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家와 피에히家의 7년 전쟁…폭스바겐 왕국 탄생으로 이어져

epa01653718 Wolfgang Porsche (back), Chairman of the Porsche Automobil Holding supervisory board, and Ferdinand Piech (front), Chairman of the Vookswagen supervisory board, pictured at the 79th Geneva Motor Show in Geneva, Switzerland, 03 March 2009. The Motor Show will open its gates to public from 05 to 15 March, presenting over 1,000 brands with more than 85 world and European firsts in the sector saloon alone.  EPA/MARIJAN MURAT
epa01653718 Wolfgang Porsche (back), Chairman of the Porsche Automobil Holding supervisory board, and Ferdinand Piech (front), Chairman of the Vookswagen supervisory board, pictured at the 79th Geneva Motor Show in Geneva, Switzerland, 03 March 2009. The Motor Show will open its gates to public from 05 to 15 March, presenting over 1,000 brands with more than 85 world and European firsts in the sector saloon alone. EPA/MARIJAN MURAT
“폭스바겐을 인수해야 합니다.”

2005년 포르쉐 최고경영자(CEO)인 벤델린 비데킹은 포르쉐 가문 사람들에게 이같이 선언했다. 포르쉐그룹은 외국 업체로부터 폭스바겐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를 이유로 폭스바겐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2000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포드 CEO 자크 내서로부터 포드가 폭스바겐과 합병한다면 정부가 반대할 뜻이 있는지 문의까지 받다가 무산됐던 전례가 있어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명분이 타당해 보였다. 2005년 10월 폭스바겐의 지분을 18.5%까지 늘린 포르쉐는 2009년 1월 폭스바겐 지분을 50.76%까지 늘렸다.

M&A 역사에서 다윗(포르쉐)이 골리앗(폭스바겐)을 인수하려고 했던 사례로 손꼽히는(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딜은 몇 가지 이유로 시작됐다. 당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카이엔의 성공 등으로 30억 유로에 달하는 현금을 보유한 포르쉐는 특별한 계획이 없는 한 이를 주주들에게 배당해야 했다. 또한 다른 글로벌 자동차 회사에 비해 기업 규모가 작은 포르쉐엔 지속적인 신차 및 기술 개발을 위해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이 때문에 홀거 해르터 포르쉐 최고재무책임자(CFO)가 투자은행 등과 함께 현금과 추가 대출, 옵션 증서로 폭스바겐을 인수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후 폭스바겐 인수에 급물살을 탔다.


독일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
‘두 형제가 있었다. 친형제도 아니었고 성도 달랐지만 가까운 친척인데다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 한 가족과 다름없었다. 성인으로 자란 그들은 각각 다른 기업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다. 두 기업은 서로를 삼키기 위한 치열한 전략과 암투를 시작했고 두 가문의 갈등과 대결로 번졌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얘기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그것도 지난해까지 자동차 업계의 이목을 집중했던 대표적인 기업 M&A 사례였다. 바로 유럽의 맹주 폭스바겐AG과 스포츠카의 대명사인 포르쉐SE 간의 혈투였다. 포르쉐의 폭스바겐 인수 시도로 촉발된 두 회사 간의 전쟁은 결국 폭스바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성경’ 속의 다윗과 골리앗처럼 다윗이 승리하는 듯했지만 현실에선 골리앗이 다윗을 주머니에 넣어버린 것.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1931년 회사를 설립한 이후 8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이 얘기에는 20세기 독일의 역사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포르쉐는 ‘천재 기술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크로넨슈트라세 24에 프로쉐 유한책임회사를 설립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흥미로운 점은 포르쉐 설립에 메르세데스-벤츠를 계열사를 둔 다임러그룹이 간접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포르쉐 박사는 다임러그룹에서 개발부 책임자로 일했지만 그가 기획한 자동차 프로젝트를 사측이 경비 절감을 이유로 거부하자 사표를 던지고 나와 직접 회사를 차렸다. 만약 다임러그룹이 포르쉐의 프로젝트를 일정 부분 수용해 진행했다면 포르쉐가 창업을 결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포르쉐라는 차가 출시됐다고 하더라도 다임러그룹 계열 브랜드로 나왔을 수 있다. 능력 있는 직원을 내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큰 리스크를 떠안을 수 있다는 사례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독일인이 아닌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보헤미아 지방의 마더스토르프 출신이다. 지금은 체코 지역이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국민차(폭스바겐 비틀) 프로젝트를 돕는 등 경주용 차뿐만 아니라 경차 개발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부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범으로 지목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포르쉐 역사에서 창업자 외에 가장 주목해야 할 두 인물은 벤델린 비데킹과 페르디난트 피에히다. 비데킹은 적자에 허덕이던 포르쉐를 세계 최정상의 스포츠카 브랜드로 성장시킨 CEO이자 포르쉐 가문을 설득해 폭스바겐 인수를 시도한 인물이다. 그와 대척점에 서 있던 피에히조차도 그의 자서전에서 “내가 포르쉐 경영을 맡았다면 비데킹 회장처럼 잘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보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다(물론 자서전은 비데킹이 폭스바겐 인수를 시도하기 전인 2002년에 출판됐다).

