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유대 상인’…도전 정신 ‘무장’

세계 원저우(溫州) 상인 대회가 열린 2월 초 원저우시 인민대회당. 천더룽(陳德榮) 원저우 서기는 “원저우 상인이 유대인 은행을 인수한 것은 금융가의 기질을 타고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춘핑그룹이 작년 말 미국의 애틀랜틱뱅크오브아메리카를 인수한 것을 두고 한 얘기다.

지난해 고리 사채를 쓴 원저우 기업인의 자살과 야반도주가 잇따르면서 원저우 상인의 몰락론까지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 민간 자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은행을 인수한 춘핑그룹의 창업자 린춘핑(林春平) 회장이 걸어온 길은 원저우 상인이 왜 강한지 짐작하게 한다.

인수 대금은 6000만 달러에 불과하지만 중국 언론들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인수·합병(M&A) 사례라고 전한다. 85년 역사의 애틀랜틱뱅크오브아메리카는 미 델라웨어 주에 본사가 있으며 총자산은 20억 달러에 달한다. 중국 언론들은 최소 6~7개의 원저우 기업들이 해외 금융회사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라며 춘핑그룹이 모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한다.



맨 앞에서 도전한다

원저우 사람을 중국의 유대 상인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창업가적 기질 때문이다. 우스갯소리 한 토막. 화성인이 탄 우주선이 중국에 불시착했다. 구경하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먼저 베이징 사람이 물었다. “인류와 혈연관계가 있나요.” 각지 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당신들을 전시회에 출품시켜 표를 팔고 싶은데(상하이 사람)”, “당신 몸의 어느 부위를 먹을 수 있나요(광둥 사람)”. “당신들 사는 곳에도 할 만한 사업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모두 돌아보자 원저우 사람이 서 있었다.

16세 때 부친을 따라 광시좡족자치구로 간 린춘핑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 구이린의 백화점에서 단추를 파는 아르바이트로 1만 위안 이상을 모았다. 고교 교사의 월급이 300위안이던 때다. 광시좡족자치구 출신인 백화점의 총경리(CEO)는 어린 소년이 사업 얘기를 하는 걸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중국이 전세기 운항 사업을 민간에 개방하자 곧바로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이나, 금융 위기로 미국 은행들이 매물로 쏟아져 나왔을 때 인수를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것도 공격적인 도전 정신 때문이다.

린춘핑은 미국 은행 인수가 궁극적으로 중국에서 은행 사업을 하기 위해서라고 얘기한다. 원자바오 총리가 금융 산업에서의 민간 자본 진입 문턱을 낮추겠다고 역설하고 있는 데서 사업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민성은행이 대표적인 민간 은행으로, 나머지는 대부분 사실상 국영이다.



고난에 좌절하지 않는다

‘낮에는 사장이지만 밤에는 그냥 바닥에서 잔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저우 기업인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린춘핑의 첫 번째 위기는 광시좡족자치구의 난닝에서 시작한 전세기 운항 사업에서 왔다. 최악일 때는 하루 3명의 승객만 전세기에 태우고 운항하는 저조한 실적이 이어졌다. 전세기를 한 번 띄우는데 드는 비용은 20만 위안 정도. 창업 1년도 안 돼 2000만 위안 이상 빚을 지는 난관에 봉착한 이유다.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퇴로도 보이지 않았다”고 회고한 그는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가죽 제품을 중개무역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상처를 받았다고 주저앉은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도전으로 이를 극복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성실성을 인정한 채권단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기는커녕 오히려 싱가포르에서 공부할 학자금까지 대줬다.


글로벌 인맥이 자산

원저우 상인은 세계 어디를 가도 막강한 인맥 네트워크로 사업을 확대한다. 부동산 투자를 할 때도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주택을 구매할 만큼 인맥을 중시한다. 린춘핑이 싱가포르에서 경영대학원(MBA) 석사학위를 받은 것도 인맥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글로벌 인맥 구축을 위한 행보였다.

거기서 그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아들을 동창으로 사귀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부(富)를 일구게 된 출발점이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을 알게 됐고 그 덕분에 3000달러를 달랑 들고 간 가나에서 의류 판매로 큰돈을 벌어 그동안 진 빚을 갚고 큰 목돈을 쥐게 됐다. 당시 중국에서 10위안 하는 의류를 가나에서 10달러에 팔 수 있었다고 린춘핑은 회고했다.

