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전한 전령은 다시 스파르타로 향했는데…}
마라톤에 감춰진 진실은
(일러스트 김호식)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그리스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라톤에서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대와 아테네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만약 그 전투에서 그리스가 진다면 아테네의 운명은 페르시아의 말발굽 아래 깔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싸움이었다. 그러니 모든 아테네 시민의 관심은 그 전투에 쏠려 있었다. 마침내 아테네가 승리했다.

그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아테네 사령관은 전령(herald : 당시 전령은 전문 직종의 직업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의 신문에 ‘~헤럴드’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소식을 전하는 전령에서 유래한다) 페이디피데스를 아테네에 보냈다.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온 전령은 그 기쁜 소식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하고 쓰러져 죽었다는 사건에서 마라톤이 생겼다는 일반적인 ‘전설’이다. 그것을 기려 1896년 올림픽에서 육상경기 종목으로 채택됐다.

하지만 정말 그 ‘전설’이 진실일까. 우선 거리부터 다르다. 마라톤 경기는 42.195km를 달려야 하지만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실제 거리는 30km 정도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둘째다. 아무리 전문적인 직업이었던 전령이더라도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죽을 정도로 달렸을까. 게다가 ‘전문적’ 달리기 선수였던 전령이 ‘고작’ 30km를 뛰고 나서 죽을 정도였을까.

무엇보다 그만큼 시각을 다투는 시급한 소식이었으니 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달리기 선수였던 전령이 쓰러져 죽을 만큼 꽤 먼 길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디로, 무슨 소식을 들고, 왜 달려갔을까.


◆ ‘위대한 신화’로 바뀐 전설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육상 전투의 승리는 고맙고 반가운 일이지만 해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병력의 절대적 열세에 처했던 아테네로서는 양쪽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 버거웠다. 그래서 육상 전투에서 승리하고 곧바로 병력을 해상으로 옮겨야 했다. 아테네는 잔존 병력을 마라톤 전투에 지원해야 할지, 해상 전투 준비로 전환해야 할지 빨리 결정해야 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마라톤 전투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살라미스 해전으로 끝났다. 전령의 임무는 승전보를 전하는 것에 그친 게 아니라 해전으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하는 긴급성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라톤 전투는 아테네 혼자 감당했지만 해전까지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에게해 부근에서야 아테네가 맹주일지 모르지만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투는 다르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전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군이 필요하다. 당시 그리스에서 군사력이 가장 강한 스파르타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미 참주(비합법적 수단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외국으로 추방된 아테네 사람들이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자신들을 해방시켜 줬던 스파르타에 아테네는 구원의 희망이었다. 스파르타에 승전보를 전해 동맹군을 이끌어 내야 할 절박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페르시아는 왜 그리스를 침공했을까. 흔히 서구인들이 말하듯이 페르시아, 즉 동양의 정복욕 때문에 평화로운 그리스를 침공했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켰고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승승장구하던 아테네가 그 요구에 흔쾌히 응해 사르디스를 불태웠던 것이다.

페르시아는 자신의 식민지를 탈환하고 반란을 획책한 아테네를 응징해야 한다고 여겼다. 게다가 당시 페르시아 황제는 다름 아닌 다리우스였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이오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밀레투스도 토벌했으며 원수를 갚기 위해 해군을 동원해 아테네 원정을 떠났지만 에게해의 풍랑에 배가 침몰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마라톤 벌판에 당도한 것이었다.

아테네로서는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그래서 스파르타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달리기 선수인 전령 페이디페데스를 스파르타로 급파했다.

그 거리는 무려 250km였다. 페이디페데스는 그 거리를 무려 이틀 만에 달렸다. 너무나 힘들어 도중에 헛것이 보일 정도였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페이디페데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스파르타는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침 축제 기간이었고 게다가 보름달이 떴을 때는 출전할 수 없다는 전통 때문에 즉각적 파병이 곤란하다는 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 기록은 ‘서양’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가 적은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전하고 나서 쓰러져 죽었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라톤 신화’는 훗날 사람들이 적당히 각색한 ‘전설’일 확률이 높다. 어쩌면 이는 이런저런 사실들이 얽히고설켜 각색된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