페르디난트 피에히 폭스바겐그룹 감독 이사회 의장을 설명하기 위해선 포르쉐 가문의 가계도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제1세대라면 그의 아들 페리 포르쉐와 딸 루이제 포르쉐는 제2세대 경영자다. 루이제는 여성이었지만 페리 못지않은 경영 감각으로 자신의 지분을 지켜냈다. 오늘날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과 이부진 사장을 보는 듯하다.

루이제 포르쉐는 변호사 안톤 피에히과 결혼했고 장남 안톤 에른스트 피에히와 차남 페르디난트 피에히 등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외손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친손자인 볼프강 포르쉐와 두 가문이 경영하는 포르쉐와 폭스바겐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했다. 비데킹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폭스바겐을 손에 넣으려고 했던 볼프강 포르쉐는 지금도 포르쉐 감독 이사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하지만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한 후 주도권은 피에히에게로 넘어갔다. 포르쉐는 굳건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볼프강 포르쉐의 상실감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2013 국제 자동차 전시회(IAA: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필자가 직접 만난 볼프강 포르쉐는 한 번도 밝게 웃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지난해는 포르쉐의 대표 모델인 ‘911’이 출시된 지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에른스트 사건’이 불러온 파장
창업주의 자녀들이 많을수록 후계자 선정과 지분 배분 문제는 복잡해진다. 포르쉐의 세대 중 루이제 피에히는 자신의 자녀들이 포르쉐의 지분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세월이 지나 페리 포르쉐와 루이제 피에히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에 대비해 후계자 선정 문제를 논의했다. 페리 포르쉐와 루이제 피에히는 각각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뒀으며 이들 총 10명은 각각 10%씩의 지분을 나눠 갖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포르쉐의 회장은 포르쉐 가문에서, 포르쉐 오스트리아의 회장은 피에히 가문에서 맡기로 했지만 기술과 야망으로 똘똘 뭉친 피에히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사촌 형이자 포르쉐 911을 디자인한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와 포르쉐 생산담당 이사를 맡고 있던 페터 포르쉐 등과 대립각을 세우는 등 차기 회장직을 놓고 ‘왕자의 난’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

