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재건(名家再建) 의지 다지는 기업들

아픔을 극복하고 새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귀감이 되어야 할 일이지만, 오히려 기업들은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기업은 “재혼해서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이혼 경력을 들춰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느냐”며 에둘러 표현했다. 그만큼 과거의 위기는 ‘과거’일 뿐이라는 것이다.가장 주목받는 곳은 팬택계열이다. 창업자 박병엽 부회장의 상징성 때문이다. 서른 살 때인 1991년 33㎡(10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4000만 원으로 무선호출기 회사를 설립했고 이 회사가 연평균 50% 성장을 지속해 매출액 2조 원대의 휴대전화 제조 회사로 일군 인물이기 때문이다. 박 부회장은 1980년대 이후 제조 기업을 직접 설립해 재벌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로 ‘샐러리맨의 신화’로 추앙받기도 했다. 박 부회장은 기업개선작업 후 사재를 털어 팬택 살리기에 매달렸고 짧은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기업개선작업(구 워크아웃)’을 마무리해 가고 있다.팬택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2005~2006년 모토로라의 레이저폰 위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2006년 한 해에만 4000억 원의 적자를 냈다. 결국 2006년 11월 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당시 한시법이던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의 효력이 연장되지 않아 채권단 100%의 동의를 받아야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박 부회장은 자신의 지분을 모두 내놓기로 하고 채권단을 설득했다.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버블이 붕괴될 때도 고속 성장했고 기술력을 갖춘 팬택계열이었지만 대기업 계열도 아니고 기댈 구석이 없다 보니 채권단의 신용 축소, 채권 회수가 이어지며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박 부회장이 발 벗고 나서 지방까지 가서 채권단을 설득한 끝에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촉법이 아닌 자력으로 채권단을 설득했기 때문에 팬택 측은 ‘워크아웃’이 아닌 ‘기업개선작업’으로 표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2007년 6월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은 20 대 1, 30 대 1의 감자를 실시해 박 부회장의 지분은 거의 소멸됐고 채무는 출자 전환됐다. 수익성이 낮은 해외 소매시장은 철수하고 기업용 납품에 집중했다. 시장 상황도 점차 개선되고 히트 폰들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상황은 점차 개선됐다. 기업개선작업이 정식으로 시작된 2007년 4월 이후 2009년 3분기까지 9분기 연속 영업이익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올해 11월 27일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의 합병을 승인하는 임시 주주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 부회장은 “올해 휴대전화 전체 판매량은 1000만 대, 매출액은 2조2000억 원, 영업이익은 1300억 원가량이 예상된다. 내년(2010년)에는 스마트폰을 전체 라인업 중 3분의 1 정도로 늘려 1500만 대 이상을 판매해 매출액 3조 원을 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0년에 국내외 30종의 신제품을 출시하고 이들 중 10종 이상을 스마트폰으로 가져간다는 전략이다. 팬택계열은 합병이 성사될 경우 시너지효과를 통해 2013년 매출 5조 원의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잡고 있다.재상장 준비도 한창이다. 기업개선작업은 2011년 12월까지로 예정돼 있다. 박 부회장은 “2012년까지 재상장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될 것”이라며 “2013년 이후 시장 상황에 맞춰 상장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불모지나 마찬가지인 국내 의료 기기 산업의 총아로 떠올랐던 메디슨도 2011년 5월 재상장을 목표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최근에 산부인과에서 태아 초음파 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과거 흑백의 초음파가 아닌 3차원 영상으로 아이의 얼굴이 사진으로 찍히는 것에 놀라워했을 것이다. 