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프 “부채 슈퍼 사이클이 맞다”
세계적 경기 불황을 놓고 경제학자 간 논쟁이 한창이다. 물론 그 누구도 시원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모델로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로렌스 서머스 미국 전 재무장관이 내놓은 장기 침체론은 일반 대중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세계적인 수요 감축으로 구조적 장기 침체에 빠졌다는, 그야말로 케인스류 이론이었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금리를 인하하고 시중 유동성을 크게 늘렸는데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요 부족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설명이다.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장기 침체론’
미국은 1분기 성장률이 급격히 감소하고 중국 역시 수출 부진과 주택 시장 침체에 노출돼 있다. 유럽 또한 아직 그리스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선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거품 붕괴를 우려하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칠 태세다. 지금 시점에서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의 이론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부채의 악순환으로 거품이 생겼고 거품 붕괴가 우려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재정 확충이나 인위적 시장 조작 등 수요를 진작하는 정책은 약발이 먹히지 않으며 각국이 부채를 줄이고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서머스 전 장관이 장기 정체론을 들고나온 것은 2013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회의에서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경제 회복이 늦어진 이유를 잠재성장률 하락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수준이 2007년 전망했던 잠재 GDP 수준보다 10% 정도 낮다는 통계도 곁들였다.

잠재 성장이 하락하는 것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장기적 투자 부진이 지속되며 노동시장의 이력 현상(경기 침체로 생긴 실업이 경기가 회복돼도 나아지지 않는 현상) 대두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장기 침체론은 물론 서머스 전 장관이 처음 내세운 것은 아니다. 대공황 이후인 1938년에 앨빈 한센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경제 회복이 더뎌 실업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을 장기 침체론으로 설파한 적이 있다.

그 또한 침체의 기본 원인을 인구 성장률 저하에 따른 투자 수요 감소로 설명했다. 한센은 케인스의 경제 이론을 잇는 대표적 학자다. 경제학자들은 서머스도 근본적인 투자 수요 감소와 인구학적 요인을 중시하는 점에서 한센의 장기 정체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로고프 교수는 이에 대해 고령화를 비롯한 장기적 인구 감소가 성장률 저하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들만으로는 현재의 자산 가격 거품의 발생과 붕괴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오히려 금융 위기를 초래한 과도한 부채가 아직도 세계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고 부채 증가에 따라 일시적 위기가 현재 금융 위기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각국이 부채를 축소하는 데 이번 위기의 해결책이 있다고 지적했다.
로고프 “부채 슈퍼 사이클이 맞다”
부채 슈퍼 사이클 해결하면 지속적인 성장도 가능
그는 부채 슈퍼 사이클을 ‘신용(크레디트) 팽창→자산 가격 상승→담보 자산 가치의 상승→신용 재팽창→자산 가격 추가 상승’의 과정으로 설명한 뒤 자산 거품이 꺼지면 이런 과정이 급격히 역전된다고 주장한다. 신용카드를 계속 사용해 부채가 급팽창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놀라운 성장을 하며 부채 수준이 금융 위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는 스스로 만들어 낸 지방정부의 부채 위협들에 맞닥뜨렸다고 그는 지적한다. 특히 이번 부채의 폭발은 부동산 거품을 동반하고 있다는 데도 주목한다. 1인당 소득 회복도 둔화돼 부채 급증을 촉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업률 증가 같은 문제가 일반적인 경기 침체 후 일어나는 정도보다 더 심각했던 것도 결국 경기 회복이 아니라 부채의 악순환 고리가 심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고프 교수는 무엇보다 부채 슈퍼 사이클은 장기 침체와 달리 영원하지 않다는 데 중앙은행 및 정부 당국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이 마무리되면 경제성장 추세는 다시 높아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정책 입안자들은 은행의 구조조정과 자본의 재구성을 통해 부채의 평가절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도 인플레이션 목표 정책에 융통성을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로고프 교수는 모든 일반 기업이나 일반인들에게 금리가 계속 낮아질 것이라는 심리가 들어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힌다. 금리가 낮아 수익률이 아주 낮은 사업이라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은 곧 부채가 근본적으로 공짜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이는 극히 피상적이고 위험한 사고라고 주장한다.

각국이 취한 일시적 재정 확장 정책도 초기 최악의 위기를 피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많은 나라에선 너무 빨리 위축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기술 진보에 주목하고 있다. 인류가 낳은 위대한 업적인 기술 진보로 최소 향후 20년간 성장을 위한 기술 수준보다 오히려 더 많은 기술 진보가 이뤄져 왔다고 그는 지적한다. 따라서 부채 슈퍼 사이클을 잘 해결하면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채권왕 빌 그로스도 최근 로고프 교수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경제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통화 완화 정책으로 공급한 ‘싼 돈’ 덕분에 금융시장이 호황을 누린 ‘부채 슈퍼 사이클’이 올해 어느 시점에서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한편 존 테일러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경기 회복의 지연은 2005년 이전의 과도한 금융 완화와 금융 규제가 엄격함을 잃어버려 오히려 번잡해진 규제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벤 버냉키 미 중앙은행(Fed) 전 의장은 일부 국가의 외화보유액을 통해 나타난 글로벌 저축 과잉이 문제의 근원이라며 ‘과잉 저축 가설(savings glut hypothesis)’을 내놓고 있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Vitamin’ 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