1970년 가을, 포르쉐 오스트리아 본사가 있는 첼암제의 쉬트 농장에 양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페리 포르쉐가 소집한 자리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의 한 회사에 집단 역학 컨설팅을 의뢰했고 흉흉한 이들의 감정 상태는 컨설팅 회사가 “양가 모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외부에서 전문 경영인을 회장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결론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1년 여름, 양가는 다시 한 번 같은 컨설팅 결과를 받았고 1972년 3월 1일자로 모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골리앗 정복을 꿈꾼 ‘다윗’ 포르쉐
이로써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후계자 문제는 봉합됐다. 그 후 포르쉐가(家)와 피에히가는 각각 50%의 지분을 소유하며 권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법.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형인 에른스트 피에히가 1980년대 부르겐란트 부동산 프로젝트로 큰 손해를 보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포르쉐의 지분을 비밀리에 중동 투자자들에게 매각하려고 한 것이다. 이른바 ‘에른스트 사건’이다. 에른스트 피에히가 자신의 포르쉐 지분을 던지기로 결심한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1971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포르쉐 오스트리아의 경영을 맡고 있었으며 차기 포르쉐 오스트리아 회장을 맡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꿈이 좌절되자 회사를 박차고 나갔고 오스트리아도 떠났다. 그에겐 포르쉐 지분이 소득이자 아픈 상처인 셈이다.

에른스트 피에히의 지분 매각 소식이 알려지자 포르쉐와 피에히 가문 사람들은 선매권을 활용해 지분 인수에 나섰다. 포르쉐를 증시에 상장하고 우량주에 투자해 자금의 일부를 충당하는 등 300만 마르크를 조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과적으로 이에 따라 포르쉐와 피에히 가문은 각각 53.6%와 46.3%의 지분을 갖게 됐다. 그동안 유지해 왔던 균형이 깨진 것이다. 이에 따라 서로를 ‘지배하기’ 위한 두 가문의 경쟁이 한층 격화되는 불씨가 됐다.


경영난에 빠진 포르쉐를 노리는 기업들
폭스바겐은 현재 도요타와 제네럴모터스(GM)와 함께 글로벌 빅3 자동차 업체이며 2018년 세계 1위를 목표로 꾸준히 몸집을 키우고 있다. 포르쉐 역시 내년 글로벌 판매량이 사상 처음으로 20만 대를 돌파할 전망이다. 두 회사 모두 전례 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리면 두 회사의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두 회사 모두 경영난을 겪고 있었던 것. 포르쉐는 1977년대에 내놓은 928과 비슷한 시기에 내놓은 924와 911 후속 모델 등이 모두 판매 부진에 허덕이면서 1986년 연간 판매량이 5년 전의 절반인 5만4000대로 추락했다. 여기에 1987년 달러 환율 급락으로 1988~1989년에는 판매량이 또다시 절반 수준인 2만9000대로 떨어지며 파산 직전까지 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포르쉐 매각론이 점점 고개를 들었다. 1981년부터 포르쉐 경영을 맡고 있던 페터 슈츠 사장조자 페리 포르쉐가 회사 수익률 향상 방안을 묻자 “포르쉐를 매각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포르쉐가 위기를 맞자 군침을 흘리는 기업이 하나 둘 고개를 들었다. 일본 업체들 중에선 도요타와 혼다가 돈 보따리를 들고 포르쉐의 문을 두드렸다. 도요타는 10억 마르크, 혼다는 무려 40억 마르크를 제시하며 러브콜을 보냈다. 이탈리아 피아트와 미국의 포드, 독일의 다임러그룹도 인수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포르쉐의 감독 이사회 회장인 페리 포르쉐는 이 같은 제안을 모두 물리쳤다.

외부의 위기는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포르쉐가 흔들리자 포르쉐-피에히 가문은 오랜만에 회사를 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사재 2억 마르크를 투입해 증자를 실시했다. 부진의 늪을 헤매던 포르쉐를 다시 정상 궤도로 올려놓을 경영자도 물색했다. 이 과정에도 역시 포르쉐와 피에히 가문의 기 싸움은 있었다. 포르쉐는 포르쉐 재정담당 이사를, 피에히 측은 생산담당 이사를 추천했다. 결국 페르디난트 피에히 당시 아우디 회장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1992년 생산담당 이사가 포르쉐 사장 자리에 앉았다. 벤델린 비데킹의 등장이다(다음 호에서 계속).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