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땅에 부는 기업가 정신 바람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근교에 올여름 완공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캠퍼스가 있다. 5성급 호텔까지 갖출 이 캠퍼스에 투입된 자금만 2억5000만 달러에 이른다.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 캠퍼스다.

지난해 9월 학위과정을 시작한 이 학교 학생들은 현재 모스크바 시내 켐핀스키 호텔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루벤 바르다니안(41) 총장은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불어넣어 민간경제를 활성화하는 시발점이 될 곳”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제자문위원 자격으로 최근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코리아 2010’ 행사 참석차 방한한 그를 만나 이머징 마켓 전문가 양성에 특화한 세계 첫 경영대학원 모델에 대한 실험 이야기를 들었다.

◇ 부와 권력이 손잡고 미래 인재 양성 = 바르다니안 총장은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은 러시아에서 성공한 부자들과 대통령이 함께 아이디어를 공유해 만든 합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2007년 캠퍼스 기공식에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참석했을 만큼 설립 초기부터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그 덕분에 관료주의가 만연한 러시아에서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학교 설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첫 풀타임 MBA 학생 입학식에 모습을 나타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2008년 러시아 최고 지도자에 오르면서 다른 직위를 모두 버렸지만 부총리 시절 맡은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의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은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경영대학원 ‘탄생’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에는 기초과학에 강한 유명한 전통적인 대학들은 있지만 경영대학원은 없었다”며 “러시아에 진정 필요한 교육 모델”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자원에 의존한 경제구조를 지속 성장 가능한 구조로 개편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를 양성시키는 곳이라는 데 러시아 국가 지도자와 러시아 최고 부자들이 공감했다는 설명이다.

바르다니안 총장은 정보화가 산업화를 대체한 21세기에는 인재가 주요 자산이 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90%는 대학 졸업 후 정부 기관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며 이 같은 정신 상태를 바꿔 기업가 정신을 불어 넣는 게 스콜코보 경영대학원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 대학원 졸업생들의 창업을 돕기 위한 벤처 기금 1억 달러도 이미 조성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이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모델이지만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사한 경영대학원이 생기리를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은 정부가 주겠다는 지원금도 마다하고 100% 민간 자본으로 설립됐다. 설립 자금만 5억 달러에 이른다. 9개의 국내외 기업과 9명의 러시아 기업인 및 금융가가 자금을 기꺼이 댔다. 22세에 만든 금융회사 트로이카 디알로그를 러시아 최대 투자은행으로 키운 바르다니안 총장이 일일이 기업인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트로이카 디알로그의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한 그가 평소 쌓은 신뢰가 설득의 힘이 됐다. 첼시 구단주로 유명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6헥타르에 이르는 부지를 선뜻 내주고 러시아 최대 철강 업체인 에브라즈그룹의 알렉산더 아브라모프 회장도 거금을 냈다. BP와 크레디트스위스 등 외국 기업도 참가했다.

러시아 억만장자들은 돈을 내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입학 사정에도 직접 참여한다. 바르다니안 총장은 “세계 그 어느 나라 대학도 설립자들이 직접 인터뷰하며 입학생을 뽑는 곳은 없을 것”이라며 “그만큼 인재를 절실히 바라는 설립자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설립자와의 인터뷰가 당락을 좌우한다. 장학금 지원 여부도 여기서 결정된다. 설립자에 마음에 들면 장학금을 기꺼이 내준다.

지난해 풀타임 학생 40명 가운데 6명이 혜택을 받았다. 억만장자 설립자들은 멘토로 나서기도 한다. 학생들은 러시아 최고 기업인을 멘토로 두며 기업가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 이머징 마켓 전문가 양성 특화 첫 경영대학원 = 2006년 단기 교육과정으로 시작한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은 지난해 E-MBA와 풀타임 MBA를 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바르다니안 총장은 이 대학원을 “모든 것을 제로에서 시작한 실험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경영대학원 ‘탄생’
이머징 마켓 전문가를 길러내는데 특화한 세계 첫 경영대학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머징 마켓이 세계경제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지만 이머징 마켓을 잘 아는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하는 학교는 없다”는 게 설립 배경이다.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이머징 마켓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식 경제를 지탱해 온 앵글로색슨 모델이 무너지면서 세계에는 하나의 완벽한 성공 모델이 있다는 환상이 깨졌으며 각 지역에 특화한 성공 모델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바르다니안 총장이 이머징 마켓 연구소를 만든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이다. 박승호 전 삼성경제연구소 베이징소장이 이끌고 있는 이 연구소는 매달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를 중심으로 한 이머징 마켓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더욱이 수익만 좇는 서구식 모델은 과도한 레버리지로 이어져 위험을 키웠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동양의 이머징 마켓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윤리와 수익 추구의 균형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는 게 바르다니안 총장의 설명이다. 게다가 금융 위기 이후 이머징 마켓이 경기 회복을 주도하면서 이머징 마켓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 이머징 마켓 인재의 수요는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중국과 인도에도 좋은 경영대학원이 있지만 자국의 기업 사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은 국제적인 시각을 가진 전문가를 길러낼 것”이라고 차별화를 강조했다. 캠퍼스 건물을 전통적인 소비에트 스타일과 전혀 다른 디자인으로 설계한 것도 새로운 혁신을 추구하는 대학원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국제화를 지향하는 것도 이 대학원의 특징이다. 지난해 첫 입학생 40명 가운데 35%가 핀란드·호주·중국·인도·독일·브라질 등에서 온 외국인 학생들로 향후 입학생 120명 가운데 절반을 외국 학생으로 채울 예정이다. 모든 강의는 영어로 진행되며 강사진도 80%가 외국인이다. 바르다니안 총장은 “러시아 학교가 아니라 중국과 인도에도 거점을 둔 국제학교”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젊은이들에 글로벌 마인드를 심어주는 동시에 러시아와 외국인 간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3개월만 강의실에 있는 현장 중시 교육 = 이 대학원의 교육과정은 철저히 현장 중시를 추구하고 있다. 풀타임 MBA 학생은 16개월의 교육과정을 이수한다. 이 가운데 첫 3개월만 강의실에서 교육을 받고 나머지 기간은 현장으로 나간다.

러시아·중국·인도의 기업과 정부기관 등을 돌며 현장 경험을 하는 것이다. 각국의 독특한 창업 과정도 직접 체험한다. 다른 MBA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거나 대역을 통해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을 하면서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키우게 된다.

지난해 입학한 학생들은 오는 3월 말부터 5월까지 중국의 레노버 상하이미디어그룹 등 중국의 기업과 정부기관을 돌 뒤 타타 ICICI은행 등에서 일하기 위해 인도로 간다. 바르다니안 총장은 “이머징 마켓은 선진 경제에 비해 관료제가 심하고 인맥 등의 중요성이 크다”며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출신인 그는 “이머징 마켓을 배우기 위해 미국이나 영국을 가는 건 난센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학생은 아직 한 명도 없지만 이머징 마켓 진출을 꿈꾸는 젊은이라면 도전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볼코프 공동 학장은 “조직에서 승진 사다리를 잘 타는 사람을 훈련하는 곳이 아니고 기업가를 길러내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 대학원의 국제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는 “이제 막 세계경제에 들어간 러시아는 세계가 제공하는 이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며 “스콜코보 모스크바 경영대학원이 러시아를 세계와 연결할 인재를 길러낼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광진 한국경제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