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리학 카페]
어린 시절의 로망 ‘달걀 프라이와 쌀밥’을 추억하며
‘프루스트 현상’ 결코 잊히지 않는 후각과 미각
(일러스트 전희성)

[한경비즈니스 칼럼=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프루스트 현상이란 것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된 것으로, 냄새를 통해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억해 내는 현상을 말한다.

“사물에 대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고 우리가 두고두고 회상하게 한다.” 프루스트의 이 말은 이미 신경과학자들로부터 옳다는 검증을 받았다.

경험적으로도 우리는 안다. 시골에 내려가면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흙냄새와 나무 냄새, 거름 냄새 등을 통해 갑자기 오래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진화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후각과 미각은 우리 주위에 위험 물질이나 독성 물질들이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는 생존에 매우 유용한 감각이다.

다만 인간은 먹이 사냥이나 짝짓기 행동, 포식자 탐지 등 다방면에서 시각이 후각과 미각을 대체하게 돼 이 두 감각이 다른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퇴화했지만 그 중요성은 여전하다.

1970년대 초 보온 도시락이 처음 나왔다. 초기에는 스티로폼으로 스테인리스 스틸 밥공기가 들어갈 모양을 만들고 반찬통과 물통이 들어갈 공간을 가진, 비닐로 커버를 씌운 다소 조악한 형태였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열면 온기는 남아 있었다. 밥공기에 반숙한 달걀 프라이를 얹은 도시락을 열고 흰쌀밥 사이로 스며든 터진 노른자를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물론 이 맛을 즐긴 이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프라이 뺏기면 ‘분노’하던 그때

달걀이 상대적으로 귀했기 때문에 프라이를 비롯한 계란 관련 요리는 우리 세대 때에는 하나의 로망이었다. 소풍을 가도, 여행을 떠나도 삶은 달걀은 필수 품목이었다.

시험이 끝난 날 저녁 부모님과 함께 중국집에서 먹었던 짜장면과 탕수육은 최고의 외식이었다. 그때도 부모님의 ‘사전 허락’하에 소스가 따로 나오고 달걀 프라이를 얹어 주는 간짜장을 주문하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간짜장에 달걀 프라이를 얹어 주는 요리 방식은 경상도 등 일부 지방에만 있는 모양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자취하던 한 서부 경남 출신의 대학 후배가 간짜장을 먹기 위해 서울의 모 대학교 앞 중국집을 찾았다가 대판 싸웠다고 했다.

간짜장을 시켰는데 달걀 프라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가난한 자취생이 그냥 짜장도 아니고 비싼 간짜장을 큰맘 먹고 시켰는데 프라이가 없었으니 그의 좌절(?)과 분노도 이해할 만하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간짜장+달걀 프라이’라는 조합과 프라이의 부재에 대한 항의에 중국집 주인은 또 얼마나 황당했을까.

역시 그 시절 이야기다. 다른 후배에게 점심을 사주러 학교 근처 식당을 찾았다. 나는 정식을 주문했다. 정식의 다른 반찬은 매일 바뀌어도 달걀 프라이는 항상 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요리를 시킨 그 후배가 음식이 나오자마자 내게 묻지도 않고 내 정식의 프라이를 한입에 날름 집어먹는 게 아닌가. 자기도 정식을 시킬 것이지 자신은 다른 요리를 시키고 내 밥상에 오른 프라이를 슬쩍하는 후배가 무척 얄미웠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아차!’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후배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몇 년 전 나는 그 후배에게 그날의 사건을 정식으로 사과했다.

지금은 유명한 글로벌 기업의 간부로 있는 후배는 “형은 언제 적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라며 웃어넘긴다. 자기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금기를 깨뜨린 못난 선배라는 혼자만의 심리적 부채 의식을 20여 년 만에 청산한 셈이다.

대학생이 된 내 아들과 딸은 흔해 빠진 달걀 요리를 좋아하는 아비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우리 세대의 로망이었고 추억이었고 역사였던 달걀이 나는 좋다.

가끔씩 달걀 프라이의 반숙 노른자와 섞인 쌀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일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그럴 때면 온갖 추억들이 조건반사처럼 주마등이 돼 뇌리를 스친다.

요즘 조류독감(AI) 때문에 양계 농가에서 기르던 닭들을 살처분하는 바람에 달걀 값이 천정부지라고 한다. 빨리 AI가 진정돼 농민들의 시름도, 소비자들의 근심도 사라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