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업계 "소비자가 최고의 제품 개발자"
단종 제품 재출시도
당시 어린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각 회사가 주요 제품을 랜덤으로 포장해 평소 겪어보지 못한 제품을 맛보는 색다른 즐거움도 있었지만 서로 좋아하는 과자를 차지하겠다며 형제간에 다투는 부작용도 있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과자 선물 세트는 추억이 됐다. 당시 인기 있던 과자 제품도 대부분이 자취를 감췄다. 소비자의 입맛은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다. 출시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자취를 감추는 제품도 있다.
식품업계는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비자 의견을 제품 개발 과정 등에 적극 반영하는 추세다. 최근에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단종된 제품을 재출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오리온, ‘소비자 의견 공유 시스템’ 구축
오리온은 지난해 소비자 의견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VOC(Voice Of Customer) 사내 공유 시스템’을 구축, 전 임직원이 수시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의견을 듣고 신제품 개발 및 기존 제품 개선에 반영하기 위한 조치다.
오리온은 지난해 7월 “다이제를 한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들면 좋겠다”는 소비자 의견을 반영해 ‘다이제 미니’를 출시했다. 다이제 미니는 지름 40mm 크기로, 한입에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입에 과자가 묻지 않고 부스러기가 잘 생기지 않는 점 때문에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오리온에 따르면 다이제 미니는 출시 이후 4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240만 개를 돌파하는 등 다이제 전체 매출의 약 20%를 차지한다.
오리온은 지난해 “한 번에 먹기에 양이 많고 보관이 번거롭다”는 소비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고래밥의 중량을 조정하고 가격을 낮추기도 했다. 최근에는 소비자 의견에 따라 ‘바나나 초코파이’에 대한 우유 함량을 늘리고 바나나 생크림을 넣는 등 맛과 식감을 개선했다.
오리온 관계자는 “고객의 취향과 니즈를 반영한 제품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며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소비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제품을 지속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제과는 지난해 6월 소비자 의견을 반영한 아이스크림 제품을 출시해 대박을 터뜨렸다.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과 공동 개발한 ‘거꾸로 수박바’가 주인공이다. 두 회사는 “초록색 부분을 늘려 달라”는 소비자의 지속적 요구를 반영해 신제품을 선보였다.
거꾸로 수박바는 기존 수박바의 빨간색 부분(멜론·수박 맛)과 초록색 부분(딸기 맛)의 위치를 바꾼 것이 특징이다. 기존 수박바에서 상대적으로 작았던 초록색 부분을 크게 늘려 딸기 맛을 강화했다.
롯데제과 관계자는 “거꾸로 수박바는 여름 시즌 동안 약 700만 개가 판매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며 “그 덕분에 기존 수박바 또한 약 10%의 매출 성장세를 보였다”고 말했다.
◆CJ제일제당, 주부 의견 적극 반영
종합 식품 기업도 주부 등 소비자와의 스킨십을 강화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소비자 참여 프로그램을 통해 의견을 청취하고 제품에 반영한다. CJ제일제당 ‘톡톡 주부 연구원’은 소비자의 아이디어 공유를 통해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는 참여형 프로그램이다.
연구원에 선발되면 맛집 탐방이나 시판 제품에 대한 조사 등 트렌드 체험을 통해 아이디어를 발굴한다. 아이디어는 실제 제품 개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5년 출시된 ‘비비고 곤드레 나물밥’이 대표적이다.
비비고 곤드레 나물밥은 한 주부 연구원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손이 많이 가는 나물 요리로 가정에서 쉽고 간편하게 건강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아이디어로 평가 받았다. 비비고 곤드레 나물밥은 CJ제일제당의 대표 냉동밥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70건이 넘는 주부 연구원의 아이디어가 상품화 준비 단계에 있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톡톡 주부 연구원은 평범한 주부의 아이디어가 제품화된다는 메리트 때문에 경쟁률이 높다”며 “기수마다 평균 15명 정도 선발하는데 매번 100여 명 이상이 지원해 평균 8 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대상은 “간장을 선택하기 어렵다”는 소비자 의견을 반영해 전면에 각각의 맛을 표기한 간장 제품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
대상은 지난해 5월 청정원 ‘햇살담은 간장’ 리뉴얼 제품을 선보였다. 제품 종류는 양조간장 ‘깔끔한 맛’과 ‘깊고 풍부한 맛’, 양조 진간장 ‘진한 맛’과 ‘진한 맛 플러스’ 등으로 소비자가 간장에서 원하는 대표적인 맛 속성을 각 제품 전면에 표기했다.
대상 관계자는 “간장 사용에 대한 소비자 조사에서 직접 맛보기 전에는 간장의 맛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대표적 불만 사항으로 나타나 관련 제품을 출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빙그레, 컬래버레이션 제품으로 주목
식음료업계도 소비자의 의견을 제품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빙그레는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은 캠페인에서 착안해 관련 제품을 출시했다.
빙그레는 지난해 7월 바나나맛우유에 사용되는 빨대를 소재로 한 ‘마이스트로우’ 영상 5편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공개했다. 해당 영상은 조회 수가 3000만 뷰를 넘어서는 등 화제를 모았다.
빙그레는 해당 영상을 본 소비자의 빨대 제품에 대한 출시 요청이 잇따르자 제품을 실제로 선보였다. ‘링거 스트로우’ 등 3종은 출시 1주일 만에 전량 판매되는 등 현재까지 총 8만여 개가 팔려나갔다.
빙그레 관계자는 “마이스트로우 캠페인은 바나나맛우유의 상징인 ‘빨대’를 소재로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함과 동시에 브랜드 강화와 매출 상승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와 패션업계의 의견을 반영한 슬리퍼와 의류 등의 컬래버레이션 제품도 인기다.