산부인과 외에도 내과 외과 등에서 심장을 비롯한 내장의 기초 진단에 초음파 진단 기기가 쓰인다.메디슨은 1985년 설립된 이후 1991년 제1회 벤처기업대상 수상, 1996년 거래소 상장 첫 벤처기업, 1998년 세계 최초 3D 초음파 진단 기기 개발 등 국내 벤처 업계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회사다. 수출 비중이 80%인 메디슨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오히려 환율 효과 덕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2000년 무렵 메디슨은 주식시장에서 황제주로 떠올랐다.당시 테헤란로가 시작되는 지점(삼성동 997의 3)에 있던 메디슨 사옥도 벤처의 상징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창업자 이민화 회장은 ‘벤처 업계의 대부’로 불리며 벤처기업협회 1~3기 회장을 하며 정부와 벤처 업계의 가교 역할을 했다.이 회장은 ‘벤처 연방제’를 주창하며 상장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분사에 분사를 거듭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이 회장은 한글과컴퓨터(한컴) 살리기 운동에 나섰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인수 시도에 맞서 한국 벤처의 상징인 한컴을 지키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 벤처 거품이 빠지면서 한컴의 주가가 하락하자 메디슨의 담보자산가액이 줄면서 채권단이 채권 회수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결국 사옥을 매각하는 등 자구 노력을 기울였지만 2002년 1월 최종 부도를 맞았고 4월에 상장폐지됐다.2002년 3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메디슨은 주력 사업인 초음파 진단 기기 외의 사업을 정리하고 자구 노력을 통해 2006년 6월 법정관리를 종결했다. 이 회장은 부도와 함께 사임해 현재 중소기업청 기업호민관을 맡고 있다. 메디슨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바뀌어 지금은 대주주인 칸서스파트너스의 손원길 대표이사가 메디슨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메디슨은 올해 10월 12일 헬스케어 토털 솔루션 업체인 메디슨헬스케어 출범식을 통해 재도약의 의지를 밝혔다. 현재 브라질 및 러시아 시장에서 2위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메디슨은 2012년 매출 5억 달러, 영업이익률 30%를 목표로 하고 있다. 2008년 매출액 2299억 원, 영업이익 441억 원으로 전성기인 2000년 2074억 원, 62억 원을 뛰어넘는 수치다.현재 영업이익률이 19%로 경쟁사의 15%보다 높은 수치이지만 2012년 3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또 제품 개발 주기를 경쟁사의 25개월보다 앞당긴 18개월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1년 5월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상장까지 계획하고 있다. 메디슨은 전 세계에 12개 법인과 100여 개의 세일즈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며 초음파 시장점유율 8%로 제너럴일렉트릭(GE)·지멘스·필립스·도시바에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다.한국 PC(personal computer) 산업의 역사로 불리는 삼보컴퓨터도 재기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삼보컴퓨터는 1980년 7월 청계천의 한 사무실에서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이용태 명예회장 등 7명이 공동 창업한 뒤 국내 첫 PC인 ‘SE 8001’을 개발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1984년에는 컴퓨터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소를 만들었고 국내 IT 벤처기업 중 원조 격으로 전경련 멤버로도 참여할 만큼 입지전적인 기업이었다.이후 삼보는 엡손과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공급 계약 등을 통해 사세를 확장하며 1989년 액면가의 500%인 주당 3만 원에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국내 컴퓨터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함께 양강 체제를 구축할 정도로 주목받는 업체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나래이동통신을 설립해 무선호출 시장에 진출해 SK텔레콤의 무선호출 사업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 밖에 창투사 인수, 벤처 투자 등을 통해 수많은 계열사들을 일궈가며 ‘삼보왕국’을 꿈꾸기 시작했다. 