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민주화로 사라졌던 교복, 기성세대의 퇴행적 ‘향수’로 되살아나}
‘교복’에 갇힌 아이들
(일러스트 김호식)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는 모습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물론 단정한 교복이 보기 좋기도 하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시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경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애틋하더라고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전 교복은 남녀 불문하고 시커멓고 경직된 옷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였다. 학생들의 교복은 일본 군복의 변형이었고 그것은 황국신민으로 길들이는 방식의 하나였다. 교복이 제복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교복은 군복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군국주의적 교육 방식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여학생 교복을 ‘세라복’이라고 불렀던 것도 사실은 그 옷이 해군 혹은 수군의 옷, 즉 ‘세일러(sailor)’의 군복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도 그 교복은 오랫동안 유지됐다. 그만큼 우리의 사고가 일제 교육에 익숙했다는 방증이다.

다행히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런 교복이 퇴출됐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사복을 입고 마음껏 개성을 살리면서 학교생활을 누렸다. 지금의 40대 일부가 그 혜택을 누렸다. 이른바 ‘써니’ 세대들이다. 하지만 교복을 입지 않고 학교를 다녔던 시기는 길지 않았다. 기성세대들은 아이들이 분방하게 입고 다니는 게 영 못마땅했다.

사치품에 마음이 팔려 있다거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거나, 문란하다거나, 교실의 학습 분위기가 흐트러진다거나 따위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이 교복을 입고 다녔던 폭력성에 저항하거나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입었던 교복을 기준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복을 입지 않아 그런 비판의 사태가 실제로 일어났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물론 일부 그런 모습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거쳐야 할 과정일 뿐 본질이 아니다.

어떤 한 부분을 부풀려 전체를 단정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전형이었다. 학생들의 명품 옷 경쟁을 탓할 수는 있지만 어른들이 그렇게 살면서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에 맞게 합리적으로 경제적 선택을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명품 옷을 어색하게 입는 것보다 싸고 좋은 옷을 미적으로 코디해 입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가르쳤어야 했다. 그것 자체가 경제 교육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느 학교도 그런 교육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반교육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기성세대의 어리석은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성과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사복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더니 어느 날 갑자기 교복을 입기 시작했다. 만약 교복을 처음 입었던 학교가 평판이 좋지 않은 학교였다면 다른 학교들이 따라 했을까. 특목고가 처음 입었다. 그러니 선망도 따랐다. 허영심도 한몫했다.

게다가 새로 입기 시작한 교복은 파스텔 톤, 버버리 체크에 디자인도 세련됐으니 교복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미국 아이비 사립학교 같은 느낌이 드니 반감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교복이라는 것에 대한 기준이 바로 기성세대들이 이전에 입었던 교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아이들을 교복에 가뒀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만 가르치거나 인성을 연마시키는 곳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연대적 체험과 실천을 익히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개성을 가르치며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연대의 방식을 키우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교복은 그러한 가치에 반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교복이 주는 장점들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가치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더 큰 가치를 갖고 있다면 생각을 달리했어야 한다.

게다가 교복이 저렴한 것도 아니다. 어지간한 어른들 슈트 값에 버금간다. 그뿐인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없고 심지어 교복을 둘러싼 ‘짬짜미’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도대체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어린 학생들이라고 그런 것을 모른다고 여긴다면 그건 어른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교복은 단순히 개성을 말살하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자신의 외적 표상을 표현하는 것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교복의 폭력성은 몸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춘기 학생들은 하루가 다르게 몸이 자란다. 그야말로 나무처럼 자란다. 그런데 교복을 3년 동안 입어야 한다. 1학년 때는 펑퍼짐한 자루처럼 교복을 입고 2학년 때 잠깐 몸에 맞는다.

3학년 때는 거의 7부 옷 수준이다. 몸에 옷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옷에 몸을 구겨 넣는다. 이런 폭력성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몇 가지 장점 운운하며 교복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인격적이며 반교육적인지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