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사우디와 '흙수저' 한국의 엇갈린 운명
‘흙수저’라는 유행어를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이 땅 젊은이들의 장래가 모두 부모의 지위나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운명이 갈린 등장인물들을 다루는 드라마를 보기 싫어한다.

어쩌면 한국에서 젊은이들의 성공의 잣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고시에 합격하거나 세계적인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으로 일반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잣대를 들이대 이른바 ‘성공한’ 젊은이들의 출신 성분을 추적해 보면 부모의 재력·지위 혹은 극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도 같다. 강남에 주거지를 둔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많이 들어가고 결국 좋은 곳에 취업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딘지 모르게 사회적 성취를 위한 사다리가 무너져 내려 버렸다는 식의 ‘금수저 흙수저론(論)’이 횡행하고 있는 요즈음에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공한 케이스는 얼마든지 있다. 비금도 소년 이세돌 9단이 대표적인 존재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열정 하나로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박세리와 김연아도 그런 성공의 대명사들이다.

그들의 빛나는 성공은 후세들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그래서 수많은 세리 키즈와 연아 키즈들이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바둑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하니 얼마 후에는 세돌 키즈들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어려움을 이겨 내는 사례는 개인들의 성공과 실패 스토리에만 그치지 않는 것 같다. 나라들의 운명은 더욱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필자가 연구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 말에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는 꿈의 나라로 보였다. 그 많은 석유를 팔아 1980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6000달러를 넘은 부국이었고 당시 한국의 1인당 소득은 그 10분의 1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3대 자원이라고 불리는 석유·석탄(유연탄)·철광석 어느 것 하나 변변히 가지고 있지 않아 그야말로 ‘흙수저’ 국가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두 나라의 형편을 살펴보면 금석지감이 들 정도다.

우선 두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은 2015년 기준 한국 2만9000달러 대 사우디 2만1000달러로 역전된 점만 보더라도 두 나라의 운명이 엇갈리고 있다. 더욱이 최근 2년 가까이 국제 유가가 계속 떨어지는 가운데 사우디 정부는 결국 모자라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빌리기로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약 10년 전 필자는 사우디 정부 초청으로 한국의 산업 발전 경험을 발표하고 사우디 주요 인사들과 사우디의 산업 발전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많은 사우디 지도자급 인사들이 사우디의 장래에 대해 진정으로 걱정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산업을 발전시켰고 몇 차례의 세계적인 외환·금융 위기를 겪으면서도 빠르게 정상적인 경제 회복의 궤도로 돌아오는 저력을 갖춘 나라가 됐다. 한국이 이뤄낸 산업과 기술 발전의 경험은 많은 개도국들이 부러워하고 따라하고 싶은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어디 사우디만 그런 운명에 처해 있을까. 국제 유가가 고공 행진을 하는 동안 흥청망청 경제를 운영해 온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같은 나라들도 알려진 바와 같이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고 있다.

그 대척점에 서 있는 한국과 같은 예도 얼마든지 있다. 과거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4룡’으로 불렸던 싱가포르·홍콩·대만 등을 차치하고라도 중국·베트남 같은 나라들이 저개발국 개도국의 굴레를 벗어나 신흥 산업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좋은 예들이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다. 자연의 법칙을 예로 들면서 금수저 흙수저 논의의 근거를 제공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한 이치이고 과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사에 이 이치만 적용된다면 너무나 재미없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원래 유리한 여건에서 출발하면 항상 유리한 결과를 얻게 되고 불리한 여건에서 출발하면 불리한 결과에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자는 영원히 부자로, 빈자는 영원히 빈자로 남게 되는 운명론적 틀 속에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세상일까.

여기에 인간의 노력이라는 오묘한 힘이 들어가면서 이러한 결정론적 원리를 뒤집을 수 있는 이치가 생겨난다. 인간은 어려운 여건을 이기기 위해 더 노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그 노력의 결과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이런 때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위력을 발휘한다. 반대로 좋은 여건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들기 쉬운 것 같다.

위에서 예를 든 사우디는 지도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오랫동안 누려 온 각종 무상에 가까운 교육·복지 등에 익숙한 사우디 국민들은 힘들여 일할 마음이 없다. 씨앗만 뿌려 놓아도 이모작·삼모작이 가능한 아열대 개도국들 중 이런 이로운 여건을 활용해 농업을 발전시킨 국가들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개인들의 성취를 위한 노력에서도 이른바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노력의 강도가 높아지는 반면 좋은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죽어라고 일할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원불교의 경전에 있는 ‘은생어해 해생어은(恩生於害 害生於恩 : 은혜는 해로움으로부터 만들어지고 해로움은 은혜로움에서 비롯된다)’이라는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 말이 전하는 대로 불리한 여건이 오히려 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유리한 여건이 오히려 해로운 결과를 낳기가 쉽다는 교훈이 머리에 들어오게 됐다.

요즘 한국 산업의 흐름을 보거나 혹은 금수저 흙수저 논의를 들으면 한국도 어쩌면 지금까지 이뤄 놓은 ‘성취(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산업들의 존재, 선진국에 가까워진 국민소득 수준 등등)’를 우리에게 주어진 ‘은(恩)’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 눌러앉으려는 안일함 속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지 걱정된다.

그렇게 역동적인 나라로 이름을 날리던 한국이 이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고 새로운 산업이 태어나는 길을 막아서고 위험을 안은 어려운 분야에서 창업을 하려는 젊은이들을 보기 힘든 그런 정태적인 사회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돼 하는 말이다.

김도훈 산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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