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제 889호 (2012년 12월 10일)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 “벤처산업 육성에 국가의 운명이 걸렸죠”

기사입력 2012.12.13 오후 02:19

스타트업을 준비하거나 막 시작한 사람들에게 필수 코스가 하나 있다. 고벤처포럼에 나가 발표하는 것.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이 아니더라도 고벤처포럼은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모여 발표를 듣고 교류하고 토론하는 장이 되고 있다.

이 포럼을 만든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은 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지만 1974년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하다가 투옥됐고 그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그 뒤 그는 정치가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1987년에는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고(故) 제정구 의원과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고 민주당 공천을 받아 1992년과 1996년 서울시 도봉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낙선했다. 이후 그는 정치의 뜻을 접은 것 같다. 진로를 바꿔 1999년에는 최초의 IPTV였던 셀런티비 창업자들을 만나 사내이사로 참여했고 하나TV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고벤처포럼에 이어 엔젤투자협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고 회장을 만나자마자 ‘벤처기업의 숫자는 많아지는데, 이와 함께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벤처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을 꺼냈다. 정부가 보다 많은 벤처를 지원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벤처들이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면, 그 벤처기업들이 정부 지원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수준이라면, 더 나아가 정부의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런 벤처기업들이 좀처럼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면 여기엔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엔젤 투자가 해결책이 될 수 있어요. 1억 원을 1000만 원씩 10개 기업에 투자했다가 1개에서만 수익이 나도 나머지를 커버할 수 있죠.

엔젤 투자가 해결책이 될 수 있어요. 1억 원을 1000만 원씩 10개 기업에 투자했다가 1개에서만 수익이 나도 나머지를 커버할 수 있죠.


대상 선정부터 잘못

한국의 최근 벤처 붐에서 이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걸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 최근 김기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출간한 보고서다. 그는 ‘제2의 벤처 붐을 맞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벤처 기업이 늘고 있지만 열 중 아홉은 정부 지원을 받는 벤처라고 분석했다. 그가 인용한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 말 국내 벤처기업 수는 2만4645개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고 회장을 만나 간략하게나마 이런 내용을 설명했다. 그는 보다 직설적으로 말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벤처기업의 실패 확률이 매우 높다”고. “서울산업통상진흥원 700개 입주 기업 가운데 매출과 이익을 내며 성장하는 기업은 7개가 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한국은 정부가 지원 대상 벤처기업 선정부터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게 고 회장의 지적이다. “제가 심사위원 등으로 많이 다니다 보니 한국에서 정부가 투자할 기업을 찾는 과정이 보이더군요. 사실 이건 투자 대상을 찾는 게 아닙니다. 거의 점치는 수준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냥 서류 받아 일차로 체크하고 한두 차례 불러 발표를 듣죠. 팀은 어떤지, 인간성은 어떤지, 경력은 진짜인지,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원할 팀을 뽑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거죠. 이렇다 보니 기껏 팀을 뽑아 놓고서도 돈을 대자마자 팀이 깨지는 곳이 허다합니다.”

반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 아무래도 스타트업 관련 정부 지원 제도가 비교적 잘되고 있는 국가와 비교할 수밖에 없다. 고 회장은 이스라엘과 독일의 사례를 들었다. “독일은 정부 지원 벤처기업의 성공률이 20%가 넘습니다. 이스라엘이나 핀란드도 한국보다 이 비율이 훨씬 높고요.”

이게 가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정 과정에서부터 확실히 다르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는 그래서 이스라엘의 사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선 매년 500여 개의 기업이 정부 지원을 받으려고 지원한다. 정부 내에 있는 120명 정도의 투자가치평가사(evaluator)가 어떤 기업에 정부 자금을 투자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500개 업체에 파견을 나간다. 팀워크를 확인하기 위해 2~3개월 정도 같이 지낸다.

이렇게 2~3개월이 지나면 이들 투자가치평가사들이 리포트를 작성한다. 리포트 결과를 바탕으로 500개 기업 중 120개 기업에 투자하게 된다. 1개 업체당 투자 금액은 한국 돈으로 7000만 원 정도다. 이 중 20%가 성공하게 된다. 투자가 끝이 아니다. 투자한 다음 6개월에서 1년 뒤 다시 평가한다. 성취가 있으면 벤처캐피털들이 와서 투자를 집행한다. 만약 벤처캐피털들의 투자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부 차원에서 판단해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 5억 원 정도 정부가 직접투자를 진행한다.



이대로 가면 일본꼴 난다

그는 “한국도 이대로 가면 일본꼴이 난다”고 걱정했다. 무슨 뜻일까. 고 회장은 ‘성장 동력의 상실’을 가장 우려했다.

“한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성장 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기업에만 의존해서는 지속적인 성장 동력이 나오기 힘들어요. 대기업은 혁신이 나오기 힘든 구조거든요.”

해외에도 대기업은 많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혁신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 “IBM과 애플은 어떻게 혁신을 했을까요. 외부의 혁신 역량을 사들여 내재화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자체적으로 혁신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방형 혁신을 한거죠. 벤처기업들을 인수·합병(M&A)해 혁신을 사들이는 것. 이게 되는 곳이 미국이고 안 되는 곳이 일본입니다.”

국가가 근본적으로 벤처 산업을 일으키는데 진정 관심이 있고 여기에 국가의 운명이 걸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는지가 문제다. 한국은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는 게 고 회장의 진단이다.

정부만 그런 게 아니다. 창업하는 사람들문제도 있다.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창업하는 게 실리콘밸리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대기업에 가거나 관료만 되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이런 문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고 했다.

“우선 다양성 교육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가 정신이 있는,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일찌감치 발굴해 낼 수 있는 거죠. 실패를 용인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도전했다가 실패하더라도 신용 불량자가 되지 않는 그런 제도와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엔젤 투자자 문화를 육성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은 30만 명의 엔젤 투자자가 있는데 한국에는 고작해야 300명, 400명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1만 명 수준으로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엔젤투자협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2020년 엔젤 투자자 1만 명이 투자 자금 1조 원을 굴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의 엔젤 투자자들이 200억 달러는 굴리는 것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모두 지금의 30배 수준이다.

“국내 현실을 보면 어차피 중산층 이상이 투자할 돈이 없습니다. 엔젤 투자가 해결책이 될 수 있어요. 1억 원을 1000만 원씩 10개 기업에 투자했다가 1개에서만 수익이 나도 나머지를 커버할 수 있죠.”



임원기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wonkis@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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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2-12-14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