빙그레는 지난해 5월 휠라코리아와 협업해 메로나 특유의 색을 입힌 운동화 ‘코트디럭스 메로나’를 선보였다. 해당 제품은 초도물량 6000족이 출시 2주 만에 전량 판매되는 등 화제를 모았다. 빙그레는 스파오(이랜드)와 협업해 ‘메로나 티셔츠’, ‘메로나 가디건’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매일유업은 지난해 9월 기존보다 용량을 늘리고 전용 빨대를 부착해 편의성을 높인 요구르트 제품을 선보였다.
어린이 요구르트 ‘엔요’는 “기존 80mL 제품으로는 용량이 부족해 아이들이 한 번에 평균 1.5개씩 섭취하는 일이 잦다”는 소비자 의견을 토대로 100mL 제품으로 리뉴얼한 제품이다. 음용 시 빨대를 사용하는 어린이의 습관을 고려해 개별 용기마다 전용 빨대를 부착해 편의성을 극대화했다.
기존 제품의 조리법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재창조해 내는 ‘모디슈머(modify+consumer) 열풍’을 반영한 제품도 인기다.
삼양식품은 새로운 레시피로 자신만의 요리를 즐기는 소비자 트렌드를 반영해 최근 쌈장라면과 까르보불닭볶음면을 출시했다.
쌈장라면은 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 레시피’로 소개된 조리법을 활용한 제품이다. 분말스프에 쌈짱분말을 약 7% 함유했다. 된장·고추장을 비롯해 파·마늘 등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쌈장을 라면에 한 스푼 정도 넣으면 진한 국물 맛을 낼 수 있다는 입소문으로 많은 이가 따라한 레시피에서 착안했다.
까르보불닭볶음면은 매운맛의 핵심인 액상스프 외에 모차렐라치즈분말·크림분말·파슬리 가루 등이 함유된 분말스프를 별도로 제공해 진한 크림 맛과 불닭의 매운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한 제품이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까르보불닭볶음면은 기존 ‘불닭볶음면’이 인기를 끌면서 파생된 소비자들의 레시피에서 착안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소비자의 요청으로 기존 제품 속 구성품을 별도 제품으로 출시한 사례도 있다.
팔도는 지난해 9월 ‘팔도비빔면’의 34년 노하우가 담긴 비빔장(액상스프)을 ‘팔도 만능비빔장’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시했다. 팔도 홈페이지와 고객센터·온라인 등을 통해 “팔도비빔면의 액상스프를 따로 판매해 달라”는 소비자들의 요청에 따라 제품을 선보이게 됐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팔도 관계자는 “1차로 생산한 비빔장 15만 개가 판매 시작 22일 만에 완판됐고 정식 제품으로 출시된 이후 3개월 동안 62만 개가 소진되는 등 신규 수입원으로 자리 잡았다”며 “다양한 요리에 어울리고 국내외 여행 시 휴대가 간편하다는 점에서 인기”라고 말했다.
◆대학생 의견 담은 ‘신라면블랙사발’
소비자의 재출시 요구로 단종 제품이 부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농심은 2009년 국내에서 단종됐던 ‘감자탕면’을 지난해 9월 새롭게 출시했다. 농심은 일본과 중국 등 돼지고기 국물에 익숙한 해외에서 제품 판매를 이어 왔다. 해외에서 제품을 맛본 소비자의 재출시 요구를 바탕으로 기본 분말스프 외에 후첨 액상스프를 추가해 풍미를 배가한 제품을 선보이게 됐다는 것이 농심의 설명이다.
농심은 최근 전자레인지 조리가 가능한 ‘신라면블랙사발’을 출시하기도 했다. 농심은 “컵라면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면 더 맛있다”는 1020세대의 의견에 주목, ‘전자레인지 용기면’을 콘셉트로 제품 개발을 기획했다.
농심은 시장조사를 위해 회사의 대학생 마케팅 서포터스인 ‘펀스터즈’를 활용했다. 회사가 운영하는 ‘주부 모니터’도 제품 개발에 기여했다. 농심은 신라면블랙사발의 맛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주부 모니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농심 관계자는 “신라면블랙사발은 대학생과 주부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섭씨 영상 160도까지 견딜 수 있는 폴리프로필렌(PP) 용기와 쫄깃함이 더해진 새로운 면발, 돼지뼈를 넣어 깊고 진해진 국물 등을 적용한 제품”이라며 “해당 제품으로 ‘끓여 먹는 컵라면 시대’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오뚜기는 2010년 출시된 ‘보들보들 치즈라면’의 맛을 기억하는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지난해 9월 ‘리얼치즈라면’을 새롭게 출시했다. 리얼치즈라면은 국내 최초로 액상 치즈 소스를 적용한 라면이다.
해태제과는 2005년 출시 이후 단종됐던 아이스크림 ‘토마토마’를 지난해 3월 재출시했다.
지난해 2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토마토마를 다시 먹고 싶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던 게 제품 재출시의 계기가 됐다. 해당 글은 하루 조회 수만 9만여 건에 달했고 관련 청원도 이어졌다. 토마토마는 아삭한 얼음 알갱이와 토마토를 섞은 토마토 맛 슬러시 아이스크림으로, 해태제과는 12년 전 맛 그대로 제품을 출시했다.
해태제과 관계자는 “토마토마는 2005년 출시 당시 토마토를 주원료로 한 최초의 아이스크림으로 주목받으면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기존 제품 우선 생산 원칙에 따라 공급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2년여 만에 시장에서 사라졌다”며 “지난해 3월 재출시 이후 27일 만에 판매량 77만개(약 9억원어치)를 기록하는 등 스테디셀러로 안착한 상태”라고 말했다.
한경비즈니스 최은석 기자 choi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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