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4월부터 조합 설립 인가 후부터 가능…‘비리 줄인다’ 명분 퇴색
‘시공사 선정시기’ 5년 전 제자리로…정비사업 회귀론도 대두
[한경비즈니스=김병화 기자] 강남 재건축을 중심으로 수주 전쟁이 예고되고 있다. 4월부터 서울 시내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 사업의 시공사 선정 시기가 크게 앞당겨지게 된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 시공사 선정 시기는 5년 전 투명한 정비 사업을 도모한다며 늦췄던 것이다. 당시 선봉에 섰던 주역은 다름 아닌 서울시였다. 침체된 정비 사업에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기대와 앞서 지적됐던 문제가 재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시공사 선정돼야 사업 탄력

서울시는 2010년 7월 재개발·재건축 정비 사업의 관리·감독을 시가 직접 주도하는 공공관리제를 도입하면서 시공사 선정 시기를 기존 ‘조합 설립 인가 이후’에서 ‘사업 시행 인가 이후’로 늦췄다. 조합 설립에서 사업 시행 인가까지 걸리는 시간은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2년 이상이다.

시공사 선정은 정비 사업 추진의 핵심 사안으로 꼽힌다. 사실상 ‘자금줄’ 역할을 하게 되는 시공사가 선정돼야 비로소 사업 추진에도 탄력이 붙는 구조다. 하지만 일부 시공사는 선정 후 조합에 자금을 지원함과 동시에 사업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선정 당시 제시한 공사비를 본계약 때 물가 상승, 설계 변경, 특화 작업 등의 이유로 인상하며 조합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서울 시내 한 재건축 조합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자금줄을 쥐고 있는 시공사가 조합에 무리한 요구를 하며 불합리한 이익을 취하는 행태가 만연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서울시는 조합이 시공사에 휘둘리며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공자 선정 시기를 변경했다. 또한 시공사로부터 운영자금을 미리 빌려 조합 운영비를 충당하는 관행을 없애기 위해 시 차원에서 조합에 사업 자금을 빌려주고 ‘클린업 시스템’을 통해 사업 진행 과정을 공개하도록 했다.

제도적인 관리를 통해 정비 사업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서울시 공공관리지원실 담당자는 “2010년 7월 공공관리제 시행 후 시공사를 선정한 구역에서 큰 잡음이 없다는 점에서 시공사 선정 시기를 늦춘 효과는 충분히 있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효과가 더욱 부각됐다. 시공사 선정 시기가 늦어지면서 정비 사업 추진 자체에 어려움이 커졌다는 지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울시가 조합에 빌려주는 재원이 부족해 제때 운영자금을 지원받지 못하는 곳이 속출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정해진 기준에 따라 조합 운영비를 지원 중이며 큰 틀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불만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설계 도면이 결정된 다음 시공사가 선정돼 설계 계획 변경이 잦아졌고 시간도 많이 소요됐다. 조합과 건설사를 중심으로 시공사 선정 시기를 다시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윤상필 도시환경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서울시는 시공사 선정을 늦춰 비리가 감소하고 잡음이 줄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업 자체가 중단된 구역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토교통부는 조합과 건설사의 손을 들어줬다. 국토부는 공공관리제를 선별적으로 적용하고 서울 지역 조합의 시공사 선정 시기를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지방자치단체가 인허가 과정에서 확보한 다른 사업장의 정보(공사비 등)를 정기적으로 조합에 제공하면 무분별한 공사비 증액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서울시는 투명한 정비 사업을 위해 현재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국토부는 결국 법(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을 개정했고 개정안은 3월 2일부터 시행됐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조례 개정에 나선 서울시는 이르면 3월 말 개정안을 공포할 예정이다.

조례 개정안은 조합과 시공사가 공동 시행하면 시공사 선정 시기를 조합 설립 인가 이후로 앞당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조례 개정안은 지난 3월 9일 서울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시공사 선정시기’ 5년 전 제자리로…정비사업 회귀론도 대두
◆건설사 수주 경쟁 과열 조짐

이르면 4월부터 사업 초기 단계인 조합 설립 인가 뒤부터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게 되자 부동산 시장은 벌써부터 술렁이고 있다. 특히 이미 조합 설립 인가를 받은 재건축 대상 아파트들도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게 되면서 서울 강남 재건축 등을 중심으로 예정에 없던 수주 경쟁이 가시화되고 있다.

일부 단지에서는 벌써부터 과열 조짐이 나타나 연초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매물이 자취를 감추고 호가가 상승하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서 조합 설립 단계에 머물러 있는 정비 사업 구역은 87곳에 달한다. 이 중 강남 3구에는 대치쌍용1·2차, 삼성동 홍실아파트,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 신반포3차, 송파구 장미1·2·3차 등 눈길을 끄는 재건축 단지들이 대기 중이다.

수주전을 준비하는 건설사들의 각오도 남다르다. 현대건설은 최근 주택사업부 안에 강남권 재건축 수주 전담 태스크포스(TF)까지 구성했다. 그동안 정비 사업 수주에 소극적으로 나서면서 GS건설·삼성물산·대림산업 등 경쟁사에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서초무지개 등 27개 재건축·재개발 사업을 싹쓸이하며 수주액 8조원을 기록한 GS건설도 여세를 몰아 반포주공1단지 수주에 나선다.

일각에서는 시공사 선정 시기 변경이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자칫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됐던 ‘그때 그 시절’의 정비 사업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기존 ‘공공관리제’의 명칭이 ‘공공지원제’로 변경된 가운데 서울시의 감시자 역할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때아닌 ‘정비 사업 5년 전 회귀론’이 대두되고 있는 이유다.

서울시는 시공사 선정 시기를 앞당겼을 때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 대안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홍상범 서울시 공공지원실행팀 주무관은 “공사비 인상을 막기 위한 방법부터 시공사 선정 절차를 투명하게 하기 위한 방법 등 다양한 부분을 고민 중”이라며 “기존 공공관리제의 취지(투명한 정비 사업)를 퇴색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방법을 찾아 늦어도 4월까지는 조례 개정안을 고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kb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