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도 꿋꿋한 교토 기업의 비밀

교토 기업을 벤치마킹하려는 한국 기업들이 최근 크게 늘고 있다. 교토 기업은 교세라·호리바제작소·옴론·일본전산·닌텐도·무라타제작소 등 교토에서 창업해 독특한 경영 방식과 기업 문화로 세계적 기업이 된 회사들이다.

전통적 일본식 기업과 달리 카리스마 오너가 특화된 기술 개발과 혁신적 경영을 진두지휘하며 세계시장을 제패한 게 특징이다. 소위 ‘교토식 경영’이다. 그동안 도요타자동차 등만 벤치마킹하던 한국 기업들이 이제 교토 기업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LG도 “교토식 경영을 배우자”
“한국 기업의 일본 연수는 원래 도요타가 90% 이상을 차지했다. 도요타엔 한국에서만 연간 1만 명 안팎의 연수단이 찾았다. 그러나 리콜(회수 후 무상 수리) 사태 이후 도요타 연수는 급감했다.

반면 교토 기업을 찾는 기업이 늘었다. 올 들어 3월까지 30여 개사 연수단이 교토 기업을 방문했다.”(일본 기업연수 기획사 관계자)

실제 대표적 교토 기업인 호리바제작소엔 지난 4월에만 10여 개 팀 100여 명의 한국 기업 연수단이 방문했다. 지난 3월엔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과 사장단 20여 명이 다녀간 뒤 계열사 임직원들이 잇따라 찾아오고 있다. 삼성전자 연수단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자과정 기업인들도 다녀갔다.

한국 기업이 교토 기업에 빠져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1990년대 초 일본의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장기 불황에도 꿋꿋이 고속 성장을 지속해 온 비결이 첫 번째 이유다. “교토 기업은 특화된 기술과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경영 방식으로 세계시장에서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한다.

경기 변동에 구애 받지 않는 구조적 경쟁력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도 평균 매출이 2배로 늘고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8~18%를 유지했다.”(스에마스 지히로 교토대 경영관리대학원 교수)

일본 기업답지 않은 혁신성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컨설팅사인 KPEC의 정광렬 대표는 “기업의 경쟁력은 이제 품질이나 비용 등 기본 요소를 뛰어넘어 창의적 아이디어나 콘텐츠 디자인 같은 매력 요소에 좌우된다”며 “그런 점에서 교토 기업으로부터 배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교토식 경영’을 하고 있는 교토 기업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 카리스마 오너 경영 = 교토 시내 중심가 시조(四條)에는 ‘교토경제구락부’란 회원제 살롱이 있다.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 등 교토의 오너 경영자들이 만든 사교장이다. 교토의 오너 경영자 20여 명은 최근까지 30년 동안 ‘쇼와카이(正和會)’란 친목회를 열어 왔다. 매달 한 번씩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결속도 다지는 모임이다.

이런 사적 모임이 활발한 건 교토에 유독 오너 경영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옴론·호리바제작소·무라타제작소·일본전산 등은 창업자나 2세가 직접 경영하고 있다. 교세라·닌텐도·니치콘은 창업자 오너가 은퇴했지만 여전히 회사 경영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파나소닉·소니·히타치 등 도쿄 기업에서 오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대비된다.

“교토 기업은 오너 경영을 하기 때문에 리스크(위험)를 감수한 과감한 투자 결정이 가능하다. 의사결정도 신속하다. 세계적 기술을 갖고도 일본 전자 업체들이 한국의 삼성 등에 뒤지는 건 지나치게 신중한 판단과 느린 의사결정 때문인데, 교토 기업엔 그런 폐해가 없다.”(마쓰시게 가즈미 교토대 벤처비즈니스랩 교수)

오너들이 대개 기술자 출신으로 카리스마가 강하다는 것도 특징이다. 호리바제작소의 호리바 마사오 창업자가 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엉뚱하게’란 사훈을 고집한 것이나, 일본전산의 나가모리 시게노부 사장이 삼류대 출신과 다른 회사에서 떨어진 낙오자를 뽑아 일류대 출신이 가득한 경쟁사를 이긴 것은 카리스마 경영의 상징이다.