자회사만 해도 나래이동통신·솔빛·아이네트 등 수십여 개에 이르렀다.그러나 ‘삐삐’ 사업에 이어 ‘씨티폰’이 휴대전화의 출현과 함께 몰락하며 곧바로 IMF 외환위기가 시작됐고 삼보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8년 초 심각한 부도 위기를 맞는 등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미국에 저가 컴퓨터 업체 이머신즈와 국내에 초고속 인터넷 업체 두루넷을 설립하는 승부수를 띄웠다.1999년 12월 두루넷은 미국 나스닥에 직상장했고 이듬해인 2000년 3월에는 이머신즈도 나스닥에 입성했다. 그러나 나래이동통신·두루넷 등 자회사들의 사업이 연달아 실패하고 PC 시장 역시 포화 상태에 접어들며 다시 피어오르던 삼보의 불꽃도 다시 사그라졌다.이후 삼보컴퓨터는 3~4년 동안 부침을 거듭하며 회생을 위해 노력을 거듭했지만 결국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PC 산업은 한때 첨단 IT의 총아로 부상했었지만 2000년대 들어 단순 조립 생산으로 전락했고 낮아진 진입 장벽은 업체들의 제살 깎기 식 저가 경쟁으로 이어졌다. 2005년 4월 중견 PC 업체인 현주컴퓨터의 최종 부도에 이어 5월 삼보컴퓨터는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뒤이어 상장폐지되는 아픔을 겪었다. 창립자인 이용태 회장의 장남인 이홍순 부회장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위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이후 1000여 명의 직원 중 4분의 3인 750여 명이 5~6개월 만에 회사를 떠났지만 남은 직원들은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나마 되살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매출액이 수직 하락했지만 저가 PC를 앞세워 눈앞의 위기만 돌파하려고 하지 않고 2006년 초미니 PC인 ‘리틀루온’ ‘리틀루온 플러스’ ‘루온 크리스털’을 내놓으며 고급화로 승부수를 걸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2005년 2위에서 2007년 4위까지 떨어진 PC 시장 순위가 2008년 3위로 올라갔다. 데스크톱 PC는 2위에 올랐다. 시장점유율은 2007년 2분기 9%대에서 2008년 4분기 12.5%로 상승했다. 영업이익도 2005년 2597억 원 적자에서 2008년 44억 원 적자로 크게 줄었다. 2009년 말엔 5100억 원 매출에 240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2003년 이후 6년 만의 영업 흑자 전환을 기대하고 있다.삼보컴퓨터의 성공 비결 역시 팬택계열과 마찬가지로 ‘선택과 집중’이다. 비주력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으며 PC 렌털 사업과 같은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2009년 1분기 PC 판매량은 15만 대로 전년 동기보다 11% 늘었다. PC 렌털 실적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일체형 PC ‘루온’은 미국 가전 유통 업체 베스트바이·월마트 등의 온라인 몰에서 애플 아이맥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주홍글씨는 잊어주세요.” 신원은 이미 2003년 당시 성공적으로 법정관리를 종료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이미 어려움을 극복한 지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부도났던 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는 반응이다.신원은 창업주 박성철 회장이 1973년 직물 편직기 7대와 직원 13명 갖고 시작한 기업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승승장구했던 대기업으로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인 1997년 계열사 16개, 해외 계열사 8개 등 총매출 2조 원을 기록하며 재계 순위 31위까지 올랐다.그러나 IMF 외환위기는 고속 성장하는 와중에 내실을 미처 다지지 못했던 신원그룹을 워크아웃이라는 구렁텅이로 몰아세웠다. 1억5000만 달러가 넘는 외화 부채를 안고 있던 신원은 환율 상승과 이자율 급등이라는 이중고를 넘지 못하고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세간에서는 신원그룹이 재기하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연이어 쏟아졌다.박 회장은 자신이 갖고 있던 회사 지분을 모두 내놓았다. 지금은 오너가 아니라 전문 경영인으로서 신원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쟁력이 없는 브랜드도 버렸다. 