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제품도 구매 불사하는 소비자들… 감성 자극하는 브랜드 돼야 (사진) 이탈리아 스타일 가전 브랜드 스메그의 대표 냉장고 모델(FAB28)은 총 21가지의 컬러와 패턴이 있다. /스메그 제공
[한경비즈니스 칼럼=허지성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최근 대형 서점들을 방문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자 제품 판매 코너가 보강돼 규모가 대폭 커졌다는 점이다.
과거 헤드폰·이어폰이나 전자 제품 액세서리 등에 한정돼 있던 제품 카테고리가 이제 다양한 브랜드의 가전제품들로 채워져 있다. 블루투스 스피커와 오디오 시스템, LP 턴테이블은 기본이고 공기청정기와 가습기, 심지어 토스터 등도 취급하고 있다.
매출을 어떻게든 늘려보려는 서점들의 헛발질일까. 아니다. 소비자들도 큰 관심을 가지고 판매 코너를 구경한다. 실제로 가전제품이 활발히 판매되고 있다.
스메그(SMEG)라는 브랜드를 안다면 트렌드에 꽤나 민감한 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백화점 수입 가전 코너에서는 스메그 냉장고를 과거 독일 브랜드 밀레나 미국 브랜드 제너럴일렉트릭(GE)의 냉장고만큼이나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가격을 알고 나면 깜짝 놀랄 수 있다. 크기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사용하는 양문형 대형 냉장고의 절반에서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최신형 대형 냉장고와 유사하거나 일부 모델은 심지어 더 비싸기 때문이다.
별다른 기능도 없는데다가 크기에 비해 내부 공간이 좁기까지 하다. 이런 냉장고를 왜 그리 비싼 가격을 주고 살까. 이른바 ‘명품 인테리어 오브제’의 속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70년 전 설립돼 여전히 가족 경영을 고집하는 이탈리아 브랜드 스메그는 아직도 수작업을 통해 냉장고를 생산하고 있다. 스메그 제품에는 스토리텔링이 묻어 있다.
매끈한 외관에는 파스텔 톤 또는 원색 패턴의 프린트가 새겨져 있다. 레트로 느낌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전면에는 스메그의 알파벳 로고가 박혀 있는 등 디자인부터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국내에서는 ‘강남 냉장고’라는 별칭을 얻으며 인기몰이 중이다. 스메그 소비자들은 기존 냉장고를 교체하는 용도보다 집 안 인테리어에 포인트를 주기 위한 세컨드 가전으로 구매한다.
◆ 혁신 기술에 라이프스타일 접목한 가전 명품들
이처럼 크기·용량·신기능 등을 중심으로 연식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던 가전제품 시장이 달라지고 있다. 저가 제품 위주의 토스터 시장에 ‘죽은 빵도 살려 낸다’는 유행어와 함께 최근 30만원이 넘는 고가의 신제품을 내놓고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일본의 가전 업체 발뮤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이끌고 있는 기업 중 하나다.
발뮤다는 최근 커피포트·밥솥 등 고가의 주방 가전제품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발뮤다는 선풍기·가습기 등 계절 가전 위주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주방 가전으로 다변화하는 데 성공했다.
