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상화폐 출시했다 정부 압박에 두 손…‘탈중앙화’ 없이는 불가능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비트코인은 강했다’ 저자]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회장이 1월 9일 비트코인을 ‘사기’라고 했던 자신의 지난 발언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다이먼 회장은 이날 미국 폭스비즈니스네트워크와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을 만든 블록체인 기술은 현실이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비트코인에) 전혀 흥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의 창업자가 새해 벽두에 던진 비트코인 관련 발언도 화제가 됐다. 그는 인터넷이 날로 중앙 집중화돼 가고 있다며 페이스북을 포함한 몇 개의 공룡 기업들이 판도를 좌우하는 현실을 반성했다. 그는 언젠가 암호화폐와 관련 기술들이 이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은 암호화폐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면밀히 검토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언론들은 그의 발언을 페이스북이 새로운 암호화폐를 창안해 결제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비트코인의 침체기였다고 할 수 있는 2014년 비트코이너들은 구글·아마존·페이스북 중 누구라도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인정해 주기를 열망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 중 그 누구도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이 공식적으로 활용해 주는 것이 예전처럼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비트코이너는 많지 않다. 만약 2014년 당시 한 회사라도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인정했다면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의 주류화로 곧바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 회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상당한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한국의 IT 기업 역시 정부 정책과 여론을 가늠하느라고 그나마 남아 있는 영향력을 포기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과 국가 경제의 미래를 놓고 보자면 뼈아픈 실기다.
소송 때문에 비트코인 싫어했던 저커버그
세계 200개 이상의 국가에서 20억 명 이상의 사용자를 확보한 페이스북은 비트코인이 화폐로 사용될 수 있는 최적의 생태계다. ‘좋아요’를 누르면서 소액의 팁을 주거나 게임이나 콘텐츠를 개인 정보 노출 없이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그간 암호화폐에 대해 냉담했다. 2014년 마지못해 승인한 사용자들 간의 결제 애플리케이션도 비트코인이 아니라 도지코인(Dogecoin) 기반이었다. 이 때문에 도지코인의 가격이 치솟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여러 가지 기술적 장애를 제거해 주지 않았고 활성화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비트코인 대신 도지코인을 선택한 것을 놓고 윙클보스 쌍둥이 형제에 대한 저커버그의 ‘복수’라는 말도 있었다. 윙클보스 형제가 보유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10만 개의 비트코인은 저커버그 CEO와의 소송에서 받은 합의금을 투자해 확보한 것이다.
윙클보스 형제는 페이스북보다 비트코인이 훨씬 큰 프로젝트라고 여겨 과감하게 투신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연히 저커버그 CEO로서는 비트코인을 좋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커버그 CEO가 암호화폐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이유는 그의 좌절된 야망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더 높다.
저커버그 CEO는 목표한 사업을 거의 이뤘다. 그런 그가 포기해야 했던 것이 바로 ‘페이스북 크레디트’라는 가상화폐 프로젝트였다. 그는 페이스북을 근거지로 삼으면 달러보다 더 편리하고 더 안정된 온라인 기축통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국가로 치면 인터넷은 가장 많은 국민을 가진 나라다. 교육이나 부의 수준도 높다. 페이스북이라면 이런 인터넷 세계에서 널리 통용될 수 있는 기축통화를 만들 수 있다.
페이스북 크레디트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1달러를 10크레디트로 고정해 가치를 보장했다. 달러만 아니라 유로와 파운드 등 세계 15개의 주요 통화와도 연동됐다. 2010년에는 페이스북 플랫폼에서 게임 등을 판매하는 벤더들에게 ‘페이스북 크레디트’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신용카드 사용을 금지하는 문제로 게임 업체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회사는 페이스북 크레디트를 유일한 결제 수단으로 하는 정책을 폐기한다고 발표하며 한 발 물러섰다. 이 때문에 저커버그 CEO가 미 금융 당국의 압력을 받은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2013년 3월 미국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는 ‘페이스북 크레디트’와 비트코인을 묶어 가상화폐에 대한 규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규제 가이드라인’의 위력은 컸다. 저커버그 CEO와 같은 거물에 대한 취조나 페이스북 본사의 압수 수색이라는 정치적 부
담 없이 페이스북 스스로 ‘가상화폐’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2013년 9월에는 공식적으로 페이스북 크레디트가 페이스북에서 사라졌다. 팡파르를 울리며 시작했던 프로젝트였지만 사라질 때는 너무도 조용했다.
비트코인 회의론자들이 비트코인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를 ‘페이스북 크레디트’는 대체로 해결했다. 믿을 수 있는 거대 기업이 가치를 보장하며 사용처도 뚜렷했다. 페이스북이라는 인터넷 영토, 즉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시민을 보유한 가상 국가의 법정화폐라면 결국에는 달러나 위안화 같은 강대국들의 화폐를 능가해 널리 통용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위대한 인터넷 제국의 정책마저 조용히 없애버릴 수 있을 만큼 규제 당국은 강했고 페이스북은 약했다. 이런 규제의 벽을 비트코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넘나들고 있으니 비트코인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라는 걸 저커버그 CEO는 세상에서 가장 값비싸게 학습한 사람인지 모른다.
[돋보기] 비트코인의 핵심 ‘SPF(Single Point of Failure)의 부재’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바꿔 가면서 게임에 참가하는 플레이어다. 선수와 심판을 겸하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룰을 잘 지키거나 룰의 허점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강적에게 제압당하지 않으려면 투명 인간이 되는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 크레디트는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치명적인 약점(SPF)이 존재한다. 바로 페이스북과 마크 저커버그 CEO다. 규제 당국이 저커버그 CEO를 압박하는 순간 페이스북 크레디트는 조용히 사라질 운명이다. 법리적 공방은 부차적이다. 화폐는 신뢰에 기반 하기 때문에 정부가 발행자를 잡아 가두거나 재산을 압류하는 것만으로도 사업은 위축된다.
비트코인은 SPF가 없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정부에도 찬스는 있었다. 비트코인이 1달러 벽을 넘기 전이라면 정부의 컴퓨팅 파워를 총동원해 시스템을 교란하거나 소수의 채굴자들을 기소해 위협하면 태생기였던 비트코인 생태계는 붕괴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부가 비트코인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비트코인은 투명 인간이 돼 있었다.
가치를 보장하는 개인이나 기관이 없어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바로 비트코인의 최대 강점이다. 정부가 공격할 포인트가 없기 때문이다. 저커버그 CEO가 두 손 들고 포기한 지점이 바로 비트코인에는 출발선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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