당시 13개나 되던 브랜드 가운데 5개만 남았다. 16개나 되던 계열사도 현재는 (주)신원 하나만 남았다. 대전CATV와 한밭CATV 신원텔레콤과 골프장, 명동 빌딩도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2100명이나 되던 직원 가운데 1200명이 나가고 900여 명만 남았다.이런 선택과 집중을 통해 신원은 워크아웃 3년 만인 2001년부터 이익을 내기 시작해 2003년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신원이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건 2005년 개성공단에 진출하면서다. 이어 2007년 개성에 제2, 3공장을 연이어 준공했다. 신원의 개성 공장 월평균 생산량은 6만 피스로 늘어 남북경협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2009년 코리안리그 야구 경기에서 기아타이거즈가 11년 만에 우승하면서 타이거즈 팬들에게 남다른 감회를 안겨줬다. 과거 해태타이거즈 시절 1998년 우승을 끝으로 2000년 구단의 주인이 바뀌면서 그동안 우승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야구단과는 멀어졌지만 해태제과는 타이거즈의 우승과 함께 재상장의 꿈을 꾸고 있다.해태제과(현 해태제과식품)는 1997년 11월 외환위기와 함께 부도를 낸 후 채권단의 출자 전환에 이어 2001년 7월 외국계 UBS컨소시엄에 매각됐다. 법정관리 이전의 옛 해태제과에는 제과 외에 건설·중공업 등 다른 사업부문들도 있었는데 2001년 제과부문만 떼어내 자산 매각 방식으로 팔렸다. 나머지 건설·중공업 등 사업 부문은 ‘하이콘테크’라는 별도 법인으로 분리돼 현재도 청산 절차를 밟았다.부실 사업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한 해태제과는 제과와 아이스크림 등 핵심 사업에 역량을 집중했다. 2003년 당시 6월 결산 법인이던 해태제과는 2003년 회계연도(2003년 7월~2004년 6월)에 매출 6355억 원, 영업이익 660억 원을 기록하는 등 내수 불황에도 대규모 순이익을 기록해 3년 연속 흑자 경영을 이뤘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04년 10월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를 인수하게 된다. 이에 따라 크라운제과·해태제과는 오리온을 제치고 롯데제과에 이어 제과 업계 2위로 올라섰다.해태제과는 지난해 재상장을 추진했지만 멜라민 파동과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며 상장이 무산된 바 있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시초가가 낮게 형성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 재상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기업은 사라졌지만 브랜드가 부활한 경우도 있다. 프로스펙스로 유명했던 국제상사는 2007년 1월 E1에 인수된 뒤 사명을 LS네트웍스로 바꾼 뒤 제조업에서 브랜드 기업(생산은 외주 업체를 이용하고 브랜드만 가진 회사)으로 거듭났다. LS네트웍스는 기존 국제상사의 생산 라인을 모두 외주화하고 도요타 강북 딜러, BMW모터스, KTM(오토바이 제조업체)을 통해 자동차·오토바이를 판매하고 있고 기능성 스포츠화 ‘스케쳐스’와 아웃도어 브랜드인 ‘몽벨’, ‘잭울프스킨’을 수입·판매하고 있다.특히 2008년 성장 칩이 든 기능성 운동화 ‘GH플러스’, 2009년 스포츠 워킹화 ‘W’가 성공을 거두면서 중가 브랜드였던 프로스펙스가 고가 브랜드로 도약하고 있다. 프로스펙스는 2009년 전년 대비 신발 부문 80% 이상의 매출 증가를 보이고 있다. LS네트웍스에 따르면 프로스펙스 W를 통해 커지기 시작한 기능성 워킹화 시장은 2500억 원대로 추정된다. 프로스펙스 브랜드의 성공 역시 중저가 제품만으로는 중국 제품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해 고급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 성공한 것이다.한동안 재기를 꿈꾸며 절치부심하던 동아건설은 외우내환으로 날개가 한풀 꺾인 상태다. 부동산 개발 업체인 프라임산업에 인수된 이후 금융 위기를 맞은 데다 분양 시장이 하락세를 맞으면서 주택 사업은 전국에서 서울 원효로의 주상복합 한 곳만 건설 중이다. 1년 반 동안 수주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면서 도급 순위도 2008년 말 89위에서 2009년 상반기 102위로 하락했다.그러나 4대강 정비 사업을 비롯한 도로·토목 중심의 공공부문 수주액은 2800억 원으로 나쁘지 않은 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 자금부장이 회사 돈 1900억 원을 횡령해 탕진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내부 분위기도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이다. 2010년 이후 주택 사업이 잘될 경우 1조 원까지 수주액이 늘어날 것으로 동아건설은 기대하고 있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