닭을 치면서 경험하는 지혜와 실상을 담아 책으로 만들어 후세 사람들에게 그 지혜와 정보를 전하는데 있다”고 들려준다. 선비가 벼슬을 못하고 양계를 하더라도 글을 써 양계법의 지혜를 전하면 그게 세상과 소통하는 ‘선비의 양계법’이라고 강조한다.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포지셔닝’할 수 있는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양계를 하면서 닭의 상태를 매일 관찰하고 기록해 책을 쓰라는 선비의 양계법은 우리 시대의 직장인들이 한번쯤 시도해 볼만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천하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는데, 그 하나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진리냐 아니냐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을 하면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 하는 기준이다.다산은 두 아들에게 인간관계와 처세의 기본이 되는 큰 기준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이어 진리의 네 가지 등급을 들려준다. 제일 상위의 등급은 진리를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고, 둘째 등급은 진리를 지키면서 해를 입는 경우다. 셋째 등급은 진리 아닌 것을 추종하면서 이익을 얻는 경우이고,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등급은 진리 아닌 것을 추종하면서 해를 입는 것이다.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진리를 지키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익을 얻는 최상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평생 진리 아닌 것을 추구하면서도 해를 입고 있다면 그 얼마나 가련한 삶이겠는가.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