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주부 엄현진 씨의 키친 스토리
“식탁의 격, 가족을 위하는 마음 아닐까요?”
[김수정 머니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을 표현한다(What you eat is who you are).” 스타 셰프 샘킴의 요리 철학으로 화제가 된 말이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떤 재료를 어떻게 조리해 담아내고, 누구와 나누느냐에 따라 식탁의 품격은 갈리기 마련이다.

서울 연희동에 사는 주부 엄현진(47) 씨의 식탁 역시 그녀를 꼭 닮았다. 정갈하지만 화사하되, 건강을 최우선으로 담는 그녀의 부엌 구석구석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났다.

올해로 전업주부 생활 24년 차인 엄현진 씨는 이화여대 재학시절 아나운서를 꿈꿨던 재원이었다. 그러던 중 대학 동문인 양가 아버지들의 소개로 2학년 겨울방학 남편을 만났다. 두 사람은 2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고, 엄 씨는 스물셋의 어린 나이에 큰 집안의 첫째 며느리로 1년 반 정도 시댁에서 살게 됐다.

이후의 이야기는 판에 박힌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큰 집안의 맏며느리답게 시어머니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아, 살림고수가 됐다는 전개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시어머니는 참 특별한 분이세요. 신혼 초 한 집에 살 때에도, 제게 설거지 한 번을 안 시키셨어요. 손맛도 꽤 좋으신데 무작정 음식 비법을 전수하려고 하시거나, 부엌살림을 강요하신 적도 결코 없었어요. 그리곤 말씀하셨죠. ‘이런 건 누구든 하고자 하면 다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공부는 다르다. 네가 하고 싶은 공부에 더 매진해라’라고 말이죠.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 고마움을 전달하고자 시어머니의 생신 상을 차린 게 저의 첫 정식 요리였죠. 온갖 요리책과 잡지를 동원해 코스 요리를 만들었는데 전채요리에 쓰인 새우 한 마리 손질하는 데만 30분이 걸렸죠(웃음). 그래도 어떻게든 디저트까지 만들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사실, 그의 부모님도 그가 주부의 삶보다는 전문 직업인으로서 더욱 성장하길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도 엄 씨에게 이렇다 할 살림살이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단, 그가 누릴 수 있던 축복 중 하나는 친정어머니의 탁월한 손맛이었다.

가족들의 식사를 매끼 허투루 넘기지 않았던 어머니의 음식들은 신선하고, 맛있었다. 어머니가 식기와 장식에도 관심이 많으셨던 터라 가족의 식탁은 늘 화사했고, 가족 간 대화가 넘쳤다. 이런 환경 탓에 신혼 초기만 해도 살림초짜였던 엄 씨는 점차 독자적인 식탁을 만들어 꾸려 나갔다.

굳이 유명 요리학원을 등록하기보다는 직접 요리 관련 잡지와 책을 탐독하면서 자신만의 식탁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몇 해 전 독학으로 푸드스타일리스트 자격증까지 취득한 엄 씨는 이제 자타공인 프로 살림꾼이 됐다. 아직도 그의 냉장고 문에는 해보지 못한 새로운 요리 레시피들이 가득 붙어 있다.

“식탁을 꾸민다는 게 단순히 가족의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같은 음식이라도 조미료 하나, 음식이 담기는 식기에 따라 느낄 수 있는 맛과 분위기가 다르거든요. 심지어 저는 아이들이 배달음식을 시켜도 그 채로 먹게 두지 않고, 꼭 예쁜 그릇에 담아서 줘요. 물론, 똑같은 맛이겠지만 이런 사소한 차이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줄 거라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식탁의 품격이죠. 굳이 비싼 그릇이나 식재료가 아니더라도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 식탁의 격은 올릴 수 있다고 봅니다.”
“식탁의 격, 가족을 위하는 마음 아닐까요?”
◆식탁의 즐거움

엄 씨 식탁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유기농 재료, 믹스 앤드 매치, 자연 가공 등이다. 언뜻 뻔한 내용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만의 지혜가 곳곳에 묻어난다. 무엇보다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재료 본연의 맛과 영양이 살아 있는 메뉴들로 가득하다.

그의 냉장고를 들여다보면 빼곡하게 조미료들이 쌓여 있다. 대부분 시판 조미료가 아닌 개별 용기에 이름을 붙여 놓은 천연 조미료다. 멸치가루부터 표고버섯, 새우 등 다양한 조미료들이 즐비하다.

이 중 단연 눈에 들어온 것은 말린 치자열매다. 시댁에서 직접 기르시는 치자나무의 치자열매를 자연 건조시켜 녹두부침개 등 음식의 색을 낼 때 사용한다. 한방에서는 치자열매를 불면증과 황달 치료에 쓰는데 소염, 지혈, 이뇨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군량미의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치자 물에 담갔다가 쪄서 저장하기도 했다.

또한 음식에 설탕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신 꿀이나 아가페 시럽을 활용해 음식의 단맛을 조절한다. 단, 향이 강한 모과청을 담글 때만은 설탕을 활용한다. 아가페 시럽과 꿀은 향이 강해 모과 본연의 향을 해칠 수 있다.
“식탁의 격, 가족을 위하는 마음 아닐까요?”
김치도 빠질 수 없는 이 집의 건강식품이다. 그중 파김치는 이들 식탁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수 아이템이다. 파김치는 소화 작용을 촉진시키는 성분이 대량 함유돼 있어 식사 시 파김치를 함께 먹으면 속을 편하게 유지시켜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제철 과일과 채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도 엄 씨 가족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준다. 무엇보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식탁 중 하나는 디저트 시간이다. 가족들은 물론, 지인들을 초청해 티파티를 하는 것은 그의 즐거운 일과 중 하나다.

특히, 앞마당에 철쭉이 예쁘게 피는 봄날 오후, 즐기는 티파티는 향긋한 홍차와 몇 가지 다과들만 내놓아도 훌륭한 대화의 장소로 변모한다. 집에 있는 어떤 접시라도 잘 활용하면 훌륭한 센터피스 역할을 할 수 있다.

단, 내놓는 티 푸드 중 한 가지 정도는 직접 만들어 내놓는 것이 좋다. 엄 씨도 케이크나 마카롱 등 디저트류의 경우, 100% 유기농 베이커리에서 사는 경우가 있지만, 만들기 쉬운 쿠키나 스콘 등은 직접 만들어 내놓는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식탁을 공유하는 건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아이들이 어느덧 훌쩍 대학생이 됐지만 저희는 자주 소통하고, 대화해요. 그 중심에 식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창한 요리가 아니더라도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과 따뜻한 차만 있다면 누구든 충분히 풍요로운 식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hohokim@hankyung.com

[기사 인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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