이렇게 재기해 번 자금을 밑천으로 2001년 가나에서 50만 달러에 구리와 금이 나오는 광산을 인수했다. 이 광산은 지금 매년 200만 달러의 수익을 내는 효자가 됐다. 2007년에도 인맥을 통한 신사업 기회를 얻게 된다. 유엔 산하의 식량농업기구(FAO) 관계자를 통해 글로벌 곡물 전쟁이 벌어질 것을 감지하게 된 것.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프리카 및 유럽에 진출한 원저우 상인들과 함께 헤이룽장성에 1000만 달러를 투자해 쌀 생산 기지를 세운 것. 2009년엔 일본에서 연간 6만 톤 생산 규모의 쌀 가공 생산 설비를 가져와 저장성에 구축한다. 린춘핑은 유엔 FAO의 고문 역할도 맡고 있다.



돌을 만나면 돌아가는 물처럼 적응

린춘핑이 미국 은행을 인수하는 협상은 3년간 진행됐다. 린춘핑은 금융 위기 이후 미국에서 파산한 은행 가운데 40곳을 추려 냈고 그중 애틀랜틱뱅크오브아메리카를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애틀랜틱뱅크오브아메리카 관계자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이 소유한 중국 기업이 인수하려고 한다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는 게 린춘핑의 설명이다. 더욱이 은행 측은 매각 가격으로 6억 달러를 제시했다. 린춘핑은 포기하지 않았다.

2010년 1억 달러를 투자해 버진아일랜드에 춘핑국제금융지주회사를 만들었다. 2011년엔 미국에 1억 달러를 투자해 재단을 설립했다. 이 두 회사를 통해 애틀랜틱뱅크오브아메리카 인수에 나선 것이다. 경영진 가운데 미국인을 3분의 1 이상 유지하고 직원 10명 중 8명은 미국인으로 두겠다고 약속도 했다.

20차례의 협상이 이어졌고 매각 대금은 당초 제시한 가격의 10분의 1 수준인 6000만 달러로 내려갔다. 린춘핑은 “미국 은행 인수로 미국의 고위 관리와 많은 금융 인재를 접촉할 수 있고 세계적인 포럼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린춘핑은 소액 예금이라는 틈새시장을 공략할 방침이다. 미국의 대형 은행은 2만 달러 이하 예금은 고객에게 이자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보관 수수료를 요구한다. 린춘핑은 이런 소액 예금을 유치한 뒤 이를 묶어 대형 은행에 예치한다는 전략이다. 그 금리 차로 수익을 낸다는 것이다.
‘미국 은행 인수’ 린춘핑 회장의 성공 비결
빨라지는 중국의 해외 은행 사냥
대부분 국유 은행 주도…전 세계 ‘타깃’

중국의 해외 은행 인수는 대부분 국유 은행이 주도해 왔다. 2006년 8월 건설은행이 97억1000만 홍콩 달러로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아시아 법인을 인수한 게 신호탄이다. 그해 말 공상은행이 인도네시아의 할름은행을 인수했고, 2007년엔 공상은행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탠다드은행 최대 주주에 올랐고, 이어 민성은행이 미국연합은행을 사들였고, 중국국가개발은행이 22억 유로를 투자해 바클레이즈은행 지분 3.1%를 인수했다.

그해 핑안보험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합작은행에 27억 달러를 투자했다. 공상은행은 2009년 홍콩 동아은행의 캐나다 법인을, 2011년 미국 법인을 인수했다. 건설은행이 현재 브라질의 은행 3곳과 인수 협상을 진행 중으로, 이 가운데 한 곳을 사들일 것이라고 중국 언론이 최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춘핑그룹에 이어 유럽의 대표 화상 기업인 어우야그룹도 유럽의 은행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일 만큼 민간 자본도 해외 은행 사냥에 본격적으로 가세하는 분위기다. 2009년엔 원저우 화상들이 손잡고 이탈리아에서 은행 설립을 추진했다가 외국계 금융회사에 대한 장벽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다. 중국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해외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의 해외시장 공략도 덩달아 활기를 띨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베이징=오광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