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에 걸친 '아름다운 동업'과 '조용한 계열 분리'

LG 창업 초창기엔 친인척들이 사업 이끌어
LG그룹의 모태는 1947년 1월 설립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다. ‘락희’는 영어명인 러키(Lucky)에서 따왔다. 크림 제품을 출시하면서 ‘행운’이라는 뜻과 발음, 어감 등을 고려해 상표를 ‘럭키’로 결정한 것이다. 초기 창업 자금은 300만원, 창업자는 포목점을 하던 고 구인회 창업회장이었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1907년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났다. 능성 구(具)씨 집안의 6형제 중 장남이었던 창업회장은 1920년 김해 허(許)씨 집안의 장녀 허을수 씨와 결혼하면서 훗날 구씨와 허씨 집안 간 동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허씨 집안은 당시 서부 경남 일대에서 알아주는 만석꾼 거부였다. 구씨는 ‘구교리(校理)댁’으로 불렸다. 구 창업회장의 조부인 구연호 씨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연유에서다.

구 창업회장은 장인(허만식)의 6촌인 허만정(1897~1952년) 씨로부터 얻은 자금을 발판으로 국산 1호 화장품이자 LG의 첫 제품인 ‘럭키크림’을 생산했다.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 LG가 탄생했다. 창업회장이 사장에 취임하고 동생인 구정회 씨와 허만정 씨의 셋째 아들인 허준구 씨가 각각 부사장, 상무로 올랐다.

화장품으로 히트를 친 락희화학은 1951년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했다. 외국산 화장품과 달리 손쉽게 깨지는 크림 통 뚜껑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부산 범일동에 공장을 마련하고 빗·칫솔·비눗갑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구 창업회장의 사업적 결단력이 돋보이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당시 국내는 6·25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상태여서 모든 게 불투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하는 것은 무모해 보일 수 있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창업회장은 플라스틱 사업에 사활을 걸고 전 재산인 3억원을 과감하게 투자했다. 그 결과 ‘락희’만의 혁신적인 제품들을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칫솔을 만들기 시작하자 구 창업회장의 관심은 자연스레 치약으로 쏠렸다. 그리고 1955년 ‘럭키치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의 럭키치약은 LG생활건강에서 재탄생해 예전의 명성을 이어 가고 있다.

이후 락희화학은 화장비누·세탁비누를 차례로 선보였고 1966년 합성세제인 ‘하이타이’를 내놓으면서 종합 화학 회사로 거듭나게 됐다.
1970년대 당시 그룹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던 구자경(오른쪽) LG 명예회장과 고 허준구(왼쪽) LG건설 명예회장.
1970년대 당시 그룹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던 구자경(오른쪽) LG 명예회장과 고 허준구(왼쪽) LG건설 명예회장.
구씨 형제와 허씨 집안의 의기투합

구 창업회장 형제들은 모두 맏형을 따라 회사에 들어왔다. 일찌감치 포목점인 ‘구인회상점’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함께해 온 구철회 씨를 비롯해 구정회·구태회·구평회·구두회 씨 등 6형제가 함께 형을 도와 사업을 키웠다.

첫째 동생 구철회 씨는 훗날 락희화학과 금성사 사장을 지냈다. 둘째 동생 구정회 씨는 당시 화장품 업계 최고 기술자로 불린 김준환 씨를 영입한 주역이다. 또한 화장품 이름을 ‘럭키’라고 지은 것도 그인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셋째 동생 구태회(일본 후쿠오카고, 서울대 정치학과) 씨는 화장품 연구에 몰두해 락희화학의 혁신 제품인 ‘안 깨지는 크림 통 뚜껑’을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 6선 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2003년 11월 동생인 구평회·구두회 씨와 함께 그룹을 분리해 LS전선그룹을 출범하고 LS전선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구태회 씨와 같이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넷째 동생 구평회(진주고보, 서울대 정치학과) 씨는 럭키치약을 만드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구 창업회장이 구평회 당시 상무를 미국에 파견해 치약 제조 기법을 배워 오게 했다. LS그룹의 계열사인 E1(옛 LG칼텍스가스) 명예회장을 지냈다.

막내 동생인 구두회(진주고보, 고려대 상학과) 씨는 호남정유사 사장, 럭키금성상사 등을 거쳐 럭키금성경제연구소 회장, 극동도시가스 명예 회장 등을 역임했다.