◇ 세계 최고 특화 기술 = 교토 기업들이 제각각 세계 1등 기술을 자랑하는 것도 유사점이다. 호리바제작소는 배기가스 계측기 세계시장의 80%, 일본전산은 HDD스핀들모터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무라타제작소는 휴대전화의 핵심인 세라믹 필터의 세계 수요 중 80%를 공급한다. 옴론은 전철역의 무인 개찰기와 현금자동지급기를 각각 1967년과 1971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시마즈제작소는 평사원 다나카 고이치 씨가 2002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바탕엔 교토의 전통 기술이 숨어 있다. 1200년 역사의 교토는 전통 공예 기술의 보고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지정한 전통 공예품만 청수요(淸水燒) 등 17개 품목이 있다. 교토엔 이들 공예품을 만드는 기업만 2814개사에 달한다.

시마즈제작소와 호리바의 박막·도금 기술은 미세한 표면 처리를 하는 전통 불단(佛檀) 기술이 기초다. 청수요의 흙 배합 기술이나 데이터는 교세라와 무라타제작소의 파인 세라믹을 탄생시켰다.

대학이란 인프라도 뒷받침됐다. 교토 시내엔 40여 개 대학이 있다. 대학생 인구는 전체의 10%로 도쿄의 6%, 오사카의 2%를 크게 웃돈다. 전국 1위다. 특히 교토대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이다.

무라타제작소의 무라타 야스타카 회장은 “전기 절연 소자를 사업화할 때 교토대 재료공학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며 “그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 회사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삼성·LG도 “교토식 경영을 배우자”
◇ 끈끈한 클러스터 형성 =
1973년 창업한 일본전산은 사업 초기 자금난에 빠진 적이 있다. 이때 일본전산을 구해준 건 교토의 선배 기업들이었다. 옴론·와코루·교토은행 등 교토경제동우회의 회원사가 1972년 만든 벤처캐피털 ‘교토엔터프라이즈 디벨롭먼트(KED)’가 일본전산에 500만 엔을 지원했다. 당시 일본전산의 지원을 주도했던 옴론은 주력인 자동화기기를 위해선 정밀 모터를 개발하는 일본전산과 공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일본전산은 하드디스크 모터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나가모리 사장은 “당시 옴론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본전산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가모리 사장은 그때 받은 은혜를 교토의 후배 벤처기업을 적극 육성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다.

교토 기업끼리는 제품 발주나 자금 대여 등도 활발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칩 부품 업체인 무라타제작소의 오늘을 만든 데는 시마즈제작소의 공이 컸다. 시마즈는 무라타의 창업 초기부터 제품을 집중 발주했다.

무라타는 시마즈에 최고 품질의 제품을 공급했다. 서로 세계 제일의 기술 기업으로 크는 데 힘을 보탠 것이다. 두 회사는 지금까지도 끈끈한 거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교토 중심 반골 정신 = 교토는 일본에서도 자존심이 가장 강한 도시다. 과거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다는 자부심이 살아 있다. 교토 사람들은 아직도 일본의 정신적·문화적 중심이 교토라고 주장한다. ‘교토 중화주의’란 말도 있다. ‘도쿄 촌놈’이란 말을 쓰는 유일한 곳이 교토다.

이런 정신이 기업들엔 강인한 생존력으로 승화됐다. 도쿄 기업들에 절대 지지 않겠다는 근성이 교토 기업 특유의 경쟁력으로 작용한 것. 다른 기업이 만들지 않는, 남보다 한발 앞선 기술과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한 것도 그래서다. 도쿄 기업들의 ‘일본식 경영’과 다른 자신들만의 독특한 경영 방식을 창조해 낸 이유이기도 하다. 일종의 ‘반골 정신’이다.

교토 기업의 해외 매출 비중이 대부분 절반을 넘는 것도 같은 배경이다. 국내시장은 도쿄 기업들이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로 눈을 돌렸다. 외국에서 먼저 인정을 받고 국내로 역진출한 게 교세라·무라타제작소 등의 성공 스토리다.

차병석 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