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최초의 비트코인 논문에서 그가 사용한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 익명성을 중시하는 초창기 비트코이너들은 사토시 나카모토를 일종의 코드로 인식했다. 대부분의 비트코이너들은 창시자가 일본과 별 관계가 없다고 믿는다. 논문과 e메일에서 유창한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암호 기반 화폐 연구의 선두 그룹 중 주목할 만한 일본인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일본인 중에서 비트코인의 확산과 전파에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을 찾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비트코인 연대기에서 획기적인 족적을 남기고 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일본인 아닐 것
일본은 2017년 8월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기반으로 한 채권을 발행했다. 일본 재무 정보 제공 업체 피스코가 3%의 이자 지급과 3년 만기 후 200BTC를 보장하는 채권을 발행했고 이날 81만3000달러의 가격에 팔렸다고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피스코 담당자는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운 비트코인으로 금융 상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 실험적으로 발행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3년 후 비트코인을 환급할 때가 되면 파산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 채권 판매 당시 비트코인 200개의 시장가격은 90만 달러였다. 비트코인 가격은 4개월 만에 5배 정도나 올랐다. 비트코인 가격이 폭락하지 않는 한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
2017년 6월에는 일본의 비트코인 거래소 비트프라이어가 고객들에게 비트코인 보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미쓰이스미토모보험이 제공하는 상품으로, 거래와 관련해 기술적인 문제로 야기되는 손실을 보상한다. 거래소 해킹에 대비해 고객을 보호하는 장치다.
일본 경제신문 닛케이 보도에 따르면 1000만 엔에서 10억 엔까지 해킹이나 절도에 의한 손실을 보전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온라인 거래소는 고객의 계좌에 담긴 자산을 위임받아 운영하기 때문에 비트코인 생태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점이다. 일본에서처럼 대형 금융회사가 보험 상품을 제공하면 거래 수수료를 추가적으로 부담하더라도 보험에 가입한 거래소를 선호할 것이다. 비트코인 거래소 관련 보험 상품 제공은 비트코인이 주류에 진입하고 안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금융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비트코인 관련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정책 환경이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1일 일본에서 비트코인을 합법적인 지불 수단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에서의 법제화는 관객 모두의 예상을 깨고 급속하게 결말이 뒤집힌 드라마에 가깝다.
2014년 2월 일본에 본점을 뒀던 세계 최대의 비트코인 거래소 마운트곡스가 해킹으로 파산했다. 마운트곡스는 일본 도쿄에 자리했을 뿐 달러로 거래하는 글로벌 온라인 거래소였다. 법화로 비트코인을 구입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비트코인 거래소로서도 상징성이 큰 거래소였다. 2013년 중반 중국의 위안화 거래소들이 개업하기 전까지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의 6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회사는 최종적으로 65만 비트코인을 해킹으로 분실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비트코인 총발행량의 5%에 이르며 당시 시가로도 3억70000만 달러의 손실이었다.
대표이자 오너인 마크 카펠레스는 프랑스인이다. 일본 검찰은 카펠레스 대표를 데이터 조작과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했다. 단지 해킹만이 아니라 회사 경영자들의 고의적인 횡령과 방만한 자금 운영이 비극을 초래했다는 내부 고발자들의 제보가 있었다.
이후 일본은 비트코인 황무지가 됐다.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세계적인 신종 사기 사건이라는 뉴스로 비트코인을 처음 접했다. 비극을 초래하는 정체 불명의 신물질을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몇 개월 후 일본 집권 자민련의 태스크포스팀인 ‘IT전략특명소위원회’는 비트코인을 민간의 자율 규제에 맡기고 무리하게 정부가 간섭하지 말자는 의견을 발표했다. 비트코인 사업자들은 관계 기관의 후원에 힘입어 ‘일본디지털자산협회(JADA)를 발족, 비트코인에 관한 자체 규율에 나섰다. 일본의 거래소들은 익명 거래를 차단하며 자금 세탁으로 의심 가는 거래는 규제 당국에 보고하기로 했다.
1년이 지난 2016년 5월, 일본 국회에서 1개월간의 논의를 거쳐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면서 불법이나 무자료 거래를 규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2017년 4월 1일부터 집행됐다.
일본 정부는 중과세에 대한 우려도 해소했다. 2017년 7월부터 비트코인 구입 시 8%를 지불하던 소비세를 면제했다. 일본 국세청은 9월 과세 지침도 발표했다. 비트코인 투자나 거래로 얻은 소득은 소득 신고에 포함해야 하고 투자자 과세 구간에 따라서는 최고 세율인 45%까지
적용받을 수 있지만 장기 보유하면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된다. 논의 단계에서는 도박으로 간주해 세금을 매긴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거래 손실을 차감한 차익 실현에 대한 과세로 방향이 잡혔다. 기업과 개인들이 투자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정책적 환경이 예측 가능해진 것이다.
법안이 발효된 4월 한 달 동안에만 비트코인 가격은 1000달러에서 2000달러를 돌파했다. 4월부터 엔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비트코인 거래 비율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비트코인과 암호화폐(crypto currency) 분야에서 세계의 중심지가 됐다.
[돋보기: 한 박자 느린 암호화폐 가격 상승의 원인]
'이상한 자산’에 대한 호재는 확인 후 반영된다.
2017년 4월 이후 보이고 있는 비트코인 가격의 강력한 상승 압박이 일본의 합법화 때문이라면 이는 비트코인 현상의 흥미로운 단면을 보여준다. 일본의 합법화는 4월 1일 시작됐지만 법안은 1년 전부터 일본 정부와 여당에 의해 검토 발의됐고 결국 통과됐다. 사실상 확정된 미래는 현재 가격에 영향을 미쳐야 마땅하다. 하지만 법안이 집행되기 시작하고 나서 가격이 움직였다. 언젠가 망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이상한 자산’에는 1년 앞의 계획된 일정이라는 미래도 사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비트코인 회의론이 가격의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는 현상은 2017년 7월에도 반복됐다.
2017년 7월 24일 비트코인 연대기에 두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대형 뉴스가 터졌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레저엑스(LedgerX)에 비트코인 선물 옵션을 포함한 파생 상품 거래 허가를 내줬다. 미국의 정부 기구가 주류 금융회사들에 비트코인을 취급해도 좋다는 일종의 허가장을 내준 시점이지만 뉴스 이후 비트코인 가격은 폭등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 정부의 비트코인 선물거래 허가는 12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와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했고 이 시점이 돼서야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대형 사건이 됐다.
경제학자들이 ‘마찰’로 간주하는 이론과 현실의 간극이다. 마찰로 인한 간극이 크다는 것은 아직도 초기라는 뜻이다. 즉, 남보다 우월한 정보가 아닌 알려진 지식만을 가지고도 이익을 얻을 기회가 아직 많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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