구 창업회장은 자녀로 6남 4녀를 뒀다. 장남인 구자경 2대 회장은 부산사범대 부속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0년 사내 연구소에 입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부친을 돕기 시작했다. 차남은 구자승 LG상사 전 사장이고 3남은 구자학 아워홈 회장이다.

넷째 아들인 구자두 씨는 미국 워시본대와 뉴욕시립대 대학원을 나와 훗날 LG가 해외 사업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현재 LB인베스트먼트 회장을 맡고 있다. 막내아들은 구자극 엑사이엔씨 회장이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LG그룹의 딸들은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대신 사돈이나 사위는 경영능력만 인정되면 친족인 아들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준다. 희성금속 사장을 지낸 김화중 씨는 구자경 명예회장의 첫째 사위다.

구 창업회장은 락희화학에 이어 1958년 국내 최초의 전자공업회사인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하고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진공관 5구 라디오, 트랜지스터 6석 라디오, 12인치 선풍기, 자동전화기, 전화교환기, 냉장고, 19인치 흑백 TV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오늘날 LG그룹이 여러 산업에서 일등 기술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국내 최초’ 제품들을 생산해 냈다는 자부심이 기업 문화에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LG그룹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발판을 닦아 놓은 구 창업회장은 1969년 12월 6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작고하기 전 그가 일으킨 기업은 락희화학·금성사·금성통신·반도상사·호남정유 등 모두 11개였다.

구자경, 경영 내실 다지고 해외 진출

이듬해 구자경 명예회장이 2대 회장에 취임했다. 구 명예회장은 당시 45세로 금성사 부사장이었다.

동업했던 허씨 집안에선 허만정 씨의 여덟 아들 중 차남 허학구, 3남 허준구, 4남 허신구 씨가 창업회장 사업에 본격적으로 합류했었다.

이 가운데 LG전선 부회장을 역임한 허학구 씨는 1969년 창업회장 타계 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LG건설 명예회장을 지낸 허준구 씨는 LG그룹 초창기 시절 숫자에 탁월한 감각을 발휘하면서 허씨가를 대표했다. 허준구 명예회장의 장남이 바로 허창수 현 GS 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진두지휘한 1970~1980년대의 LG는 해외 사업 진출이 두드러진 시기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사를 1971년 설립했고 뒤를 이어 독일·중동·싱가포르에 진출했다. 1980년에는 일본·홍콩·인도·나이지리아에 해외 지사를 세우는 등 LG 제품을 해외에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0년대에는 해외 공장 설립도 잇따랐다. 독일·멕시코·태국·중국 등에 해외 현지 공장을 세웠다. 이 같은 글로벌화 전략에 힘입어 LG는 1990년매출 16조원을 넘어섰다.

구 명예회장 시절 LG는 해외로 뻗어 나가는 한편 내실 경영에도 힘썼다. 1969년 락희화학을 상장한 데 이어 1970년엔 금성사를 전자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했다. 1974년에는 락희화학 사명을 ‘주식회사 럭키’로 바꿨고 1976년 금성정밀공업(현 LG이노텍)을 설립했다. 1978년 럭키가 매출액 1000억원을 달성하는 기록을 세웠고 럭키석유화학도 같은 해 출범했다.

이 밖에 금융업과 보험업에 진출했다. 1970년 범한화재를 인수하고 1973년 국제증권을 세웠다. 1984년 1월 구 명예회장은 계열사별로 각기 다른 기업명을 ‘럭키금성’으로 통일했다. 화학 업체인 럭키와 전자 업체인 금성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LG그룹의 본사인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건설 계획도 이 무렵에 세워졌다. 흩어진 계열사를 한곳에 모아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LG는 여의도에 1만4873㎡(4500평) 규모의 부지를 매입, 1987년 10월 준공했다.

LG는 21세기 비전을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V프로젝트’를 펼쳤다. 구체적인 전략과 추진 방향에 대한 1년간의 검토 작업을 거쳐 1988년 11월 22일 구 명예회장이 ‘21세기를 향한 경영 구상’을 발표했다.

고희(古稀)를 맞이한 구 명예회장은 1995년 1월 그룹 명칭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고 새 기업 이미지(CI)를 선포했다. 그리고 장남인 구본무 당시 부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줬다.

김현기 기자 henry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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