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등 위반 기업 제재 강화…관리 체계 구축·역량 강화 나서야

지중해 연안 도시와 농업 지역에 생활 및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 모습
지중해 연안 도시와 농업 지역에 생활 및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 모습
지난해 연말 모임에서 세계은행(WB) 관계자를 만났다.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가장 관심을 끈 이슈는 담합 의혹이 제기되는 국내 건설사들에 대한 금융 제재 강도가 더 거세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최종적으로 관련 기업의 범법 행위가 밝혀지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세계은행이나 기타 다국적개발은행(MDB)들과 같은 다양한 금융회사로부터 금융 지원이나 보증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2008년 세계은행은 필리핀 도로 개선 사업 조사 결과 국내 모 건설 업체의 부정 및 부패 행위를 밝혀냈고, 이 사업에 해당 기업의 참여를 4년간 금지했던 사례가 있다. 이 기업은 세계은행 조달 지침에 명시된 사기 및 뇌물수수·부패혐의 관련 규정 1조 15항 위반으로 수주 관련 입찰에 제한을 받았다.

또한 국내 건설 업체는 아니지만 세계은행은 캄보디아·필리핀 등에서 건설 사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현지 지역사회의 주민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 및 이주 계획의 미비, 국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허술한 관리로 사업 지원을 수년간 중단하기도 했다.

이 밖에 사업 운영 과정에서 수자원 문제와 막대한 환경 부하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된 칠레 지역의 파스쿠아 라마 사업은 투자 요청을 받은 미국 수출입은행 및 캐나다 수출진흥청이 투자 의사를 철회하기도 했다.

최근 국내 건설 시장의 포화와 업계 진출이 활발했던 중동 등의 건설 시장 수요 저하로 국내 건설 업체들의 진출 지역 다변화를 통한 생존 전략이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MDB의 인프라 및 환경·기후변화 관련 대규모 사업 기회와 신흥 금융 기구인 녹색기후기금(GCF)·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의 출현으로 막대한 재원의 공적 자금을 활용, 해외시장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던 국내 업체와 산업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앞서 언급된 사례들은 MDB 및 기타 개발 금융 기구의 공적 자금을 활용하고자 하는 건설 업체가 사업을 발주하는 국제 기관의 관련 규정에 대한 충분한 숙지와 준수 역량이 부족하면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사업 리스크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AIIB의 환경·사회 세이프가드 ‘주목’

과거부터 세계은행 및 MDB 등은 사업 관리에서 투명성과 책임성, 환경·사회적 영향에 대한 철저한 관리 및 저감 노력을 참여 업체에 요청해 왔다. 향후 선진국, 개도국, 관련 참여 기관과 사업 이행 업체 모두에게 사업 초기 제안부터 공사 현장의 관리 및 모니터링, 최종 준공까지 전 영역에 걸쳐 사업 과정에 발생하는 다양한 환경적·사회적 결과에 대한 보다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압력 수위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제 표준 등은 ‘환경·사회 세이프가드(ESS)’라고 불린다. 대표적인 관련 가이드라인은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금융공사(IFC)의 8대 성과 표준(PS)을 참고할 수 있다. 해당 가이드라인은 2002년 초안이 만들어진 후 2006년 개정을 거쳐 2012년 버전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중국 주도로 설립된 AIIB도 자체적인 환경·사회 세이프가드 정책 수립 과정에 있다. 그러나 국제 공적개발원조(ODA) 정보 제공 업체인 데벡스(DEVEX)에 따르면 기존의 아시아개발은행(ADB)·세계은행·MDB 등 국제 표준에 못 미친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AIIB의 관리 방식 문제와 환경·사회 세이프가드 정책의 미비 등을 이유로 자국의 회원국 가입 참여 불가 사유를 밝혔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점차 강화되고 있는 환경·사회 세이프가드 적용을 위한 사업 수행 기관의 관리 체계 구축 및 역량 강화 주문은 사실 과거부터 국내 정부와 산업계에 압력으로 작용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공식 회원국으로 가입된 이후 개도국 개발 협력과 주요 선진 공여국 클럽에 가입하게 된 한국은 한층 강화된 위상에 걸맞은 해외 협력 사업들을 국제 기준에 준수해 수행하도록 조치할 것을 OECD 등을 통해 강력히 요구 받고 있다.

이와 함께 기후변화로 대표되는 환경적 문제와 지역사회 이슈들은 선진국과 개도국을 불문하고 전문화되고 조직화·글로벌화한 시민사회와 비정부기구(NGO)의 주요 모니터링 대상이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환경·사회적 영향에 대한 관리가 미흡한 사업은 지역사회 및 NGO 등의 강력한 사업 반대 운동 등은 기존의 건설 및 개발 업체들에 매우 강력한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는 새로운 환경·사회 리스크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환경·사회 체질 개선을 통한 품격 있는 산업계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아시아 최초로 인천 송도에 유치한 국제기구인 GCF는 2015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기금을 모집해 2020년까지 연 1000억 달러(약 120조원)를 활용한 사업 승인을 추진하고 있다. 개도국 최대의 공여금을 제공한 한국도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한 GCF 사업 개발을 위한 역량 강화 및 사업 발굴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국제 자금, '환경·사회' 기준 어기면 헛물
선진국에 유리한 역차별 될 수도

이러한 과정에 GCF 기금을 직접 지출 받아 관리·운용하고 GCF에 기금 조달을 위한 사업 제안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행 기구 승인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수출입은행과 KDB산업은행이 각각 이행 기구 승인을 신청한 상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행 기구 자격 신청 요건에 기금에 대한 수탁 관리 측면과 함께 환경·사회 세이프가드 측면에 대한 관리 역량 평가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개도국 개발 협력 사업에서의 강력한 환경·사회 세이프가드 적용 요구는 한국과 같은 중견국과 개도국의 사업 관리 기관과 사업 참여 업체에는 ‘양날의 칼’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엄격한 환경·사회 세이프가드 준용 등의 선결 조건에 따라 재원과 역량이 열악한 해당 국가 및 사업 참여 업체에는 ‘독소 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기금 운용 기회를 주는 역차별 조항이 되고 있다고 불평하는 목소리도 많은 게 현실이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체계 하의 GCF에서 한국은 개도국으로 분류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일·미국 등 선진국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요 공여국의 위치에 있다. GCF 기금의 혜택은 국내 기후변화 사업이 아닌 최빈국과 군소 도서 국가 등을 중심으로 한 기후변화 취약국이 받을 것이 자명하다.

이런 점에서 국내 업체와 GCF 이행 기구로 승인된 기관은 선진국과 MDB 등 국제기관에 준하는 강력하고 선진적인 수준의 환경·사회 세이프가드를 적용한 사업 관리 역량을 증명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제 표준을 사업 관리 체계에 내재화하고 경쟁 우위 창출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새로운 사업 관리 역량이자 책임인 것이다.

박재흠 삼일회계법인(PwC) 지속가능경영·기후변화서비스 이사

시간 내서 보는 주간지 ‘한경비즈니스’ 구독신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