100만원이 넘는 진공청소기로 유명한 영국의 다이슨 또한 평균가격 10만원대 초반의 헤어드라이어 시장에 50만원이 넘는 신제품을 출시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수입 가전 시장의 매출이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2016년 백화점 내 매출은 전년도 대비 약 2배 정도 증가했다. 백화점업계의 2016년 연매출이 전년 대비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큰 폭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가의 외산 가전제품들이 이토록 승승장구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선 소비자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 혁신 제품들의 본원적 경쟁력을 빼놓을 수 없다. 제조사들은 고객들의 핵심 문제들을 기존과 상이한 방식으로 정의했다. 또한 이를 해결한 제품들은 초기에 고가 소품 가전 시장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기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날개를 사용해 자연과 가장 가까운 바람을 만들어 낸다는 발뮤다의 선풍기, 헤파 필터를 채택하고 먼지봉투를 없앴고 사이클론 기술을 채택해 흡입력을 극대화한 다이슨 청소기, 미세먼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우려가 증가하면서 폭발적으로 시장이 커진 미세먼지 제거 기능의 공기청정기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에 못지않게 소비자들이 가전이라는 제품 카테고리를 자신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의 표현 대상으로 간주하려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집 안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가전제품들의 디자인적 요소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스메그 냉장고를 비롯해 이탈리아 주방 가전 브랜드인 드롱기 등도 디자인에 방점을 찍은 대표적인 브랜드다. 드롱기 제품들은 인테리어 소품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을 자랑한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국내 가전 업체인 LG전자도 세탁기·냉장고·TV 등의 가전제품 카테고리에서 디자인에 방점을 찍은 프리미엄 제품으로 ‘시그니처’ 시리즈를 출시했다. 이들 제품 또한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가정용 블루투스 스피커는 이러한 추세가 수년 동안 지속되고 있고 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인테리어 오브제 요소를 갖춘 스피커는 뱅앤올룹슨 등 일부 고가 브랜드에서 출시돼 왔고 최근에는 브랜드들이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스위스 브랜드 제네바·하만카돈·B&W·야마하 등은 인테리어 오브제로도 손색이 없는 스피커 제품들을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사진) 일본 브랜드 '발뮤다'의 티폿 커피 포트와 토스트기다. /발뮤다 제공
◆ 소비자의 취향 제대로 반영한 제품 각광
단순히 ‘프리미엄’을 지향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섬세한 취향’을 공략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통해 형태로 시장을 공략하는 제품들도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동안 캡슐 커피로 성장을 구가하던 커피메이커 관련 시장은 이제 원두를 직접 가공해 소비하는 하이엔드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00만원대에서 시작되는 소형 에스프레소 머신이 많이 팔리고 있고 일본에서는 커피를 손수 내려 마시는 ‘핸드 드립’ 시장에마저 전자 제품의 공략이 시작됐다.
예를 들어 최근 일본에서 출시된 발뮤다의 커피포트는 단순히 ‘비싸 보이는 디자인’이 아니라 핸드 드립 커피라는 취향 소비에 최적화된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 전기 커피포트로는 드물게 길고 ‘S’자 형태로 구부러진 주둥이를 가지고 있어 실제 커피를 핸드 드립할 때 사용할 수 있다.
발뮤다 커피포트는 기존 커피포트 대비 3배가 넘는 가격이다. 가열 시간이나 용량 등도 시장에 존재하는 기존 제품 대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핸드 드립을 통한 고급 커피 소비’ 라는 소비자 욕망을 효과적으로 저격해 소비자들의 지갑을 여는 데 성공했다.
파나소닉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최근 일본에서 핸드 드립 커피를 위한 가정용 커피 로스터를 출시하면서 아예 볶지 않은 생두 배송 서비스까지 병행하는 등 취향 기반의 프리미엄 가전 시장을 잡으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소비자의 취향이라는 변수는 브랜드 신뢰도와 가성비가 전통적으로 중요한 가전의 영역에서조차 소비자들이 프리미엄을 기꺼이 지불하려는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뮤다와 같이 업력이 짧은 신생 브랜드가 잇달아 흥행 제품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소비자들의 취향을 제품에 제대로 반영하면 기존 제품 대비 몇 배의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지닌 고객들이 상당히 많다는 믿음 때문이다.
데라오 겐 발뮤다 사장은 그린 팬 선풍기 출시를 위한 시장조사 과정에서 ‘정말로 혁신적인 선풍기가 출시된다면 기존 제품 대비 가격이 7배가 넘더라도 구매하겠다’는 소비자가 전체의 7% 가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제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 소비자 입소문이 성공 여부 결정
고가의 가전제품들이 주류 시장으로 확산되기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충족할 수 있는 제품이라면 가격적으로 부담이 되더라도 구매하겠다는 소비자들은 제품에 대해 만족한다면 취향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제품에 대한 선호가 입소문을 바탕으로 확대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이러한 조건은 의외의 흥행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소비자들 간의 추천이 그 어느 때보다 제품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연결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에 목말라 있다.
소비자들의 취향을 반영하거나 선도할 수 있는, 그래서 그 장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제품들은 그 카테고리를 막론하고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처럼 보였던 냉장고·선풍기·헤어드라이어 등의 제품 영역에서조차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취향을 제품에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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