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산업연구원 원장
한중 FTA 비준…중국을 이기는 길
국회에서 한중 FTA가 비준된 다음 날인 12월 1일 중국 베이징에서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중국사회과학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한중 신협력 시대에서의 협력 방안 모색’이라는 제하의 세미나가 열렸다. 산업연구원이 주관 기관이었기에 필자도 하루 종일 참석하면서 한중 관계를 여러 각도로 조명해 보는 계기가 됐다.
그간 이뤄진 협력 세미나가 으레 그렇듯이 정치·외교·경제·인프라(에너지 포함)·문화 등 여러 분야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세션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한중 협력 방안 세미나에서 느껴 왔던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고 하면 과장일까. 중국 참가자들의 자세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느껴졌다. 형식에 치우치고 내용이 다소 빈약했던 지금까지의 발표 자세에서 벗어나 진지한 협력 방안을 제시했다. 이른바 쌍방향 교류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몽(차이나 드림)’과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의 의도가 가감 없이 펼쳐졌고 문화 분야에서도 한류를 넘어 쌍방향 교류를 의미하는 ‘한중류’라는 신조어가 제시되기도 했다.
한중 FTA 비준…중국을 이기는 길
자신감으로 새로 무장한 중국
중국이 가지기 시작한 자신감을 생각하면 한국 산업으로서는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중국 시장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 산업의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은 불문가지다. 기회는 위기를 내포하고 있고 위기가 곧 기회이기도 한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한국 산업이 중국과 관련한 이러한 큰 변화(한중 FTA 발효, 일대일로의 전개)를 맞아 어떤 전략으로 변신을 모색해 나가야 할지 생각해 본다.
한국의 주력 산업들이 국제시장에서 뛰어난 경쟁력을 발휘해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경제를 떠받쳐 온 지는 오래됐다. 이렇게 머물러 있는 동안, 즉 추격하려는 타깃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중국 산업은 턱밑까지 따라왔고 이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자로 부상한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제야말로 한국 산업이 ‘퀀텀점프’하는 큰 변신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변화의 방향을 필자는 ‘VUSIC’로 제시한다. 부가가치(Value), 업스트림(Upstream), 소프트화(Soft), 인프라(Infrastructure), 협업(Collaboration)이 그 내용이다.
첫째, 한국의 산업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양적 성장 기조보다 부가가치를 높이는 질적 성장으로 변신해야 한다. 가치(Value)를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올해 한국의 수출은 물량이 줄지 않는 가운데서도 금액이 급격히 줄어드는 참담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유가를 비롯한 세계 원자재 가격의 하락, 주요 산업의 세계적인 공급과잉 현상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하지만 한국 산업이 결국 제조 공법에서만 강하고 부가가치를 더 많이 붙일 수 있는 제품의 기획·설계·디자인·유통 등에선 취약하다는 점이 여지없이 드러난 셈이다. 한국의 대형 조선 3사가 올해 맞은 대규모의 손실이 이를 여실히 드러냈다.
궁극적으로 한국 산업이 중국 산업보다 우위를 지켜 나가야 할 부분도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조 공법에서의 우위만으로 경쟁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더 이상 어렵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중국 산업이 한국의 제품 기획력을 벤치마킹하려고 하고 있고 특히 한국 중소·중견기업들의 숨은 실력을 부러워하는 눈치다.
둘째, 한국 산업이 지금까지와 같이 최종 제품을 생산하는 경쟁력에만 의존해서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부품·소재·기계 등 이른바 ‘상류 부문(Upstream)’에서의 경쟁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은 이미 부품·소재 분야에서 중국에 큰 무역 흑자를 얻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국산화 노력도 눈부시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산 부품·소재의 대한국 수출도 괄목할 만큼 늘고 있다. 그만큼 실력을 갖추는 게 중요해졌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불린 지 오래지만 중국 공장을 방문해 보면 기계류는 대부분이 독일·북유럽이나 일본 제품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 기업이 진출한 공장에서 발견하는 한국 기계를 보고 자위하기에는 중국 산업이라는 시장이 너무 크다. 이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야말로 ‘날뛰는 코끼리 위에 올라타는’ 길일 것이다.
셋째, 소프트화(Soft)를 추구해야 한다. ‘경제의 소프트화’가 강조된 지 오래지만 한국 산업이 이를 추구하는 노력은 지지부진해 보인다. 어쩌면 기술력 우위에 지나치게 도취해 온 때문은 아닐까. 제조업 제품에 입힌 서비스·문화·예술 요소의 중요성은 중국 소비자들의 변화를 읽으면 금방 드러난다. 중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아모레퍼시픽 제품 중에서도 전통 한방을 가미한 ‘설화수’의 성공이 좋은 사례다. 한국 산업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제품에 입힌다면 기술면에서 따라잡히더라도 충분히 중국 소비자들을 설득할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부품·소재·기계에서 경쟁력 갖춰야
넷째, 인프라(Infrastructure) 시장에 주목해야 한다. 선진국 경제의 성장력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신흥국 시장의 움직임에 전 세계 산업이 촉각을 곤두세워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향후 신흥국 인프라 시장의 중요성을 착안하고 이를 활용할 대안을 제시한 것이 중국인 점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라는 국제기구를 제안해 신흥국의 인프라 시장을 공략하는 체계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이 꺼리는 가운데서도 미국과 가까운 유럽의 주요국들이 모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중국의 혜안을 인정한 셈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협업(Collaboration)에 나서야 한다. 어쩌면 한국 산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 산업을 이끌어 온 대기업들은 ‘모든 것을 내재화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고 그 방법으로 빠른 속도로 제조 공법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선진국 기업을 벤치마킹해 추격할 때는 이러한 방법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새로운 아이디어를 장착한 새 제품을 세상에 내놓는’ 부문에서는 큰 한계를 보여 온 게 사실이다.
애플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제조 부문의 경쟁력을 대만·중국의 힘으로 해결하고 심지어 경쟁사인 삼성전자의 부품을 활용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만의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는’ 데만 집중하면서도 제조 기술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진 삼성전자와 대등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의 샤오미가 이러한 애플의 컬래버레이션 전략을 벤치마킹해 기술력 차이를 단숨에 극복하고 삼성전자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중국 산업계 모두가 한국보다 먼저 이러한 컬래버레이션 전략에 눈을 뜬다면 가히 두려운 결과에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한국 산업도 중소기업 혹은 창업 기업의 아이디어와 새로운 활력을 활용하는 데 눈을 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